죽은 올빼미 농장 (특별판) 작가정신 소설향 19
백민석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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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에서 읽기 좋은 책의 조건은 일단 가볍고 끊어읽기가 가능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죽은 올빼미 농장'은 지하철에서 짬짬이 읽기 좋은 책이다.

작가정신에서 나온 소설향 시리즈 특별판으로,

문고판형에 200페이지가 채 안되는 중편소설이다.

다섯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어 끊어읽기도 좋다.

어느날 '나'의 주소지로 고성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날아온 편지 두 통,

그냥 버려도 될 일이었지만 어쩐지 궁금하다.

주소지를 찾아가면서  추리해가는 재미도 있다.


주인공 '나'와 함께 '인형'이 나온다.

처음엔 인형이 여자친구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중반쯤 지나면서

어릴적 함께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애착인형이란걸 알게 되었다.

서른살이 되도록 인형과 대화하는 '나'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먼트 키즈의 규격화된 삶, 착각과 환상속에서 사는 삶을

이미 오래전 "죽은" 올빼미농장을 찾아가는 길과 친구 '손자'의 죽음,

그리고 현실의 친구 '민'과 재건축을 위해 철거중인 아파트 현장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결국, 죽은 올빼미 농장에 인형을 수장시키고 돌아오면서 비로소 평범하지 않던 삶에서 벗어난 듯 하지만

'나'는 아직 현실과 맞이하고 싶지 않다.


조금 독특한 소설이다.  뭔가 알듯 모를듯하다.

현실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 주인공의 심리때문인지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때도 뭔가 개운치가 않다.
그래서인가....좀 어렵단 생각도 든다.

한 번 더 읽어보면 이해가 되려나.

현실로 나오고 싶지 않은 어른아이들이 읽는다면 공감할 수도.

 

p. 114

공중에 들린 채로 유아기를 보내는 아이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규격 유리창들, 공장에서 찍어낸 놀이기구들......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유아기의 아이들이 갖게 되는 최초의 어떤 느낌들. 생애 최초의 실감들. 인형도 그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아파트촌의 황혼은 너무 묽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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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철학자 - 그곳에서 만난 제일 쉬운 철학 강의
애덤 플레처 & 루카스 N. P. 에거 지음, 강희진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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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철학을 읽는다?

아주 원초적인 일을 행하는 곳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과 답을 얻는다니 어쩌면 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책보다 폭이 좁은 판형과 좌우여백이 아주 적은 편집이라 처음엔 손에 가질 않았다.

읽다보니 이해가 간다. 이 책은 화장실에서 읽는 책이므로.

 

평생 화장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1년 7개월정도 된다고 한다. 그 중 변기위에 앉아 있는 시간만 해도 92일이나!

하루 10~20분, 무언가를 비워냄과 동시에 새로운 지식을 조금이라도 채우고 나오라는 취지의 책이다.

이것을 화장실 대학이라 명명하고 95개의 각 꼭지 이름을 응강이라고 했다.

처음엔 의아했으나 응가와 강의의 합성어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철학을 굉장히 유머러스하게, 현실적으로 와닿게 설명한다.

일반인과 철학자의 질문에서 답변에 이르는 길의 차이 등 순간순간 웃음코드가 숨어있다.


1. 인식론: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지식들을 잘 포장하면 사람들을 속이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2. 형이상학: 세상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세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왜 우리가 나눠 먹을 파이가 이렇게 작은 거지?)

3. 윤리학: 어떤 해동이 올바른 것일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감추고 살아갈 수 있을까?)

4. 미학: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저 잘생긴 남자 혹은 저 예쁜 여자와 침대로 뛰어들 수 있을까?)

(p. 17)





기본 편집은 철학이론에 대한 사례중심의 설명과 업적, 어록, 일화 등 철학자 소개,

그리고 한컷 이미지로 나타낸 그 철학자의 화장실을 통해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철학자를 엿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따분하고 어려운 철학분야임에도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 정치가들의 90%는 나머지 10%의 정치가들이 나쁜 평판을 받게 하기 위해 애쓴다. - 플라톤 (p. 49)


-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우리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위대함으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p. 69)


 

특히 지금 상황과 딱 맞는 플라톤의 어록과 외계인에 의한 납치보다 더 거짓에 가까운 선거공약이 있는 걸 보고는 혼자 킬킬거렸다.

만화책도 아닌데 말이다.

읽다 보면 화장실에서의 본연의 일보다 책에 빠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다리저림이나 변비에 주의하시라.


그렇다고 가볍게 읽을 책도 아니다.

소크라테스적 반어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대화기술, 뮌히하우젠 트릴레마 이론을 통한 논리적 추론방법,

진실과 지식, 지혜의 차이, 선택과 편견 등에 대한 내용들은 흥미로웠으며

다양한 도표와 그림, 적절한 예는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잘 다뤄지지 않는 여성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엔 꽤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아~ 표현력의 부족함이여! ㅠ.ㅠ)


쉽고 재미있게 읽었다지만 생각보다 그렇다고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생각과 이해를 반복하며 읽어야 해서 한번에 여러 응강을 읽다보면 두뇌회로가 꼬일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비우고 나올때 인풋한 내용들도 함께 비워냈을지 아닐지는 마지막에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처럼.  물론 객관식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반 이상 맞추면 합격증명서도 자체발급할 수 있다.

나는, 재수강을 해야겠다.



 

덴마크의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르겠다.
케이르케고르는 "결혼하라,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아라, 그래도 당신은 후회할 것이다.
......어리석은 세상을 비웃어라, 당신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세상을 보며 눈물을 흘려도 당신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목을 매달아도 매달지 않아도 당신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구체적인 결정을 내린 이후의 후회는 별 소용이 없다.
다만,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확신과 사고의 흐름을 검토해볼 수 있을 뿐이다.

(p.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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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색을 품다 - 민화 작가 오순경의 우리 그림 이야기
오순경 지음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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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책 표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빨강에도 여러가지 빨강이 있겠지만 이 빨강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어떤 재료를 사용하면 이런 빨강이 나올까?

(물론 이런 질문은 책을 읽고 난 후에 들었다.  민화를 그릴때 다양한 천연재료를 사용하여 색을 낸다고 한다)

그저 곱다....라는 말로 다 품을 수 있을까?


 

책을 읽기 전 쭈욱 훑어보면서 아~ 참 좋은 책을 만났구나 싶었다.

도판이 이리 많이 들어간 책은 근래 오랜만이다.

그것도 화질이 엄청 좋은 도판이. (물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대부분 작가 오순경의 작품들이었기 때문이겠지만)

아직 내용을 읽기전이었지만 그림들을 보며 막 흥분했더랬다.

두페이지 중 한쪽은 도판일 정도로 본문에서도 옛그림이 많이 등장하지만,

뒷부분에 갤러리를 따로 두어 텍스트의 방해 없이 오롯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구성도 좋다.

특히 고궁박물관의 화성능행도를 기본으로 모사한 <정조능행도> 8폭은 지금까지 봐 온 그림들 중 가장 크다.

고궁박물관에서나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그림인데 가까이 두고 볼 수 있다니 좋다.

등장인물만 7천명이 넘는 이 대작을 작가 혼자 그리는 과정을 상상해보니 대단하다는 말 말고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책에서가 아닌 실제로 만나보고 싶다.  물론 모든 작품들 다~!

그 중에서도 내 맘에 제일 사로잡은 그림은 <마마>에서 등장했다는 <연화도>이다.



 


민화, 그저 옛그림에 관한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배우 이영애와 송윤아의 추천사가 써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몰랐기에 드는 의아함이었다.

알고 보니 작가 오순경은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와 <마마>의 전통화 부문 디렉터를 맡았다고 한다.

<사임당>은 대충 짐작은 갔지만 <마마>에 민화가 등장하는 줄은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더 생생하게 와닿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이제라도 역주행한번 해볼까나?


 


<민화, 색을 품다>는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민화들을 도구로 민화에 대한 이야기를 색, 마음, 공간, 이야기라는 네가지 주제로 풀어냈다.

대부분 작가의 작품이지만 모본으로 한 작품의 경우 원본도 함께 실은 경우가 많다.

책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작품은 <일월오봉도>이다. 임금님 뒤에 자리하고 있는 이 그림도 민화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건 작가의 민화에 대한 생각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었다.


p.21~22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화는 그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한 아마추어 화가의 작품이라거나,

이름없는 작가에 의해 제멋대로 모사된 그림이라 알고 계실 겁니다.

'민화民畵'라는 용어를 단순하게 풀면 '백성이 그린 그림'이란 뜻이니까요.

(...)

저는 민화를 '한국 전통 채색화'로 조형성과 품격 면에서 높은 예술성과 표현 기량을 가진 전통회화로 이해하고 있고

그런 개념의 범주 안에서 이야기를 이어갈 것입니다.


 

작품과 드라마 한장면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도 많이 나오는데

본인 작품에 대해 "세련되다" 고 자평을 한 걸 보면 작가의 애정과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라마 속 사임당과 이겸의 색이 화이트와 블랙인 이유, 배채법을 이용한 사임당의 미인도 제작과정 설명,

바로 이런, 드라마속 상황이나 장면설명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다가오지 않았다는게 읽는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저 미닫이문, 정말 갖.고.싶.다~!)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는 <궁모란도병>은 대비와 중전을 위해서만 펼칠 수 있는 병풍으로,

백성 누구라도 평생 딱 두번 혼례와 초상때는 펼치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임금이 그 곁을 지켜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나

<합죽선>에서 부채의 양쪽 겉 부분을 '변죽'이라 부르는데, 겉만 훑고 가다는 뜻의 '변죽만 울리고 간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50살 100접 부채는 왕과 왕비, 대비만이 소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상상하며 읽는 재미가 있는 춘화,

<어변성룡도>와 등용문에 관한 이야기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민화속 소재에 따른 명칭, 그 의미를 짚어줘서 민화를 아는 만큼 더 많이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p. 159

민화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는 그림입니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보는 이가 나름대로 읽어 내면 됩니다.
물론 그림의 도상이 상징하는 기본적인 정보를 이해하면 좋겠지만 알면 아는 만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읽어 내고 또 그것을 읽어서 자신만의 줄거리를 만들면 그만입니다.
민화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끊임없이 이야깃거리를 마들고 그 이야기에 시간이 더해져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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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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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종개못톡잠초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지 한참 노려봤는데 그건 아니다.

각 글자마다 단편의 제목이다.  한 글자로 된 제목은 읽다보면 내가 생각한 그 뜻이 아닌 경우도 있다.

글자 하나에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는데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뜻일지 상상하며 읽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 조금 이해가 된다.


 



깔끔한 표지디자인과 각양장 뿐만 아니라 왼쪽에는 단편의 제목을 표시해서

읽으면서 제목의 중의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게 하는 세심한 편집이 맘에 든다.



자신을 두고 떠난 부모를 찾아나선 소년, 집안의 유일한 계집이자 모두의 종이 된 누이,

입시의 압박감으로 알 수 없는 증오가 가슴에 깊은 홈을 새긴 아이들,

머나먼 나라에서 늙은 남자에게 시집와 “나 사람 아니야”라고 마당의 개들에게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젊은 여자,

연인과 헤어지고 많은 유기견을 키우는 여자, 외로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를 아는 개 백구,

비밀스러운 연애를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 사이에 박혀 있는 마음의 못,

빨대로 물방울을 톡 바닥으로 떨어리는 사소한 장난에서 시작한 눈물같은 삶의 비밀,

불면증을 앓고 있는 두 남녀가 밤 산책하면서 만나 보낸 비밀 같은 시간,

짧지만 긴 시간, 초(second)와 어둠을 내쫓아 환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초(candle)를 통해서

소설 <휘>는 우리 주위에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은 진실을 담은 거짓말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종>과 <초>는 그 중 제일 가슴아프게 읽은 작품이다.

슬퍼서 가슴이 아프고, 찔려서 가슴이 아프다.

손솔지, 20대 젊은 작가라는 수식어는 연령차별이겠지?

단편집이지만 한편한편 탄탄하다. 

전작, <먼지 먹는 개>도 조만간 읽어봐야 겠다.

상징과 은유의 섬세한 문장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시선이 돋보이는,

오랜만에 흠뻑 빠져 읽었던 소설이다.

다만...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내용들인지라 우울해지고 싶은 날에 읽기에 좋다.






소설은 ‘진실을 담은 거짓말‘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현실은 ‘거짓을 담은 진실‘에 가깝고 말입니다. 그렇게 소설과 현실은 거울을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글자인데, 글자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고 힘이 아주 세기 때문에 왕왕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모양과 의미를 달리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 P6

<휘>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이름이 있었던가. 어머니는 집 안의 냉장고이거나 선풍기이거나 식칼이거나 양파망처럼 그 자체로 고유명사였다.
- P28

<종>
누구든 누이을 쳤다. 뒤에서 혹은 앞에서 그녀를 칠 때마다 내 방 벽에 짓눌린 누이의 입술에서는 깨질것 같은 울리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올 때마다 기도하듯 고갤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누이가 싫었다. 그녀의 천함이 더럽고 더러워서 더럽게 싫고, 싫고 싫어서 종국에는 내가 그녀를 치지 않게 되길 간절히 빌었다.
- P40

<못>
그녀는 이따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와 내 일상에 꽂히는 책갈피 같은 존재였다. 나를 잠시 덮어두고 그녀를 맞이할 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 P143

<초>
모두를 구조했다는 속보는 백일몽이었을까. 낮에 방송된 오보에 대해 사과하며 아나운서는 깊이 허리숙였다. 일그러진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원두를 갈고 커피 물을 내리고 빙수에 시럽을 끼얹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그 반나절 동안, 가라앉는 여객선 안에서 누구도 구출되지 못한 것이다. 거센 바람결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파도가 칠흑처럼 어두워질 때까지도 모두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 갇혀 있었다.
- P232

<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누군가 손으로 주무르다가 그대로 두고 간 찰흙 모형처럼 그 거대한 사고는 모호한 모양으로 멈춰진 채 시간을 견뎌야 했다. 진실의 행방은 묘연하고, 오래 지속되어온 쇼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노란 리본을 멘 채로 지나가는 타인을 지겨워했다. 타인의 아픔은 철저하게 전시품이 되어 그들의 시선에 걸렸다.
(...) 슬픔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라 빨리 잊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추모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이 철 지난 연극을 반복하는 것처럼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거리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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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엌에서 과학의 모든 것을 배웠다 - 화학부터 물리학·생리학·효소발효학까지 요리하는 과학자 이강민의 맛있는 과학수업
이강민 지음 / 더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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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리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하루 중 부엌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과학의 여러 분야가 우리집 부엌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막연하게 그런것 같긴 한데...에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고른 책이다.

<나는 부엌에서 과학의 모든 것을 배웠다>는  물리학, 화학, 생리학, 생체분자학, 효소발효학 관점에서 본 요리이야기이다.


물리학에서는 열, 압력, 삼투현상, 확산, 점성, 탄성, 특히 분자요리학 부분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맛과 향, 영양면에서 완벽하다는 수비드(Souvide) 요리법에 대해 흥미로워 나도 시도해보고 싶어 여러 자료를 검색해봤다.

진공포장기, 항온수조 등 아...준비해야 할 조리도구가 무지 비싸다.  섣불리 도전하지는 못하겠다. 여력이 생기면 꼭 도전~!

화학에서는 향, 색과 관련된 화학반응과 풍미를 높이는 몇가지 팁도 소개했다.

생리학에서는 풍미, 후각, 미각, 촉각, 시각, 청각을 요리와 연결해 설명하고 있으며,

생체분자학에서는 영양소가 음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와 식감의 상관관계를,

효소발효학에서는 알코올발효, 젖산발효를 음식과 연결지어 설명했다.



 


읽으면서 뭔가 아쉽다는 생각(레시피가 궁금해~)을 계속 하게 되지만 이 책은 분명 과학서이기 때문에 그 경계를 넘지는 않았다.

어려운 과학용어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교양상식으로 갖추면 좋을만한 내용들도 많다.

와인 패어링, 에티켓, 온도, 잔 등 알아두면 좋을 와인이야기는 특별히 지면을 더 할애했다.




평소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재료를 이용한 설명으로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감성적 손그림으로 딱딱하지 않아 좋다.  다만, 사진은 많지 않지만 흑백이라 아쉽다. 



"​우리의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무척 공감하며, 전에는 시도해보지 않은 약간의 요리팁(스테이크에 전통간장을?)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세계화할 수 있는 우리 음식으로 꼽은 깻잎, 순대, 전통간장에 대한 연구개발이 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문)
예전에는 요리사들이 손님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면 요즘 요리사들은 요리의 맛은 기본이고 창조와 혁신에서 오는 감동까지 선사해야 한다. 즉 과학을 통하여 새로운 기술로 늘 새로운 레시피를 추구함으로써 참신한 요리를 강조해야 하며, 요리사의 기술과 감성을 담아 맛과 모양과 분위기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이 되도록 해야 한다.
- P7

우리가 자주 마시는 막걸리는 어떻게 보면 국적이 없는 술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수입해 온 쌀을 사용하여 일본에서 가져온 강력한 단일 발효균을 가지고 막걸리를 빚는다. 그래서 한국 어디를 가드지 맛은 거의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지역의 물과 맛을 내는 조미료의 차이뿐이다.
과거에는 동네마다 양조장이 있었다. 동네 양조장은 그 지역에서 수확한 쌀을 사용하고 그 양조장에서 만든 누룩을 사용하여 막거리를 빚었다. 지역마다 독특한 향을 가진다는 와인의 테루아처럼, 그 지역의 쌀과 누룩을 가지고 양조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술과 차별화가 되었다.
- P141

우리 전통간장은 콩을 주원료로 하는 왜간장과 달리 메주를 주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구수한 메주 향이 나고 약간 쓴맛이 난다. 또 전통간장은 실제로는 매우 짠데 막상 맛을 보면 짠 것 같지 않고 뒷맛이 구수하고 달짝지근하다. 국수양념장, 미역국, 도토리묵전에는 전통간장을 써야 하고 스테이크 소스, 샐러드 소스에도 전통간장이 들어가면 개운한 맛이 난다. 이렇듯 앞으로도 우리만의 독특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 양념과 식재료를 개발해야 한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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