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렇게 밑줄긋기하면서 이것도 ‘저장‘인데....싶다.

저장이 본능이 된 시대
다만 과거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었다. 기록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드는 만큼, 저장에 앞서 선별이 필요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정해진 수량 안에 무엇을 담을지 고민해야 했고, 책장이 가득 차면 어느 책을 보관하고 어느 책을 버릴지 결정해야 했다. 반면 디지털 시대의 저장은 선별하지 않는다. 저장 용량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정보는 넘쳐나고 저장할 수 있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사람들은 어느새 본능적으로 ‘저장‘부터 누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심지어 많은 디지털 장치들은 별도로 ‘저장하지 않음‘을 선택하지 않는 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기본값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삶은 곧 저장을 의미한다.
AI 시대에 저장의 양상은 한 번 더 진화한다. 일상의 사진이 모여 취향의 포트폴리오가 되고, 녹음.영상은 어느 순간 증거가 되고, 위시리스트는 개인화 추천의 기반이 되고, 몇 년 간의 업무 기록은 나만의 AI 에이전트를 만드는 근거가 된다. AI가 스스로 가치를 생성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습관이자 강박처럼 저장을 한다. 저장은 이제 차곡차곡 모아두는 ‘저축‘이 아니라 미래에 생겨날지 모르는 가치를 위한 ‘투자‘에 가깝다.
- P262

요즘 사람들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일단 기록을 남기고 본다. 먹은 것을 찍고, 친구와 나눈 대화를 캡처하고, 오늘 본 영상을 저장해두고, 그날의 기분을 앱에 적는다. 예전에는 졸업식이나 생일처럼 오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만 기록했다면, 지금은 어떤 일상이든 붙잡아두려 한다. 일기 앱을 사용하는 한 소비자는 이처럼 일상을 남기는 일에 대해 ‘시간이 안전하게‘ 남아 있다는 표현을 썼다. 뒤집어 말하면 기록해두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의미다.
(...)
사진은 사람들이 일상을 남기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한전문 매체에서는 Z세대의 스마트폰 앨범을 ‘의도치 않은 자서전 ‘accidental autobiography‘이라고 표현했다.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기억해두고 싶었는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 P266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기록이 디지털 기술로 연결돼 연대감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읽고 있는 책의 어느 문장이 마음에 들어 밑줄을 쳤는데, 나 말고 누군가 같은 문장에 밑줄을 쳤다면 어떤 기분일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앱, ‘알로그rlog‘는 독서를 하면서 익명으로 기록을 남기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같은 책의 어떤 페이지에서 기록을 남겼는지 볼 수 있다. 내가 책의 특정 페이지에 짧은 메모나 문장을 남기면, 같은 책을 읽는 다른 독자들에게 이 기록이 메아리처럼 전달되는 ‘에코Echo‘ 기능을 통해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과 페이지별 감상을 익명으로 공유하며 연결된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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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주의보다 완료주의
"끝내는 것이 완벽한 것보다 낫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

페이스북 본사 벽면에 붉은 대문자로 걸려 있던 유명한 문구다. 페이스북 전 COO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저서 「린 인(Lean In)」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으로 소개하며 널리 알려졌다. 그 뒤에 덧붙인 설명도 중요하다. 완벽을 추구하는 태도는 잘해야 좌절을 낳고, 최악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완벽주의가 오히려 시작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은 많은 이의 공감을 부른다. 실제로 우리의 시작을 미루게 하는 원인은 대부분 아직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는 완벽주의적 용기 부족이다.
- P253

이처럼 실행의 속도가 중요해진 해봄경제에서 개인 간 격차를 가르는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느냐가 아니라, 그 생각을 단 한번이라도 실행에 옮겼느냐다. 해결하고 싶은 문제나 도전해보고 싶은 시도가 생겼다면, 완벽한 계획과 충분한 역량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로 즉시 시작해야 한다. 머릿속의 막연한 고민은 직접 부딪히는 순간, 구체적인 문제와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다음 방향을 알려주는 현실의 정보로 바뀌기 때문이다.
- P256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여러 시도를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얻은 성과와 실패를 다음 실행의 자산으로 학습하는 능력이다. 특히 실패가 소중하다. 실패는 감춰야 할 실책이 아니라 더 나은 구조를 발견하게 하는 학습의 재료다. 관건은 단번에 성공했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시도했고 어디까지 구현해봤으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워 어떻게 보완했는지를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 시행착오와 개선의 이력이 쌓일 때 비로소 ‘해본 경험‘은 대체 불가한 실행자산이 돼 오래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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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친구 대신 가족을 선택할까? 새로운 인간관계는 시간·노력·감정 소모를 동반하고,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스트레스까지 준다. 반면 가족과의 관계는 실패할 위험이 적다. 진미정 서울대학교 아동가족학과 교수는 저서 ‘가족이라는 사치』에서 이를 ‘서정적 가족주의‘로 해석한다.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가족만은 끝까지 내 편이라는 믿음으로 단단히 묶인 관계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태도다. 인간관계에서조차 ROI를 따지는 사람들에게 가족은 가장 안전한 투자처인 셈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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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극의 추구가 다시 자극이 되는 역설
자극을 덜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능력을 겨루는 ‘멍 때리기 대회‘가 그렇다. 참가자들은 가만히 앉아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결국엔 ‘대회‘일 뿐이다. 뇌파나 심박수를 측정하고 순위를 매기며 가장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사람이 우승을 하는 방식이다. 권태를 걷어내려던 시도가, 결국 또 하나의 완주해야 할 목표가 돼버린다. 자극을 덜어내는 일조차 성과로 증명해야 한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하지 않는 법을 선택한 게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마저 틈새에 끼워 넣거나 전에 없던 무위로 교체하고 있을 뿐이다.
- P157

응집되지 않는 정보
정보와 지식이 많아졌다. 특히 AI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는 궁금하면 즉각 답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문제는 많이 보고 듣고 알게 됐는데, 그것이 하나의 의미로 뭉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권태를 촉진하는 시스템의 문제다.
(...)
숏폼을 한 시간 내리 보고 난 후 밀려드는 허탈함은, 개별 콘텐츠들이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할애한 시간 전체의 의미가 뭉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58

내 손으로 만들어낸 물건에 더 큰 애착을 느끼는 심리를 이케아효과 IKEA effect라고 한다. 다만 이 효과는 노동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직접 조립한 결과물을 완성 직후 도로 해체하게 하면 애착은 사라진다. 노동이 완성으로 매듭지어져야 비로소 애착이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는 이 효과가 AI 때문에 쉽게 무화된다는 점이다.
- P161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노동사간이 줄어드는 사회일수록 여가를 현명하게 쓰는 능력을 가르쳐야하며, 그 능력을 기르는 데는 역설적으로 게으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주장은 현 시점에도 유효하다. 소설가 김애란은 AI와 인간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망설임‘을 꼽았다.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때 말을 삼키고 주저하는 그 찰나의 망설임 말이다. 정답을 바로 내놓는 매끄러움이 아니라, 머뭇거리느라 생기는 빈틈이 중요하다. AI는 빠르게 해결하지만, 인간은 망설인다. 그 망설임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여백을 다루는 방식‘이다. 자극이 넘칠수록 우리는 이 가장 인간적인, 여백을 다루는 방식을 익혀야 한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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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시니어 경력자가 될 수 없다
AI는 일자리를 없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재편한다. 2016년, 딥러닝의 선구자 제프리 힌턴은 "AI가 5년 내 방사선 전문의를 대체할 것"이라 예언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방사선 전문의라는 직업은 건재하다. 달라진 것은 경쟁의 축이다. 이제는 AI를 쓰는 의사가 그렇지 않은 의사를 밀어내고 있다.
일자리는 사라지는 대신 모양을 바꾼다. 한국고용정보원도 향후 10년 고용의 핵심을 "일자리 소멸이 아닌 직무 재편"으로 진단했다.
(...)
문제는 많은 조직들이 시간을 투입해 신입을 키우기보다 검증된4~7년 차 경력 사원을 선호하게 됐다는 점이다. AI 전환의 비용을 20대가 치르고 있는 셈이다.
- P85

사무실에도 검증의 청구서가 날아든다. 소위 워크슬롭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 같은 슬롭 문서가 쏟아질수록, 그것이 과연 제대로 작성된 것인지 가려내는 사람의 일은 오히려 늘었다. 그렇다면 검증은 누가 잘하는가? (...) AI의 첫 답변에 만족하지 않고 반박하거나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여러 차례 반복하며 결과를 다듬었던 사람이 최상위 사용자 자리를 차지했다.
결국 AI를 잘 쓰는 사람은 잘 의심하는 사람이다. AI가 실행의 수고를 덜어준 만큼, 검증이 새로운 일이 되고 있다. 만드는 시간은 줄었는데 가려내는 시간은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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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슬롭workslop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체나 실용성이 없는 Al 생성 업무 산출물을 뜻한다. (하버드 비즈니스리뷰HBR)와 스탠퍼드 소셜미디어연구소 등이 미국 정규직1,150명을 조사한 결과 40%가 최근 한 달 내 워크슬롭을 경험했고, 한 건을 처리하는 데평균 2시간, 1인당 월 186달러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HBR, 2025년 9월).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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