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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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4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간다고들 한다. 두 가지에 있어 재밌는 표현이다. 하나는 정신이 정말 먼 곳까지 날아가 버릴 정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멀리 날아간 것일까? 약 250만 광년이다. '타임머신'이라는 단어, 혹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단어가 항간에 널리 퍼지면서 빛의 속도가 얼마인지는 사람들이 대체로 알고 있다. 그 빠른 빛이 250만 년을 날아간 거리는 km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멀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은 250만 년 전의 것이다.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 당시 지구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가 우리의 모습으로 변할 때까지 달려온 빛이 오늘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이다. 사실 이 정도 단위가 되면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다. 안드로메다로 간다는 표현이 재밌는 두 번째 이유는 이거다. 시쳇말로 "정신줄을 놓는다."고 하는데, 우주는 그 무시무시함과 황홀함 외에도 규모 면에서 우리에게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농담으로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나 더 해보자면, 우리의 정신이 굳이 안드로메다로 갈 필요는 없다. 안드로메다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와 우리은하, 즉 은하수는 약 30억 년 후에 충돌한다. 아니, 여기서 '충돌'은 과학적 표현이라기보다는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나 할 법한 표현이다. 두 은하가 서로 얽혀서 찢어지는 격렬한 춤을 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겠다. 30억 년 후, 지구의 밤하늘은 지금보다 더 밝을 것이다.


  나는 우주를 동경하면서 여러 다큐멘터리, 서적,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왔다. 전공은 아니기 때문에 늘 어깨 너머로 듣고 용어를 쉽게 잊어버리는 편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주의 사진을 바라보는 마음은 한결같다. 우주는 나에게 '겸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무심한 우주가 나에게 그걸 선물한 것은 아니다. 내 안에서 발현된 어떤 성향일 것이다. 그런데 이 겸손은 종교적 겸손과는 좀 다르다. 종교가 주는 겸손은 신에의 복종, 즉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지만 우주적 겸손은 오히려 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규모 면에서 상상을 뛰어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표현대로 우리가 하루살이가 되기 때문에 생기는 압도가 그 겸손의 근원지이다.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과 끝내 알아내겠다는 호기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것, 그것이 인류가 우주를 대하며 갖게 되는 오만 가지 생각의 공통점일 것이다.


  지구에서 우주로 던지는 질문은 지구인의 근본적인 물음들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혹은 뿌리를 흔든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질문은 SF영화나 만화의 허무맹랑한 거짓말 정도로 여기겠지만 사실 그런 질문은 과학자들이 하는 것이다. 가령, "화성이나 혜성의 파편에서 지구의 생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포자 가설)"라는 질문이나,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는 거대한 얼음지각판이 있는데, 그 밑의 바다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 외계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이는 1977년 지구의 해저열수공 탐사 계획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열렸을 때, 태양열에 의존하지 않는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 이후 급속도로 불붙은 질문이다.)" 같은 대담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지구에 기초한 과학적 근거를 우주로 확장시켜 대답을 얻고자 하는 전문적인 시도이다. 항간에서 UFO를 쫓을 때, 과학자들은 SETI 프로젝트로 외계문명의 존재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실측을 통해 현재 수신되는 외계 전파가 있는지 자료를 수집한다. 이는 영화 『콘택트』에서 나온 픽션에 그치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의 고전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질문을 우주에 비춰보는 것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에서 벗어나 (약간은 그 향을 지닌 채로) 과학적인 내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 먼 데모크리토스에서부터 오늘날 그 유명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추적해볼 수 있다. 천문학자들은 현대과학과 최첨단기술의 최전선에 서서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린다. 지구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우주의 비밀을 이미지로 전송해준다. 허블은 성운들 사이에서 아기별이 탄생하는 모습을 적외선으로 찍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놀라운 친구이다. 보이저 호가 한 때 아홉 번째 태양계 행성으로 우리의 관심을 받았던 명왕성의 궤도마저 벗어나 저 멀리 오르트 구름 사이로 들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금성의 대기로 들어간 소련의 베네라 7호는 금성의 엄청난 대기압을 몸소 체험하다가 35분 만에 통신이 두절되었다. 카시니 호에 붙어 있던 탐사선 하위헌스 호는 목성의 대표적인 위성 타이탄에 착륙해 그 놀랍고도 끔찍한 위성의 모습을 전송해줬다. 지상에서도 신비의 발견은 계속된다. 우리는 오늘날 전 우주의 95%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우주의 끝을 따라잡더라도 결코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과학자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어둠이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죽음을 문득 떠올리게 되는 까닭 말이다. 큰 단위와 아른거리는 먼 물체는 우리에게 어떤 한계,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호기심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포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놀랍다. 자신도 결국 죽게 될 처지이지만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죽음, 혹은 종말을 놓고 고민한다. 죽음은 공포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기심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죽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끝난다. 우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새롭게 시작된다. 조금 억울할 수도 있다. 우주와는 달리 우리는 무심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영원하길 바란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나를 이루고 있던 물질들이 대양과 공기, 혹은 바다로 들어가 순환하여 새로 태어날 아기의 분자를 이루게 된다. 이걸 조금 더 넓게 생각해보자. 내셔널지오그래피의 다큐멘터리인 《The Journey To The Edge Of The Universe》에 보면 우리 몸이 '별들의 핵폐기물(stellar nuclear wastes)'로 이뤄졌다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우주의 일부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죽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순환'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 않을까?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생각보다 '우주적'이다. 만약 이런 이치를 받아들이기가 거북하고 두렵다면 나는 한 권의 책을 권장하고 싶다. 크리스 임피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원제 : How It Ends)』이다. 이 책은 크리스의 2부작 중 하나로 다른 한 권은 (이미 눈치 챘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날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은 대개 위트가 넘친다. 그러나 그냥 재밌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부 과학자들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여러 굵직하고 예민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주로 'Edge'에 기고하는 과학자들이 그런 문제들을 따지는 걸 좋아한다. 샘 해리스처럼 과학과 도덕을 연결시켜 과학에 기초한 도덕을 제시하려는 급진적인 과학자들도 요즘 대세다. 판도를 그려보자면 도킨스는 이제 고전이 되었고, 해리스가 그의 바통을 넘겨받은 모양새다. 그들의 글을 읽는 건, 사실 종교보다는 과학을 존중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다. 종교나 철학을 배제하더라도 기존의 도덕관념이 저항하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어조가 강하지 않은 과학자다. 독자들이 어렵게 느끼겠다 싶으면 문단의 마지막을 위트 있는 비유로 곧잘 마무리하곤 하는데, 이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간과하거나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지구 바깥으로 끌어낸다. 크리스는 우주생물학의 권위자다. 이런 과학자들은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을 주로 연구한다. 1970년대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신생 학문이다. 때문에 크리스가 말하는 '세상의 끝'은 생물학적 현상인(이걸 행성이나 항성의 현상으로 이해하면 좀 어긋나겠는데) '죽음'을 우주적 단위로 끌어올린 모습이 된다. 나갔던 문제들이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면 어떤 모양이 될까? 독자의 몫이다.


  아무래도 과학책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암기할 목적이 아니라면 전문용어들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결국 우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니 우리가 우주에서 찾아낸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런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다. 가령, 복잡한 우주와 생명을 연구하는 현대의 과학은 고전적인 이원론의 붕괴를 가져왔는데,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고대종교들이 이원론적이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육체와 정신의 분리 말이다. 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나는 도킨스의 『악마의 사도』에서 읽은 바 있는데, 그는 줄기세포 연구 반대론자들을 반박할 때, 어디서부터가 생명이고 어디서부터가 생명이 아닌지를 나누는 사고 자체가 문제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특유의 어조로 종교적 폐단을 언급했다. 크리스가 불교의 업보, 즉 카르마를 예로 들면서 이원론을 은근슬쩍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인상 깊게 들은 한 교양강의의 교수도 이 업보에 대해 비판했었는데, 그는 "쥐의 업보라는 것이 있을까? 쥐에게 도덕이라는 것이 있을까?"라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 즉 이원론을 배제하는 패러다임에서는 경계가 해체된다. 나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는 죽음의 판정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들려주는데, 그로부터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의 이원론적 판단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72~73쪽에 언급된 세포자살기능인 apoptosis에 대한 설명은 굉장히 섬뜩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우주적인 죽음에서 나의 죽음으로 회귀하는 첫 번째 여정에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게 된다.


  이원론을 배제하려는 크리스의 입장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삶과 진화를 이야기해야 했다. 그가 진화의 여러 학설들과 연구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이런 내용이 책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의 이면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예측도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진화가 거의 정지된 상태라는 학설에서부터 미래에는 인간 vs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들, 더 나아가 외계문명이 존재할 가능성을 계산한 드레이크의 방정식 등을 통해 인간이 미래에 조우하게 될 여러 상황들, 그리고 재앙들도 언급되어 있다. "인류의 재앙 최악의 시나리오 Top. 10" 과 같은 제목으로 별로 무겁지 않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약간씩 언급되면서 죽음이 '나'의 죽음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가령, 약 75억 년 후에는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지금보다 250배 크고 2700배 밝아지는데, 이때 지구와 화성은 아예 잡아먹힌 뒤이기 때문에 크리스는 해왕성의 가장 큰 위성인 트리톤에 미리 부동산을 구입해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건 농담이다. 크리스는 다음 사실을 슬쩍 빼버렸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구와 달의 관계와는 달리 트리톤은 해왕성이 자전하는 반대 방향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해왕성의 엄청난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도 열심히 갈라지고 부서지는 중이다. 부동산을 구입해둔다고 하더라도 그 땅이 산산조각나면 누가 보상해줄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우주의 여러 모습, 특히 종말과 관련된 여러 시나리오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감정이 나 자신에 대한 철저한 속임수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겠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준비단계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미래에는 생물학적 한계가 극복되어 철학에서 말하는 H+, 즉 Transhumanism으로 마치 니체가 말한 '초인'과 비슷한 존재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영화 《가타카》는 그런 미래상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픽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기술의 성장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인체 냉동기술로 수 백 년 후에 깨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 아니라, 내가 우주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상상력이 내게 주는 안도감, 어떤 일체감 같은 것이 바로 내가 느낀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대로 세상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열심히 파헤치다보면 크리스가 그의 다른 책에서 논한 세상은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객관적으로 말이다.


  둘은 하나다. 2호선과도 같다. 물론 한 바퀴를 돌면 예전의 나는 없고 나에게서 흩어진 분자들로 구성된 미래인이 그 역에서 기차를 잡아타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서운함을 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은 거대한 순리에 대한 유머러스한 소개서와도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것은 정말 끝나는 것인가?" 이 책의 옮긴이도 책을 번역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소극적인 자세보다, 죽음의 원인과 결과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해하는 적극적인 사고를 하는 편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지 않을까.(p.414)" 옮긴이가 말한 전자의 자세는 우주가 너무 크니까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런 자세는 별 쓸모도 없고, 차라리 자세라기보다는 그냥 비관적이며 소위 '센치'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가 서문에서 한 말처럼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우주를 대하는 비관적 자세는 우리에게 제한된 시각만을 줄 것이다. 우주의 95%를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우리가 그것의 1%만 바라보려는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면 죽음은 그만큼 우리에게 좁게 느껴질 것이고, 우리는 예전처럼 그 앞에서 숨 막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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