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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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3

 

 

  얼마 전, 영화 <콘택트(Contact, 1997)>를 다시 봤다. 지금 보기에는 약간 어설픈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비약 있는 반전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감독이 관객들에게 심어주는 호기심, 그리고 자연스레 관객들이 받게 되는 질문이 더 중요한 영화이다. <콘택트>는 외계문명과의 조우를 꿈꾸는 열정적인 과학자들을 보여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는 자석처럼 이끌려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으로 돌아갔다. 극중 스파크(조디 포스터)의 아역을 맡은 지나 멀론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Could we talk to moon?”


  스파크의 질문은 목성과 토성으로 이어진다. 목성과 토성에 외계인이 살 확률은 영에 가깝다. 그러나 21세기는 어린 소녀의 질문을 더 이상 실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주과학자들은 결코 그녀를 비웃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 관측과 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과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보이저 호가 목성과 토성을 지나갔다는 사실(각각 1979년 3월 5일, 1980년 11월 12일)을 알 것이다. 스파크는 심오한 과학적 질문을 던졌다. 외계지적생명체탐사, 소위 SETI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의 내용도 미국 정부의 지원이 끊긴 SETI가 사기업들의 투자에 의존하게 된 1995년 실제 상황을 모티프로 한다.) 조만간 지구형 행성에 관한 만족스러운 데이터파일들이 축적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파크가 정말 하고자 한 질문은 이것이다.


  “Could we talk to mom?”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아버지는 아무리 큰 안테나라도 죽은 엄마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 죽은 엄마와 무선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증명된 바가 없으므로 아직까지는 “없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달, 목성, 혹은 토성의 누군가와 통신을 할 수 있다는 상상과 죽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상상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후자의 것은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다.


  과학은 ‘죽은 엄마와의 대화’를 위한 어떤 논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간혹 과학의 무능력함을 논하곤 한다. 무엇의 무능력함일까? 과학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인류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답변을 과학은 내놓지 못한다. 대신 과학은 “우주에는 공짜가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 등 생소한 결론을 잇달아 발표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답변들의 차가운 온도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곤 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과학의 전부일까? 물론 아니다. 과학도 철학적인 질문들에 답하는데 성공했다. 과학의 방식대로 달성한 성공이었다. 과학의 성공적인 답변들은 세계의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고, 앞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시작은 가장 궁극적인 탐구대상 중 하나이다. 과학은 이 질문에 답한다. 그리고 이것은 크리스 임피가 쓴 『How It Began』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기도 하다. 임피는 이 책에서 과학이 궁극의 답을 찾기 위해 어떤 힘겨운 과정을 밟아왔는가를 소개한다. 그는 복잡하고 수많은 과학적 정보들을 다루면서도 대중들이 숨 쉴 수 있는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노련한 조종사이다.


  이 책은 분명 흥미롭다. 그러나 지구에서 다중우주에 이르는 긴 여정을 감행하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질문은 만만치 않다. ‘세상의 시작’은 아직도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한 문제이다. 천재적이고 헌신적인 수많은 과학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는데도 대중들은 아직도 이 문제를 종교와 철학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다. 복잡한 데이터들과 씨름하느니, 차라리 그 편이 쉬운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스티븐 호킹, 칼 세이건, 미치오 카쿠, 빌 브라이슨(엄밀히 말해 빌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비전공인 과학을 책으로 다루기 위해 그가 한 엄청난 양의 공부는 세인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기 충분하다. 그의 책을 국내에 소개한 이덕환 교수에게 들은 건데, 빌은 과학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시중에 나온 과학책을 무려 3백여 권이나 섭렵했다고 한다. 빌을 소개하는 강의에서 이 교수는 우리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기도 했다. 대학생이란, 조금씩 맛보기로 공부하고 나서 뭔가 아는 척 하기 좋아하는 부류이니까.), 그리고 임피와 같은 대중적인 저자들의 노력은 전 세계에서 큰 환영을 받아왔다.


  임피는 어려운 과학을 대중의 곁으로 잡아당겨 내렸다. 독자들은 역으로 그 긴 실타래를 잡고 높은 곳까지 놀라가게 된다. 독자마다 ‘과학의 고산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고도는 다를 것이나, 장담하건대 나처럼 교양으로, 혹은 초보적인 호기심으로 과학책을 들춰보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 쯤 고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임피는 과학의 위대함이 아니라 과학의 겸손함을 소개하는데 더 주력한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우주과학에 대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알아가게 되면서 독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주과학이 비춰주는 놀라운 세계로부터 생경함, 두려움, 경외감 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세기동안 우주과학은 많은 것들을 밝혀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훨씬 많은 것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리학과 수학이 우주의 공통분모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주는 지극히 낯설다. 우리가 시를 쓰기 위해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과학자들에게 낯섦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매일 익숙한 성운과 별자리를 반복적으로 관측하지만 늘 새로운 데이터들과 마주한다.


  “자연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현상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데이터를 수집하게 되었을 때, 과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므로 상당히 당혹스러워한다. 그 중에는 애써 부인하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학의 힘은 데이터가 정직하고 정확하게 수집된 것이라면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결론을 뽑아내는 것에 있다. 낯선 것에 대한 도전적인 접근이다. 이러한 과학의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과학자들은 냉혈안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데이터들과 엉켜 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베라 루빈의 술회이다.


  “우리는 유치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일 뿐이다.”


  겸손함의 대명사인, 이와 비슷한 뉴턴의 명언(“나는 진리의 큰 바다를 앞에 둔 바닷가에서 한 개의 조개를 주운 것에 불과하다.”)을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루빈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이라 했지만 사실 인류의 우주과학기술과 그간의 연구 성과는 그야말로 ‘초고속 압축 성장’을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성장속도는 훨씬 빠를 수 있었으나, 늘 예산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성장을 보고 또 한 번 오해를 하게 된다. 지구를 세상의 중심이라 굳게 믿었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혹시 우리가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요컨대 ‘주인’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나 임피는 우리가 ‘우주의 주인’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저 ‘충분히 똑똑한 존재’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보이저1호에 있는 금속판에는 임피가 말한 겸손함이 인사말로 새겨져 있다. 금속판의 함의는 우리 이외의 지적문명에 대한 존경이다.)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도 나 역시 어떤 낯선 책을 접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해야 옳다. 책이 낯설다는 것은 평소 생각하지 않는 주제가 실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많은 정보들이 실려 있어 일반적인 의미를 도출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과학책은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할 수 있다. 이는 과학책의 저자라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위험이다.


  다행히도 노련한 임피는 위험을 현명하게 피해갔다. 낯섦의 충격을 익숙한 비유들로 상쇄시켰고, 독자들이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아예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게 되었다. 조금 에둘러본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의미들 중에 가장 비근하게 논의되는 건 아무래도 종교와의 관계일 것이다. 나는 진화론을 읽었다. 다윈의 원서를 읽진 못했으나 최재천과 리처드 도킨스라는 훌륭한 저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화론에 발은 담가봤다.”는 - 말 그대로 - ‘거드름’ 피울 정도는 된다. 매트 리들리도 읽었는데 그는 DNA에 관한 세계적인 저자이다. 결국 나는 영아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나의 과거와 단절된 채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신론은 과학의 영향과는 무관한 또 하나의 ‘믿음’인 경우가 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과학(지상)주의’라고 부르는데, ‘주의(ism)’라는 단어만 봐도 알겠지만 이건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공정함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본인이 과학과 종교가 앉은 거대한 시소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두 세계가 지닌 가치를 한 번씩 곱씹어봐야 한다. 진화론과 우주과학을 읽고, 그와 동시에 성경, 쿠란, 우피나샤드, 불경 등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모두에서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하다보면 궁극에 대한 인간의 지고지순한 탐구 욕망, 그것 하나를 공통적으로 도출하게 된다.


  이 확실한 욕망은 인간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이 던진 질문은 우주의 끝, 혹은 신의 근처까지 먼 여행을 하고 휘어져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류의 역사는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매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피드백을 받는, 의외로 단순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패턴이 바로 과학과 종교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답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답이 의미하는 욕망은 여전히 하나이다. 이 패턴들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패턴을 유지하도록 하는 ‘욕망’이 중요한 것이다.


  과학책과 종교 경전을 나란히 놓고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임피가 이 책의 마지막에 남겨둔 멋진 메시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우주가 영원하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 (중략) 부처님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도 말했다. 오늘 진리인 것이 내일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임피는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쫓는 과학의 놀라운 역사를 소개하면서도 그 마지막에 가서는 불가피한 불확실성을 토로한다. 겸손은 이렇듯 ‘역전’을 동반한다. 한껏 흥겹게 그간의 지식들을 풀어놓고 난 독자가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고 했을 때 독자들이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 그것은 종교를 대할 때, 우리가 신의 앞에 자신을 세웠을 때에 느끼는 무한한 겸손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과학책과 종교 경전은 읽는 이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고개 숙인 순간부터 우리는 욕망을 직시한다. 우주의 끝으로, 혹은 신에게로. 임피가 책의 말미에 불교와의 에피소드를 실은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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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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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9

 

 

 

  우리는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에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 배운다. 지정학은 국가의 전략으로 활용되는 학문이다. 지정학에 따르면 한 나라의 위치는 단순한 지리가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군사학의 일환으로 봐도 무관한 것이, 지정학자들은 한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될 국가전략의 수립에 있어 그 나라가 과연 어느 위치에 포진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옛 칭기즈칸이 서진(西進)할 때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상비군을 배치시킨 것을 본 따 소련은 무려 10년(1979~1989) 동안 11만 명에 이르는 군사를 투입할 정도의 공을 들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었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역사는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꽤 친근한 스토리이다. 아마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통해 많은 이들이 두 나라의 역사를 읽었을 것이다.


  이 학문의 여파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계역사의 흐름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지리적 요충지라든가 소위 ‘노른자 땅’이라 불리는 곳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손길이 닿을 수밖에 없고, 그곳에서의 복잡한 역사가 변덕스럽게 흘러갔다는 막연한 이해도 기대할 수 있다. 지정학 못지않게 문화적 관점도 매력적이다. 유교 문화권과 불교 문화권, 그리스도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그리고 정교 문화권 등 다양한 종교들의 분포로도 역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학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총, 균, 쇠』는 우리나라 주요대학들의 필독 도서이고, 『문명의 붕괴』는 환경문제와 그 이외의 네 가지 원인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리뷰에 앞서 그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나마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우선 그들이 거주하는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로 붕괴했다. 적어도 환경파괴는 문명의 멸망에 관해서는 필수조건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도 이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SF영화들의 단골 시나리오 중 하나도 어떤 외계행성의 문명이 환경파괴로 인해 터전을 잃게 되자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우주공간을 떠돌아다니며 다른 행성의 문명을 숙주처럼 이용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네 가지 원인은 기후변화, 적대적 이웃, 우호적 이웃과의 단절, 주민의 반응이다. 다이아몬드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미래의 비극을 예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로빈슨(James A. Robinson)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 Why Nations Fail)』는 세계역사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를 전복시킬 만한 주장을 담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것과도 다르다. 각각 경제와 정치를 연구하는 두 학자는 국가의 존망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는데, 그건 바로 ‘제도(institution)’이다.


  나는 얼마 전 안데스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시리즈 중 하나는 당연히 잉카 문명을, 특히 잉카의 멸망을 소재로 구성되었다.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잉카의 멸망은 유럽 열강들의 남미 정복으로 이어졌고, 식민지화는 오늘날 남미의 현실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얼핏 보면 아따왈빠(Atahuallpa) 왕이 죽은 1533년 8월 29일과 지금 페루인들이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가난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관련이 ‘매우’ 있다.


  우리에게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관련성을 잘 짚어낸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오프닝 장면으로 가난한 페루의 아이들을 보여줬다. 페루의 한 마을에 기차가 정차했다. 그 위에는 유럽 관광객들이 올라타 있다. 아이들은 그 근방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파란 눈의 외지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눈치이다. 관광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던져줬고, 아이들은 기차가 막 달리기 시작한 후에도 미련을 따라 기차 꽁무니를 쫓았다. 아이들의 입과 호주머니에는 사탕이 들어 있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몇 가지의 개념들로 이뤄진 하나의 견고한 관점을 통해 세계의 거의 모든 역사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두 학자는 이 책의 1장과 3장에 자신들이 앞으로 설명할 관점의 대표적인 예를 실었는데, 학설 비교에 해당하는 2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사실 자세한 사례 열거에 해당한다.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으므로, 혹 관심은 있으나 시간이 부족한 바쁜 독자라면 적어도 1장과 3장은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의 주장은 이렇게 구성된다. 우선 두 학자는 정치제도가 경제제도를 결정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3장에도 나와 있는 예인데, 남북한의 빈부 차이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북한은 착취적 제도이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15~16세기 콩고 왕국의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가난’이라든지, 17세기 초반의 바베이도스와 같은 경우에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북한은 이걸 조장한다. 정치제도가 그렇기 때문에 경제 역시 착취적(extractive) 경제제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오늘날 포용적(inclusive) 경제제도를 갖고 있다. 다원주의와 중앙집권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옛 사회의 엘리트층들이 두려워했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일어났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자유경쟁을 독려하는 인센티브가 북한에 비해 훨씬 잘 갖춰졌다. 물론 박정희 정권을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도 착취적 경제제도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독재의 시대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산업화와 빠른 민주화를 동시에 일정부분 달성할 수 있었다. 북한은 정치제도로 인해 애당초 이러한 발전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 상태이다.


  두 학자는 잉글랜드와 미국, 그리고 프랑스로 대변되는 포용적 제도의 선진국들이 왜 선진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추적해간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1장에 언급된 남미와 북미의 식민지 진행과정이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북미에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 전략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없었다. 반면, 에스파냐는 오늘날의 남미를 지독한 가난에 빠뜨린 오래된 족쇄들, 예컨대 엔코미엔다, 미타, 레파르티미엔토 데 메르칸시아스, 트라진, 그리고 인두세 같은 살인적인 정책들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는 독점화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었고, 당연히 일할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러한 ‘닫힌사회’에서는 와트나 에디슨이 나올 수 없다.


  유럽의 역사가 갈림길에 섰던 여러 역사적 상황들이 있다. 그 중 로마의 멸망과 흑사병 창궐은 시대를 구분(고대/중세, 중세/근대)하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국가나 집단들은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에는 우발성 역시 있다.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상황 속에서 꾸준한 성장을 하는 국가들은 결과적으로 두 학자의 진단처럼 ‘열린사회’를 지향한 국가들이었다. 동유럽은 영주들의 사유지 규모가 서유럽보다 훨씬 컸고, 인센티브로 노동력을 예속시킬 만한 경제적 부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무려 18세기까지 농노제(serfdom)가 존재했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흑사병 창궐 이후 농노들이 계약을 요구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더니, 1688년에는 세계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보장하는 명예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독점은 철폐되고, 사유재산은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생겼으며, 산업과 인프라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결정적인 정치제도 상 차이는 강력한 의회의 유무였다. 에스파냐에도 ‘코르테스’가 있었으나, 그들은 왕의 권력 독점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왕을 견제하기에 충분했다. 의회는 왕을 견제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누구라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포용과 착취. 이 두꺼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제목에 두 학자는 “착취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진단과 관점이 별로 낯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2~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마저 착취적 제도로 성장하는 한 국가의 놀라운 신화를 목격했다. 바로 소련이다. 소련은 낙후된 공업에 소위 ‘올인’하기 위해 집산화(collectivization)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집산화를 통해 그들은 1928년부터 1960년까지 연간소득이 꾸준히 6%씩 증가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룩한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소련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의 실패는 ‘제한적 성장’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실패한 나라들의 대부분은 한 때 영광을 누리던 나라들이었다. 로마와 베네치아가 그렇다. 이슬람 문화권의 위대한 제국들도 그러하고, 중국의 역대 왕조들 역시 그렇다. 아프리카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거대한 왕국들, 예컨대 콩고의 쿠바 왕국이나 악숨 왕국 같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화려했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독재와 노예제 때문이다. 설령 이런 형태의 나라가 지금 존속하는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선진국 반열에 드는 경우는 없다. 발달을 가로막는 장벽은 엘리트층의 두려움이다. 오스만 제국은 반란을 두려워해서 인쇄를 금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백성들이 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철도건설을 막았다. 그곳에서는 산업혁명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한 서유럽의 강대국들은 17~19세기에 걸친 식민지 경쟁을 위해 ‘닫힌사회’를 이용했다. 네덜란드는 1621년 동남아 반다 제도에 착취적 경제제도를 심으려는 목적으로 원주민 15,000명을 학살하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향신료를 생산할 수 있는 적당한 노예들만 남겨놓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동남아의 이웃 국가들은 일제히 특산품 생산을 중단했다. 네덜란드와 같은 열강들이 쳐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장은 없었다.


  노예제를 따라한 것은 아프리카의 왕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윤리 관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저 왕들은 자국민들을 너무 많이 노예로 팔아버린 탓에 다른 왕국을 침략해 그 포로들로 노예 사업을 추진했다. 노예제는 노예들의 해방 영토인 라이베리아에서도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유명한 옛 남아공 정부는 의도적으로 원주민들만 모아놓은 자치지구를 낙후시켜 저임금 노동력을 빼 쓰는 방법으로 21세기 바로 직전까지 악행을 일삼았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선진국들이 역사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오랜 시간 투쟁해서 ‘열린사회’를 구축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열린사회’는 식민지 인력과 자원들의 막대한 희생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큰 편차를 보인다. 영국, 프랑스,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처럼 포용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갖춘 선진국들은 선순환의 절차 속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간다. 한 번 개방된 사회가 폐쇄되는 역사적 사례들도 이 책에 소개된 것처럼 많으나, 유혈(流血)을 통해 얻은 가치를 이 나라의 후손들은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착취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창조적 파괴’를 원하면서도 연합세력을 결성하기 힘들다는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투명한 미래전망으로 인한 무기력증 때문에 21세기의 한복판에서 고립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악순환이 된다. 암울한 것은, 영국의 경우에는 수 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한 까닭에 엘리트층의 완고함이 조금씩 풀렸지만 가난한 저들은 급진적 방법을 택해 사회 구성원 전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중동은 민주화 바람이 한창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집트의 경우처럼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우연인 것처럼도 보인다. 역사는 방대하며,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흐른다. 두 학자도 이를 분명히 한다. 그들의 이론에 역사의 우발성이 포함되어 있는 까닭은 역사 자체가 때론 우연하기 때문이다. 로마가 멸망했을 때, 당시 ‘촌동네’에 지나지 않았던 잉글랜드에서 17세기의 명예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무적함대 아르마다와 부딪히던 그 날, 잉글랜드 사람들 중 그들이 훗날 대서양 무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 이가 있었을까. 에스파냐의 콧대 높은 군주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창녀’라 비하했고,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에게 제대로 쓴맛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해전에서 철저한 승리를 거둔 건 잉글랜드이다. 바로 그런 일들이 역사에서는 종종 여러 이유들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연한 사건들을 하나로 꿰고 지나가는 것이 바로 두 학자의 이론이다. 착취적 제도는 장기간 존속할 수가 없다. 외부에서 그들을 붕괴시키든지, 아니면 내부에서 어떤 폭발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는 열리고 있고, 우리는 열린 곳으로 나아가길 권유받는다. 리프킨이나 노르베리-호지 등 유명한 석학들이 세계화에 반대하며 지역사회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흐름은 비가역적인 듯하다.


  두 학자는 이 이론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포용’과 ‘착취’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지난 역사를 훑고 지나오며 내린 결론처럼, 우리는 미래 역시 그렇게 진행될 것이라 예측해볼 수 있다. 또한 앞선 실패의 사례들, 그리고 오늘날 낙후된 국가들의 고통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를 보다 선명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이 지적하진 않았으나, 사실 ‘열린사회’에도 ‘닫힌사회’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포용적인 우리나라 사회의 어느 구석에는 착취적 제도들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마땅한 인센티브도 없이 거의 반(半)강제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와 이전 세대가 투쟁하여 얻은 권리를,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얻은 것들은 잘 보이지 않으니, 우리도 아전인수격으로 일종의 ‘엘리트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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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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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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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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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5

 

 

  서재에 여러 철학책들이 꽂혀 있다. 나는 그것들 중 대부분을 완독하지 못했다. 읽지 못한 책들의 대부분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계륵과도 같아 차마 버리지는 못한다. 하루는 그것들에게 막연한 동경과 독서의 의무감을 느끼지만 다음 날이면 으레 그렇듯 잊어버리곤 한다. 철학은 내게 그런 존재이다. 늘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싶으나 실제 그렇진 않으며, 한편으로는 그 드문드문 찾아오는 객인이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것은 전체인 것도 같고, 부분인 것도 같다.


  마켓에 가면 소위 ‘지름신’ 내리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책을 앞에 두거나 생각을 글로 옮기려고 할 때마다 ‘철학신’이라는 것이 내린다. 물론 이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기 몇 줄에 하루의 무게를 옮겨놓고자 키보드를 누르는 순간, 혹은 펜으로 백지 위에 첫 획을 긋는 순간 우리는 복잡한 현상 속에서 어떤 정돈된 의미를 뽑아내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처럼 철학의 자세, 즉 스탠스(stance)는 철학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달리 적극적이다. 철학은 혼돈 속에 뛰어들 각오가 된 전사의 무기이다. 다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궁극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 마음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철학이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까닭은 본래 뜨거운 사람들의 위대한 구상들로 건축된 ‘꺼지지 않는 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철학적 질문과 ‘철학하기’라는 행동이 한 가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카이로스’이다. 철학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 있는, 진공 속의 ‘나만의 시간’을 허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으로부터 우리는 무한에 대하여, 환상에 대하여, 영원과 신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끝없는 사유를 허락받는다. 이것은 막강한 권한이다. ‘생각하는 나’와 ‘실존하는 나’가 일치하는 순간은 오로지 철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때문에 그럴까. ‘일상’은 철학과 너무 동떨어진 단어인 양 여겨져 오고 있다. 일상은 ‘카이로스’가 되기 힘들다. 회사원은 회사원대로의, 대학생은 대학생대로의, 주부는 주부대로의 일상이 있고, 그것은 삶의 대부분을 잠식하기에 충분한 위력과 설득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저들을 반대로 설득하기 위해서 철학은 일상 이상의 감동을 줘야만 한다. 돈, 성공, 유흥 등이 줄 수 없는 단 하나의 감동. 그것은 반드시 효과적이어야만 한다.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묵직한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두꺼운 철학책들의 틈새에서 철학의 효과를 찾아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할 일이 있다. 두꺼운 철학책들의 난해한 문구가 아니라, ‘철학하기’라는 실천을 통해서라면, 분명 철학은 우리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뛰어가는 우리에게 잠시 손을 내밀어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라고 말을 거는 일부터 시작해서, 저 위대한 철학의 아포리아들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 하나의 문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바로 ‘읽는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권유하는 철학이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위력이며, 기술사회의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철학을 갈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Stop!”이 적혀 있는 대중적인 철학책들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나는 성공을 위한 가이드북들보다는 이런 종류의 가볍지만 진중한 철학책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실존’이다. 그것은 존재의 전체이다. 이것이 잘 다져진 건물은 성공하지 못해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토대부터 차근차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철학이 제시하는 건축도안을 참조할 필요가 있는데, 세부적인 청사진과 롤모델은 제각각 다를지 몰라도 건축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대중적인 철학자 로제-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에는 앞서 말한 세부적 청사진과 롤모델들이 무려 101가지나 나와 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독자라면 책을 꼼꼼히 읽어본 후 101가지나 되는 곁가지들이 실은 몇 안 되는 굵은 가지들로부터 뻗어 나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들 중 몇 개를 질문으로 거칠게 열거해보면 이렇다.


  “는 누구인가?” (이것이 확장되면 “우주(세상)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드르와의 책에는 ‘나’라는 존재의 실존적 체험에 관한 방법들이 가장 많이 소개되어 있다. 책의 중추를 구성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나’이다.)
  “순간영원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낯섦익숙함은 무엇인가?” (이것은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진짜가짜는 무엇인가?”
  “배회란 무엇인가?” (우리를 ‘유동적 존재’로 만들어보는 질문이다.)
  “경계란 무엇인가?”


  드르와가 위의 질문들을 직접 던져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권유할 뿐이다. 철학은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질문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질문에 다가가는 모습도 있다. 드르와가 권유하는 행동은 소요시간, 도구, 공간 등이 의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카이로스로 잠시 이탈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렵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카이로스를 통한 철학을 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러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의 보호 없이 야생에 던져진 유아와 같은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적으로 던져진 존재 말이다. 그러나 드르와가 제시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할 수 있는 것인데 하지 않았고, 그것을 하면 우리가 원하는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드르와의 권유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애당초 이 책은 씁쓸한 실패를 맛봤을 것이다.


  제시된 방법들은 대체로 ‘나’라는 실존에 집중한 상태에서 주변을 낯설게 만들거나, ‘나’의 옛 기억들을 구성하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해체하거나 ‘나’ 이외의 것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사유가 우주적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허탈함과 충격을 의도적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나’에게 스스로 칼을 가져다댔다가 나중에는 상처를 스스로 위무(慰撫)하는 것이, 아마 이상하고도 쓸데없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철학의 스탠스가 매우 적극적이라고 했었는데, 다시 한 번 그 말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철학은 심지어 이런 사디즘적이며 변태적인 권유도 한다.


  “물의 무게 속에 당신 전체를 압축해 집어넣어보라. 오직 이 느낌에만 집중하라.”


  그러나 이 아픔 뒤에는, 고통의 순간 뒤에는 평온함이 찾아오게 된다. 물속에 들어가 하나도 빠짐없이 눌려버리고 터져버린 건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근심이다. 근심은 생각인 주제에 우리의 몸을 곯아버리게 만든다. 따라서 철학은 생각을 어루만져 근심을 녹여버리고, 몸을 제 그대로 멀쩡하게 회생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철학은, 미드 애청자들이 시신을 검식하는 CSI의 배우들을 보고 열광할 때에 우리의 시선을 작은 새의 시체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라는 삶의 가치를 찾아내게 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드르와에게서 동양철학의 향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실제 동양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동양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불교나 노장(老莊)사상 등이 그러하듯 관점의 차이를 역설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만물이 손등과 손바닥 차이라고 주장하고, 장자는 광인(狂人)들을 사례로 들며 이 정상적인 세상을 순식간에 미친 세상으로 바꿔버린다. 철학자의 힘은 여기에 있다. 손을 뒤집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아기도 한다. 그러나 그 행동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혹은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쉬운 일도 목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귀여운 이 책의 표지에는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체험”이라는 문구가 있다. 나는 국문학도인 탓에 이런 문구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형식주의를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저 문구는 문학사적으로나 철학사적으로나 늘 특별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만약 드르와의 권유대로 여러 번의 체험을 통해 우리가 반대편의 세상을 일상의 곁으로 끌어당길 수만 있다면 그 이후의 일상은 분명 놀라울 만큼 변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변할 것이고,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알 수 없다.


  드르와는 이러한 무거운 주제의 대화들을 ‘심심풀이 책’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해버린다. 얼마나 우습고, 또 우스운가. 그동안 삶에 대해 쩔쩔매던 우리들의 모습은. 드르와의 ‘심심풀이 책’은 우리의 삶을 기차여행으로 만들고, 철학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격하시킨다. 바로 이 격하로부터 우리는 철학의 힘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며,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렇다. 삶의 척추가 다시 기립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철학을 제외한 채로 걸어 다닐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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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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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3: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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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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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0

 

 

  첫째,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둘째, 착했다가 나빠지는 사람도 있고, 나빴다가 착해지는 사람도 있다.
  셋째, 그러나 착하고 동시에 나쁜 사람은 없다.

 

  동화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세상은 이렇다. 아이들은 “착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끌려가?” 아이가 물었다.
  “죄를 지어서 그래. 나쁜 짓을 했거든.”


  그런데 TV 채널을 돌리던 아이는 방금까지만 해도 경찰들의 인도를 받으며 후송 차량에 올라탔던 사람이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 열심히 춤을 추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모습을 봤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아이가 말했다.

 

  “어? 엄마, 아까 잘못한 아저씨가 춤추고 있어.”


  어머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건 나쁜 짓을 하기 전이야.” 정도로 손쉽게 둘러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겨우 그 정도의 대답을 듣고자 질문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그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동화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 착했던 시절에 동시에 나쁜 짓을 해서, 겉보기에는 “착했다가 나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


  아이는 부모가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혼란을 마주하고 아주 간단한 질문들을 던지며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착했던 사람이 나쁜 짓을 했었을까. 세상에는 착하고 동시에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착하지만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아이의 질문이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님을 나는 평생 상기하며 살 것이라 감히 다짐해본다. 어른이란 ‘착하지만 나쁜 것’에 대해 이미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자신한다. 또한 대부분이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우리가 어떨 때에는 착하고, 또 어떨 때에는 나빠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는 것이지.”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들은 불안한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서도 실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속설에 따르자면 여자는 그 믿음으로 아이를 키우고, 남자는 그것으로 아집을 키운다지.


  도덕의 문제는 끝나는 법이 없다. “착하지만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원제 : Il Visconte Dimezzato)』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우리의 대부분이 아노미의 대양 위에서 여유롭게 인생을 즐길 때, 저 이탈리아의 작가는 17세기의 한 전쟁터에서 메다르도 자작을 두 동강냈다.


  소설은 짧고 아주 단순하며,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동시에 환상적인 그로테스크들이 수놓인 기괴한 직물과 같다. 칼비노는 착한 메다르도와 사악한 메다르도를 만들기 위해 그를 전쟁터로 데려가 (별 위엄 없는 황제로부터 ‘중위’로 임명받게 한 뒤) 투르크인들의 대포 앞까지, 그 코앞까지 끌고 갔다. 메다르도는 그곳에서 정확히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둘 모두 살아남았다. 사악한 메다르도는 들것에 실려가 막사의 의사들로부터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시체더미들 사이에 깔려 있었던 착한 메다르도는 두 무명의 수행자가 향료와 연고로 살려냈다.


  칼비오가 먼저 영지로 돌려보낸 건 사악한 메다르도였다. 그는 무슨 짓을 했을까. 아버지 아이폴로 자작에게 큰 실망과 허탈함을 안겨줘 결국 죽음으로 몰아갔고, 여러 죄목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죽였으며, 방화를 일삼았다. 양어머니이자 유모인 세바스티아나에게 화상을 입혀 마치 문둥병인 것처럼 보이게 한 뒤 그녀를 내쫓는 장면은 악행의 압권이다. 메다르도 자작 때문에 마을은 긴장했고, 장인(匠人) 피에트로키오도는 고문 기구를 만들며 번뇌했다.


  “페스트와 기근”을 외치고 다니는 위그노교도 에제키엘레와 그의 무리들이 “왼쪽 병신”이라 부른 사악한 메다르도 말고, 착한 메다르도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가 실은 이중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나 톨킨의 ‘골룸’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가 친구라 여겼던 늙은 (무늬만) 의사 트렐로니는 우연한 기회이 두 메다르도가 모두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 착한 메다르도를 발견한 사람은 사실 ‘나’였다. ‘나’는 자신이 본 자직의 손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임을 기억해냈으나 도무지 정리를 하지 못했다.)


  한 명의 메다르도가 한 일은 정확히 갈라진 몸처럼 도덕적으로도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착한 메다르도가 의사 트렐로니에게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달라는 신호로 손수건, 달팽이, 닭들의 하얀 똥을 놓아두면 사악한 메다르도가 그것을 모두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비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메다르도의 선악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메다르도가 죄를 씌워 죽인 이들의 시체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계속 지켜보길 원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곧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광경을 발견했다. 우리들의 판단력도 여러 감정들로 잘게 부서져 그 시체들을 떼어 내거나 그 커다란 기계가 분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33쪽)


  위그노교도들, 그 중 특히 에제키엘레의 아들인 에사우의 행동은 종교윤리가 제시하는 선악의 개념은커녕 의례조차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오로지 그들만 잘 살면 된다는 안이한 의식이 어떻게 행동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착한 자작이 노새를 타고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에제키엘레는 도덕적으로 살라고 조언하는 자작을 지겨워한다. 그리고 에사우는 사기를 친다.


  “에사우는 노새에게 가서 여물통을 빼앗고 노새를 발로 차서 노새는 조금씩 절뚝거리며 걸어야만 했다. 그는 여물을 원래 있던 데로 갖다 놓으려고 나머지를 숨겨 버렸다. 그들은 여물을 자기들 가격대로 팔 생각이었다. 그리고 착한 반쪽에게는 노새가 벌써 여물을 다 먹어 버렸다고 말했다.(101쪽)


  사악한 메다르도의 명령에 따라 고문 기구를 만들던 피에트로키오도의 혼잣말은 선악의 문제가 비단 메다르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혹시 내 영혼에 사악함이 있기 때문에 잔인한 기계밖에 만들 수 없는 게 아닐까?(103쪽)


  칼비노는 이렇게 독자들을 ‘악함’으로 잠시 끌고 간다. 문둥병 환자들이 방탕하게 살던 곳으로 쫓겨난 세바스티아나는 착한 메다르도가 매일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잔소리를 하면서 ‘비인간적인 선함’이 사람들을 충분히 질리게 하거나, 혹 선한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악한 반쪽보다 착한 반쪽이 더 나빠. (중략) 대포 포탄이 그를 두 쪼가리로 만든 게 천만 다행이지 뭐야. 자작이 만약 세 조각이 났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겪었을지 알게 뭐람.(109쪽)


  우리는 세 조각이 아니라, 수 천 조각, 아니 수 만 조각으로 나눠진 존재이진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너무 복잡하니,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아잇적의 간단한 이분법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경험이 축적되는 일은 우리가 이전의 생각보다 훨씬 잘게 쪼개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는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른 까닭에 나는 칼비노가 파멜라와의 결혼을 빌미로 두 자작, 아니 메다르도 자작이 자신과 결투를 하도록 했을 때, 결국 자작을 네 등분으로 잘라버려 우리를 더 깊은 혼란로 내던져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칼비노는 놀랍게도 둘을 다시 붙여버렸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선상(船上)의사 트렐로니의 기술은 녹슬지 않았고, 트렐로니는 피범벅이 된 메다르도 자작의 반쪼가리들을 붙여 정맥과 살과 내장을 꿰매고 무려 1km나 되는 붕대로 감아 결국 자작을 살려냈다. 자작은 이전의 형체를 되찾았다. 그러나 ‘분리’의 경험을 가진 그였다. 칼비노는 전쟁터에서 메다르도를 두 동강냈지만 결국 그를 다시 붙였다. 1+1이 2가 아닌 2 이상의 숫자로 비약되는 즐겁고도 유쾌한 상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작은 1+1이 그대로 1로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칼비노는 장자(莊子)적 질문도 가능하게 만든다.


  “한 때 나는 착했고, 또한 한 때 나는 사악했으니, 나는 착한가, 아니면 사악한가?”


  칼비노는 말한다. 착하고 사악한 것이 온전한 사람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현명해질 수 없으며, 자작처럼 올바른 통치를 할 수도 없다. 나는 이 간단한 메시지 하나를 손에 쥔 채 방문을 잠그고 남몰래 나의 선함과 나의 사악함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늙은 의사 트렐로니에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의무와 도깨비불만 가득한” 세상에 남아 ‘인간’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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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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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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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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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

 

 

  역사적 사건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준다. 에릭 블레어(Eric Blair), 아니 필명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1937년에 이르는 유럽의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오웰의 짧은 글을 읽어보면, 그가 왜 굳이 소설 속에 저널리즘의 뉘앙스를 심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그는 글을 쓰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행동파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1903년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마흔일곱 해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미켈란젤로만큼만 오래 살았으면 그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동물농장』에는 무너져 가는 전체주의의 결말이 실려 있다. 이를 두고 ‘예언자적 작품’이라고 하던가.  사실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 Why Nations Fail)』을 쓴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 등 경제학 분야에서 역사를 분석하는 석학들에 따르면 소련은 착취적 경제제도 때문에, 중공업으로 전환한 후 이룩한 놀라운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얼마 못 가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붕괴가 문학적으로 ‘예견’될 때에, 독자들은 역사에 한층 고양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듯하다.


  『동물농장』은 그로테스크한 우화이다. 동물들 중 그나마 똑똑한 돼지들이 동물들을 선동해서 농장주인 존즈를 몰아내는 것까지는 제법 그럴싸한 우화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90년대 영화, 가령 『꼬마돼지 베이브(BABE)』나 『베토벤(Beethoven)』등의 아기자기한 매력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영화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동물농장』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동물들의 행동은 놀라울 만치 사람처럼 ‘진화’한다. 글을 읽고, 현판을 쓰고, 곡식을 분배하며, 풍차를 세운다. 그 중에는 사람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부류와 애당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은 부류 - 나폴레옹이 특별히 양육한 개와 돼지들 - 가 있어 그들은 결국 ‘진화’에 성공하는 부류의 통치를 받게 된다.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은 “설마 존즈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것은 아닐 거고?”라는 질문으로 몰아붙이면서 부인했겠지만, 동물농장에는 마침내 전체주의에서 볼 수 있는 ‘계급’이 생긴다.


  소설이 길지 않은 만큼 오웰은 사건과의 냉소적 거리를 유지한 채 독자들을 거침없이 ‘동물농장의 파국’으로 끌고 간다. 사건들이 - 인간의 것과 매우 닮았다는 점에서 - 충격을 주고, 오웰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시점은 동물농장 안에만 머물러 있어 복서가 결국 도살을 당했는지, 스노볼이 정말로 프레데릭의 농장과 필킹턴의 농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인지, 독자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폴레옹이 어떤 돼지 - 사람의 탈을 쓴 돼지 - 인지 알아차린 후부터는 모든 것이 의심된다. 동물들이 당하는 비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계명이 바뀌고, 자백과 처형으로 수많은 동물들이 도살되고, 암탉들의 시위가 수포로 돌아가고, 상처뿐인 승리에 허황된 의미를 갖다 붙이는 스퀼러의 논변에 동물들은 속아 넘어간다. 다 알지만 그것을 말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하나 같이 늙은 당나귀 벤자민이 되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퀼러가 길다란 두루마리 통계 숫자 목록을 펴놓고 그간 농장의 각종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500퍼센트씩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퀼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때가 자주 있었다.”


  『동물농장』은 당대를 고려하면 현실과 1대1의 대응이 가능한 우화이다. 가령, 나폴레옹과 그의 정책을 의심하는 동물들에게 나폴레옹을 찬양할 만한 소식을 전해주는 꼴사나운 스퀼러 같은 경우에는 공산당 시절의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 - 지금도 국영 일간신문으로 있으나, 성격은 다르다 - 라 할 수 있고, 나폴레옹은 스탈린, 그로부터 쫓겨나고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여겨진 돼지 스노볼은 트로츠키일 것이다. 스탈린으로부터 쫓겨나 1940년 결국 멕시코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는 유럽의 각 나라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단독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의견인데, 스노볼도 트로츠키처럼 일종의 연합을 주장했다. 인간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장에도 비둘기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건들도 현실과 대응된다. 스탈린 정권이 1930년부터 무려 9년 간 진행했던 대숙청도 나폴레옹의 회의 폐지에 반대했던 돼지 네 마리, 달걀 사건을 주도한 암탉 네 마리, 옥수수 이삭 여섯 개를 먹은 거위 한 마리, 나폴레옹을 따르던 늙은 양 한 마리를 죽인 양 두 마리, 먹는 물웅덩이에 오줌을 싼 양 한 마리가 즉석에서 도살당한 이야기와 유사하다. 동물들의 반란을 이끌어내고, 나폴레옹의 독재 이전까지 회의의 마지막을 늘 장식했던 노래 ‘잉글랜드의 짐승들’은 “잉글랜드의 짐승들이여, 아일랜드의 짐승들이여, 온 세계 방방곡곡의 짐승들이여”로 그 대상이 확장된다는 점에서 코민테른을 닮았다. 이 노래는 나폴레옹이 폐지하는데, 스탈린도 대숙청을 통해 결국 1943년에 제 3 인터네셔널을 강제적으로 해산시켰다.


  나폴레옹이 어떤 방식으로 동물들을 기만하는지를 보면 오웰이 대중들의 ‘앎’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주도로 동물농장에는 ‘동물주의’의 원리를 축약한 일곱 계명이 새겨진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No animal shall wear clothes.)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그러나 계명은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의 편의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는데, 결국 동물들은 스퀼러가 어느 날 자정 무렵 계명의 현판을 페인트로 고쳐 쓰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문을 몰랐고, 오로지 진실을 아는 이는 늙은 당나귀 벤자민 뿐이었다. 인간들과는 절대 거래하지 않겠다고 내렸던 결정이 번복되는 장면에서는 스퀼러가 동물들에게 다가와 이렇게 설득한다. 아니, 거의 협박에 가깝다.


  “동무들, 그거 혹시 동무들이 잠결에 꾼 꿈 같은 거 아니오? 아니라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소? 동무는 그 결의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소? 그런 기록이 있소?”


  계명도 이런 식으로 동물들의 ‘무지’를 이용해 고쳐졌다. 나폴레옹이 존즈의 본채에 들어가 침대에서 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제 4계명에는 “시트를 깔고”가 추가(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with sheets)되고, 대숙청 이후 제 6계명에는 “이유 없이”가 추가(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without cause)된다. 나폴레옹이 양조법과 알코올 증류법에 관한 책들을 사오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제 5계명에는 “너무 지나치게”가 추가(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to excess)된다. 그러나 최후의 사기는 이보다 궁극적이다. 그것은 오웰의 이상을 배반한 전체주의의 대사기, ‘평등’을 가장한 독재의 사기이다. 제 7계명은 이렇게 바뀌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의식을 분명하게 밝혔다.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책은 생명력이 없는 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그는 『동물농장』을 통해 당대의 ‘거짓말’을 드러내기 위해 ‘우화(fable)’라는 오래된 문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독자들이 무엇에 대한 우화인지 모르고 읽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 혹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동물농장』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오웰의 『동물농장』이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 까닭은 그가 밝혀내고자 한 ‘거짓말’이 비단 스탈린의 전체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들, 특히 나폴레옹이 본채에서 지내길 선호한 독재의 시대부터는 주로 스퀼러를 통해 언급되던 ‘거짓말’들은 독자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중들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웰은 ‘문맹(文盲)’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 하지만 결코 극단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문맹률은 무려 90%를 넘었기 때문이다 - 장애를 설정했지만 “읽지 못한다.”라는 것이 꼭 독해에 관한 비유로만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현실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 혹은 그럴 의지조차 없는 안이한 대중들에 관한 따끔한 비유라고도 할 만하다.


  “선전선동은 타인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죄의식을 느낄 이유가 많을수록 선전선동은 더 격렬해진다.”


  『맹신자들(원제 : The True Believer)』을 쓴 에릭 호퍼의 말이다. 볼셰비키, 파시스트, 나치즘 등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재를 원하지 않는 것 같던’ 대중들이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추종하려는 열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등장한 비극적 역사의 단면들이다. 우리는 왜 ‘선동’되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가 가려고 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가? 역사는 누가 이끌어 가는가?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선택권이 있는가?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처음으로 동물들을 선동했던 말 자체는 매우 이상적이다.


  “우리 삶의 이 모든 불행이 인간의 횡포 때문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하지 않소? 인간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의 노동 생산물은 모두 우리 것이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동물농장』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폴레옹이 근처의 농장주 대표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카드게임이 시작됐는데, 결국 “동시에 똑같은 스페이드 에이스를 내놓은 것”으로 발단된 싸움이 오웰에게는 이렇게 보였다.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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