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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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종개못톡잠초 혹시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닌지 한참 노려봤는데 그건 아니다.

각 글자마다 단편의 제목이다.  한 글자로 된 제목은 읽다보면 내가 생각한 그 뜻이 아닌 경우도 있다.

글자 하나에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는데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뜻일지 상상하며 읽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 조금 이해가 된다.


 



깔끔한 표지디자인과 각양장 뿐만 아니라 왼쪽에는 단편의 제목을 표시해서

읽으면서 제목의 중의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보게 하는 세심한 편집이 맘에 든다.



자신을 두고 떠난 부모를 찾아나선 소년, 집안의 유일한 계집이자 모두의 종이 된 누이,

입시의 압박감으로 알 수 없는 증오가 가슴에 깊은 홈을 새긴 아이들,

머나먼 나라에서 늙은 남자에게 시집와 “나 사람 아니야”라고 마당의 개들에게 하소연할 수밖에 없는 젊은 여자,

연인과 헤어지고 많은 유기견을 키우는 여자, 외로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를 아는 개 백구,

비밀스러운 연애를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 사이에 박혀 있는 마음의 못,

빨대로 물방울을 톡 바닥으로 떨어리는 사소한 장난에서 시작한 눈물같은 삶의 비밀,

불면증을 앓고 있는 두 남녀가 밤 산책하면서 만나 보낸 비밀 같은 시간,

짧지만 긴 시간, 초(second)와 어둠을 내쫓아 환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초(candle)를 통해서

소설 <휘>는 우리 주위에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은 진실을 담은 거짓말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종>과 <초>는 그 중 제일 가슴아프게 읽은 작품이다.

슬퍼서 가슴이 아프고, 찔려서 가슴이 아프다.

손솔지, 20대 젊은 작가라는 수식어는 연령차별이겠지?

단편집이지만 한편한편 탄탄하다. 

전작, <먼지 먹는 개>도 조만간 읽어봐야 겠다.

상징과 은유의 섬세한 문장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시선이 돋보이는,

오랜만에 흠뻑 빠져 읽었던 소설이다.

다만...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내용들인지라 우울해지고 싶은 날에 읽기에 좋다.






소설은 ‘진실을 담은 거짓말‘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현실은 ‘거짓을 담은 진실‘에 가깝고 말입니다. 그렇게 소설과 현실은 거울을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글자인데, 글자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고 힘이 아주 세기 때문에 왕왕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모양과 의미를 달리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 P6

<휘>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에게도 이름이 있었던가. 어머니는 집 안의 냉장고이거나 선풍기이거나 식칼이거나 양파망처럼 그 자체로 고유명사였다.
- P28

<종>
누구든 누이을 쳤다. 뒤에서 혹은 앞에서 그녀를 칠 때마다 내 방 벽에 짓눌린 누이의 입술에서는 깨질것 같은 울리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올 때마다 기도하듯 고갤 숙이고 눈을 감았다. 누이가 싫었다. 그녀의 천함이 더럽고 더러워서 더럽게 싫고, 싫고 싫어서 종국에는 내가 그녀를 치지 않게 되길 간절히 빌었다.
- P40

<못>
그녀는 이따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와 내 일상에 꽂히는 책갈피 같은 존재였다. 나를 잠시 덮어두고 그녀를 맞이할 때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 P143

<초>
모두를 구조했다는 속보는 백일몽이었을까. 낮에 방송된 오보에 대해 사과하며 아나운서는 깊이 허리숙였다. 일그러진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원두를 갈고 커피 물을 내리고 빙수에 시럽을 끼얹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그 반나절 동안, 가라앉는 여객선 안에서 누구도 구출되지 못한 것이다. 거센 바람결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파도가 칠흑처럼 어두워질 때까지도 모두가 그 거대한 생명체 안에 갇혀 있었다.
- P232

<초>
참 이상한 일이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누군가 손으로 주무르다가 그대로 두고 간 찰흙 모형처럼 그 거대한 사고는 모호한 모양으로 멈춰진 채 시간을 견뎌야 했다. 진실의 행방은 묘연하고, 오래 지속되어온 쇼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노란 리본을 멘 채로 지나가는 타인을 지겨워했다. 타인의 아픔은 철저하게 전시품이 되어 그들의 시선에 걸렸다.
(...) 슬픔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라 빨리 잊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추모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이 철 지난 연극을 반복하는 것처럼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거리에서 우리는 살고 있었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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