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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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0



  독자에게는 직감이라는 것이 있다.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짚어내는 육감이라고 할까. 아쉽게도 이 놀라운 능력으로도 작가의 깊은 생각을 정확히 꿰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책을 잡는 순간 손으로 느껴지는 표지의 재질, 번역되거나 번역되지 않은 제목, 서문의 첫 마디, 책의 두께,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프로필이나 작가의 사진 등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융화되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심에서 비롯된다.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우리는 이렇게 돌려 말하곤 한다. "이 책은 무엇을 말하는가?" 둘은 결국 같은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의 관심사에서 빗겨나간 것 같은 책을 귀신 같이 솎아 내곤 하지 않는가.


  나와 같이 인문학(최근 국내에 『인문학의 미래(원제 : The Future of the Humanities)』로 소개된 영미권의 저명한 인문주의자 월터 카우프만의 분류에 따르면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이렇게 여섯 분야가 인문학에 포함된다.)에 발의 팔 할 이상을 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책을 고르는 직감은 꼭 필요한 능력임을 넘어서서 일종의 미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책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얻는지는 더 이상 이 직감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인문학은 직감(과 영감)의 영향을 상당히 받으면서도, 그 안에서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학과는 또 다른 예리함과 질서정연함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명확한 해결책 없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며 매 순간마다 대안을 제시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이 쉽게 다루기 어려운 분야로 남아 있다.


  하기야 인간과 인간사와 삶을, 그 자체로도 정의하기 힘든 그것들을 퍼즐 조각 맞추는 것처럼 딱딱 눈에 들어오게끔 파악하고자 하는 것, 그건 치기 어린 욕심일 뿐이다. 그런 욕심은 감상적으로 끝나곤 한다. 건설적인 인문학은 우리에게 여러 의미를 제시한다. 한 두 개로 끝나지 않는 의미의 열거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도, 우리를 권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인문학적 고민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지는 호기, 뇌의 튼튼한 벽, 그리고 '오래 가는 건전지'를 장착한 감성이 필요하다. 우스갯소리였으나, 실제로 인문학은 우리의 정주(定住)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러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노마드(nomad, 유랑자, 유목민)'의 개념을 여기에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방랑, 유랑, 혹은 여행. 어쨌든 움직여야 하는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에 있어 우리는 지도를 그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예견하며, 기준과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지도가 정말이지 눈에 아주 잘 들어오도록 방에 걸어두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한 작가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도시들이 그려진, 그러니까 존재했는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전혀 없는 도시들로 이뤄진 지도 하나를 우리에게 제시했다. 누가 그것을 들여다볼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하나 둘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다 싶을 때 그 지도를 몰래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지도에서 그들이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더 의미 있는 도시를 찾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정정해야겠다. 눈에 보이는 도시와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들 중 한 명인 나의 이야기를 이제 써보려고 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에 대한 사변이다.




*     *     *



  이 소설은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만 이뤄져 있다. (사실 이따금 칼비노의 목소리가 끼어들기도 하나, 매우 드물다.) 대륙을 다스린 쿠빌라이 칸과 대륙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 황제는 이 베네치아의 젊은이보다 어림잡아도 마흔 해를 더 산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이 저물어가는 시기, 그리고 그의 제국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에 젊은 베네치아인은 (연대상으로도 뒤죽박죽인) 이상하고도 기이한 도시들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게 된다. 그의 보고는 일반 사신들이 황제를 알현하며 쏟아놓는 사무적이고 원칙적인 보고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말해 그의 보고는 문학적이며,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감상적이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도시의 실존 여부를 차치하고 오로지 폴로가 소개하는 도시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든다. 칼비노는 폴로의 입을 빌려 총 55개의 도시(여기에 각 장(章)을 열고 닫는 황제와 폴로의 대화록들에 등장하는 유일한 도시, 즉 달이 쉬어가는 도시 '랄라제'를 포함하면 56개)들을 그려낸다. 이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섬세함', '교환', '눈', '이름', '사자(死者)', '하늘', '지속', '숨겨짐'이라는 큰 의미망에 각각 속해 있다. 도시의 이름이 너무 많다고 투정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책을 덮었을 때 남는 것은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로, 혹은 전체로 뒤섞여 의미가 희뿌옇게 남은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도를 그려보고자 했다. 도시의 이름을 적고, 그 도시를 설명하는 폴로의 말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다 생각된 것들을 밑에 길게 적었다. 칼비노가 특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유난히 길게 썼거나, 어떤 의미에 대해 반복적으로 묘사(집착)하고 있다고 느껴진 것들은 '※'로 따로 적어두었다. 이렇게 A4용지 8장의 짤막한 정리본을 만들고, 그 위에 펜으로 이것저것을 연결하거나 덧붙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지도 그리기'의 끝을 보려고 했다. 나는 이 책을 완독했을 때, 결코 "완독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았고, 어떻게든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읽었다고도 할 수 있고, 읽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삶을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있는 것과 그 무엇이 같지 않단 말일까.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한글로 번역해도 본문이 200페이지가 겨우 넘을 정도의 짧은 소설이다. 하지만 칼비노가 그의 문학적 성숙기에 일기처럼, 그리고 시처럼 남긴 단편들을 조합해 펴낸 책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을, 수많은 나의 오만들 앞에서 선언해야 했다. 동의하겠지만, 마음이 아픈 와중에 실패를 시인한다는 건 적잖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아픔으로부터 나는 또 한 번 '인문학적 치유'를 실감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칼비노가 이 책을 쓰고 난 뒤, 그렇게 희뿌연 연기처럼 남아버린 이 작품의 수많은 의미들을 과연 하나로 꿰찼을까? "유레카!"를 외쳤을까? 알았다면 그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에는 분리된 채 그 문장, 혹은 문장 몇 개만으로도 충분히 아포리아로 기능할 수 있는, 두 번 세 번 고쳐 읽어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명문장들이 널려 있다. 몇 개 예를 들어볼까? 이런 것들은 어떤가?


  "모든 도시들은 그것이 마주 보고 있는 사막으로부터 자신의 형태를 부여받습니다.(p.27)"

  "여행자는 나무와 돌들뿐인 길을 따라 며칠을 걷습니다. 그동안 어떤 사물에 시선이 머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시선이 머무는 경우는 그 사물을 다른 사물의 기호로 인식했을 때뿐입니다.(p.21)"

  "거짓은 말이 아니라 사물 속에 있습니다.(p.79)"

  "거울은 사물들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쳐졌다 해서 모든 게 다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p.70)"

  "사람들이 말하는 도시는 존재에 필요한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도시 자리에 존재하는 도시는 존재감이 그다지 없습니다.(p.87)"

  "살다 보면 자기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 가운데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날이 찾아오게 돼. 그러면 마음은 다른 얼굴, 다른 표정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거기에 옛 형상을 새기고 각 얼굴에 가장 적당한 가면을 찾게 되지.(p.122)"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p.40)"

  "제국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이 자신의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 탐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아직은 언뜻언뜻 보이는 행복의 흔적들을 자세히 찾아나가면서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측정해 보는 겁니다. 폐하의 주위가 얼마나 어두운지 알고 싶으시다면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셔야 합니다.(p.76)"


  이렇게 진리로 구성된 예시들을 독서 노트의 구석에 깨알 같이 적어놓으면 밥 한 술 덜 먹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냐며 포만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 포만감은 가짜다. 우리의 (정신적) 위(胃)에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소화될 수 있을까? 위액이 식도로 역류할 정도로 굶주린 상태에서, 그것이 일종의 끓어오르는 열정 따위가 아닐까 착각하며 자신의 주린 배를 도도하게 쓰다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도대체 칼비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폴로와 칸의 의미심장한 대화들, 컴퓨터 바탕화면이나 스마트폰 배경에 넣어 매일 확인하고 싶은 매력적인 아포리아들 사이로 나 있는 단 하나의 뾰족한 바늘을, 나는 진심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에 찔려 나의 공복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려줄 한 줄기의 피가 나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흘러나왔으면 했다. 이 출혈의 아픔이 나를 진리의 숲 속에서 탈출시켜 숲 바깥의 냉정한 응시자로 만들어줬으면 했다. 나는 A4용지 여러 장에 문자로 적어놓은 내 지도를 바라보다가 그 바늘 하나를 발견했다. 발견의 기쁨이 우선 찾아왔다. 그러나 발견한 것은 나를 이 책을 읽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놨다. 나는 지도를 한 바퀴 돈 셈이었다. 유랑과 방랑과 여행과, 여하튼 그런 '이동'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하듯. 조금 긴 칼비노의 문장이다. 나처럼 천천히 곱씹어보길 바란다.


  "금방 사라지고 마는 기억 속의 안개나 건조하고 투명한 공기가 아니라 도시의 상처에 딱지를 앉게 하는, 불타버린 삶에서 타고 남은 찌꺼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에 의해 부풀어 오른 스펀지, 움직이고 있다는 환영 속에 빠진 화석화된 존재들을 가로막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뒤범벅 같은 것이다. 당신이 여행의 끝에서 만나게 될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p.129)"


  칸과 폴로의 대화가 전부인 줄 알았을 독자들은 '당신'이라는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 전율인지 소름인지 모를 충격을 느끼게 된다. 칼비노가 각 장(章)을 열고 닫기 위해 마련한 앞뒤 공간의 글에서 유일하게 '당신'이라며 독자들을 겨냥한 부분이 이곳이다. 아, 그리고 그 앞 문장의 이 단어, '뒤범벅'이 갖고 있는 혼탁함, 무질서, 무기력, 불가피 등등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져버리는가 말이다. 결국에는 '불완전'이었다. 그리고 '지옥'이었다. 내가 칼비노에게 직감적으로 묻고자 했던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완전의 추구, 유토피아의 바람과 같은 오만방자한 요구를 현명한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직시하도록 한다. 안개이다. 지옥이다. 뒤범벅이다. 혼탁함이다.


  남은 것은 두 가지 선택뿐이다. 칼비노는 말한다. 지옥의 일부분이 되어라. 그렇게 하기 싫다면, 조금의 용기를 더 내어서 "지옥 속에서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p.208)"하라. 그렇다면 그 눈은, 지옥이 아닌 것을 감별해낼 수 있는 눈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제목도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데, 도대체 폴로는 그것들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칸은 폴로에게 이상향으로 가는 항로를 아느냐고 묻는다. 폴로는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있다며 세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나머지 것들과 뒤섞인 단편들,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는 순간들, 누군가 보내지만 그걸 받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호들로 이루어진 완벽한 도시를 한 조각 한 조각 맞춰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부적절한 풍경의 한가운데로 나 있는 지름길, 안개 속에서 반짝이는 햇빛, 오가다 만난 두 나그네의 대화면 충분합니다.(p.207)"


  무엇 하나 '완벽'이라는 꼬리표를 단 것이 없다. 의심스러울 만치 불완전한 것들이며, 별로 신뢰를 주기 힘든 것들이다. 지름길이 항상 대로(大路)와 대로 사이로 나 있어 우리를 빨리 이동시킬 거라는 믿음은 위험하다. 지름길은 또 다른 샛길과 연결되어 있기 십상이므로 우리는 목적지를 잃고 지름길들의 거미줄 속에서 헤맬 수 있기 때문이다. 안개 속의 햇빛은 어떤가? 광자(光子)를 분산시키는 안개의 작은 입자들은 빛에 대한 불확실성, 혹은 빛을 내거나 빛이 비추고 있는 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심어주기 충분하다. "오가다 만난 두 나그네의 대화"는 전문성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일종의 '소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거면 충분하다고 칼비노는 말한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끝에 가서 만나게 될 것"이 바로 뒤범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중요한 것은 결국 불완전을 주시하고, 불완전을 상기하며, 그것을 바라보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가 야기하고 겪게 될 수많은 문제들을 방지하는 것이다. 한 편의 인생이 연극된 극장에서 막이 내려갈 즈음, 우리가 서글퍼 울지 않고 연극의 주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세상을 한 바퀴 돌았다고, 지도의 모든 도시를 알 것 같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여정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을 때, 생각해보니 나는 아주 슬펐던 것 같다. 오후 내내 그랬다. 하지만 한창 감정이 고조될 이 새벽에, 나는 얼핏 보면 칠흑 같으나 실은 완전히 어둡진 않은 밤의 미숙한 암흑을 보며 불완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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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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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지금 내 옆에는 톨킨의 『실마릴리온』이라는 두꺼운 소장본이 한 권 있다. 이 책과 제목의 의미는 톨킨의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톨킨의 신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화’라 부르는 부류의 것도 아니다. 유수의 비평가들과 언론에서 극찬하는 바대로 톨킨은 하나의 민족이 수 세기에 걸쳐 만들기도 벅찰 만한 자신만의 신화를 만드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신화는 ‘인공(人工)신화’이다. 톨킨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의 모든 이야기는 순수한 인공물이다.


  우리 시대에 톨킨은 롤링, 루이스, 르귄 등과 함께 소위 ‘환상(판타지)’이라 불리는 문학 장르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정평이 나 있다. 서양에서는 이미 문학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사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근 10년 정도에 두 편의 영화 시리즈 『반지의 제왕』과 『호빗』으로 적잖은 팬이 형성되었다. 환상문학을 쫓는 우리나라의 아마추어 작가들에게 그가 끼친 영향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환상의 역할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들과 환상문학 팬들의 대결은, 거칠게 묶자면 한 마디로 ‘리얼리즘 대 판타지’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 논쟁하기 좋아하는 ‘문학의 효용’과 관련해서 이 대결은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더 넓게 보자면 이것은 인간의 사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가치 있는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내가 칼비노를 근래 접하면서 한편으로 환상문학의 가능성을 나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톨킨과 롤링의 경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말하곤 하는 “심각할 필요 없잖아? 즐겨!”라는 (카르페디엠을 모방한) 시대적인 문구처럼 환상문학의 일면에는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환상의 비중 자체를 늘리는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든 간에 환상문학은 그 자체로의 순수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일종의 ‘정통주의’의 특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톨킨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반지의 제왕』의 서문에서 자신의 작품은 순수한 창작에서 기인한 것이라 선언했다. 당대 평론가들은 그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아 작품 속 전쟁 구도를 만들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톨킨은 “이야기가 경험의 토양을 사용하는 방식들은 매우 복잡하다(the ways in which a story-germ uses the soil of experience are extremely complex).”며 작품과 작가의 영향 사이에 단순한 구도를 연결하지 말 것을 넌지시 강조했다.


  나는 열렬한 톨킨의 팬이고, 환상문학의 창조성과 상상력을 지지하며, 나름의 방식대로 그러한 것을 추구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강조하는 순수성 이외의 무언가를 더 찾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다. 실제 신화나 역사, 종교, 철학 등에 기반을 둬서 철저하게 과거와 지금의 우리들에게 호소력 있는 가치를 전달하는 세계적인 작품들을 읽을 때면 한편으로는 환상문학이 왜 그리도 초라하게 보이는지 주눅이 들곤 했었다. 환상문학이 상업화되기 용이한 까닭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고, 세계 문학의 대세 중 하나로도 서구에서는 일찍이 자리 잡았지만 솔직히 나는 ‘실제에 기반을 둔 거짓말’에서 더 많은 감동을 받아 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길게 에둘렀는데, 아마 지난 방학 때부터 내가 한동안 칼비노에게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갈등을 그가 해소시켜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니, 그런 확신을 갖고 있다. 근래 접한 그의 네 번째 작품 『우주만화(원제 : Le cosmicomiche)』는 팩트, 즉 과학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 현실에의 고민이 빚어낸 그야말로 ‘최고의 거짓말’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에 빠지다보면 어느새 “어떻게 이렇게 이어붙일 수 있지?”라는 감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작품은 칼비노의 정수이다.


  사실 우주과학과 생물학적 지식을 거의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작품은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칼비노의 글쓰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의 중간마다 독자들을 화자에게 집중시키고 동시에 작품의 몰입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독자를 ‘소환’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서술전략이기도 한데, 이런 방식은 (독자마다 성향적인 차이는 있겠으나) 독자들을 어려운 이야기로부터 구원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어려운 지식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탓에 곧잘 지쳐버릴 독자들도 몇 쪽마다 한 번은 각성하게 된다. 이 각성은 지식들 사이에 칼비노가 숨겨놓은, 혹은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보편적인 가치들과 인간 심리의 묘사를 놓치지 않게끔 도와준다. 따라서 칼비노에게 익숙지 않은 독자들은 우선 상대적으로 덜 어려운 지식들이 있는 제 1부를 차근차근 읽어가는 것이 좋다. 마치 고산적응을 하는 것처럼.


  많은 비평가들과 문인들도 동의하는 것이지만 문학의 전략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시선이다. 우리가 흔히 ‘시점’이라고 부르는 것 말이다. 여기서 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1인칭’, ‘3인칭’ 이런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화자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화자를 내세우느냐에 따라 작품의 전체가 좌우된다. 그런 면에서 칼비노는 독특한 화자들을 사용하는 걸 좋아했고, 그것이 그의 특이한 문학세계를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앞서 ‘우리의 선조들’ 3부작 리뷰들에서도 재차 말했으나, 그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러나 “비범하다”고 하면 너무 평범하기 들릴 것도 같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특이한” 화자들을 통해 보편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다. 젊은 시절 ‘네오리얼리즘’이라 불린 사조에서 벗어나면서 그가 찾은 문학적 ‘생존전략’은 독특한 화자를 무기로 삼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 3부작보다 특이한 화자가 『우주만화』에 등장한다. 수많은 단편들이 문자 그대로 ‘우주적’으로 엮여 있는 와중에 단 한 존재만 그 모든 것들을 꿰뚫어가며 우리에게 우주를 보여준다. 그의 이름은 QFWFQ이다. 읽으려면 ‘크프우프크’로 해야 한다. 그나마 이 이름은 쉬운 편이다. ‘프(이)느크0’라는 한 부인의 이름을 컴퓨터로 타이핑하려면 ‘0’을 아래첨자로 써야 한다. 앞서 이 소설이 일부 과학적 지식을 요구한다고 했는데, 이름은 하나의 기호처럼 기능할 뿐, 그것 나름의 별다른 의미는 없는 듯하다. (혹시 알레고리가 있을까 나름 나열해서 분석해봤지만 허사였다.)


  이 존재들이 어떤 모습인지는 우리가 감히 상상해볼 수가 없다. 처음에는 공룡이라고 아예 제시가 되지만 제 2부로 넘어가면서부터 소설의 규모는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비약한다. 우주의 물질을 갖고 은하와 함께 이동하거나, 60억년이라는 시간을 무슨 젊은 시절 추억처럼 생각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거나, 지구와 달이 맞닿았던 시기에 두 표면을 장대 하나로 오고 가는 흥미로운 이야기, 까마득한 성운의 형성 등이 주를 이룬다. 제 3부로 가면 규모는 축소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더욱 근본적인 곳으로 깊게 들어간다. 안팎이 나뉜 세계, 죽음, 열망, 욕정 등 종교와 철학이 그동안 심오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인류에게 제시하려고 했던 의미들이 등장한다.


  칼비노는 이 모든 의미들을 과학과 문학의 연결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주는데, 일단 그 의미들이 무엇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방법 자체가 독자들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미 여러 평론들이 나왔겠지만 그의 소설은 ‘열린 소설’이다. 단편 하나가 하나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여러 이야기가 굳이 단일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어떤 의미들을 나름대로 발견했노라고 주구장창 이야기를 해봐야 이 책을 읽은, 그리고 앞으로 읽을 독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갈래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접하면서 특정 해석의 고집을 떨쳐내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 배워 왔으나, 사실 대부분의 해석들이 일치하는 지점은 늘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읽으면 무릎을 치며 공감하는 평론은 늘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우주만화』도 그것들과 같은 소설에 속할 수 있을까? 칼비노가 직접 가치를 제시한 문장들을 차치하고도 독자들은 수많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투른 독자가 아닌 이상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커다란 의미를 뽑아내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때 문제가 발생한다. 소설은 가히 우주적인 규모로 진행이 된다. (단, 한 가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지금 발견된 과학적 사실과 당시 1960년대의 사실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 규모의 의미들이 세부적으로 제시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것을 하나로 묶을 좋은 방법을 갖고 있을까?


  이 소설이 소재로 삼은 것들을 하나의 축으로 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떤 순환구도를 그릴 수 있다. 칼비노가 어디서부터 소설을 시작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도 잘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편의상 ‘현실직시’라는 축을 기준점으로 삼자면 왼쪽으로 이 순환구도는 회전하기 시작하는데, 그곳에서는 과학적 상상력과 지식을 만나게 된다. 칼비노가 ‘환상’이라는 장르에서 힘을 발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해석 가능한 지평을 거의 무한정 확장시킨다. 이 힘이 순환구도를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크게 회전시켜서 ‘근본적 질문’이라는 곳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칼비노가 얼마나 섬세한 철학자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 질문이 다시 우리를 ‘현실직시’의 축으로 돌려놓는다. 이렇게 이 소설은 계속 독자들을 뱅뱅 돌린다.


  칼비노가 단편 몇 개를 나란히 놓고 고민했을 것으로 보이는, 때문에 소재별로 약간 주제들이 중첩되는 것처럼도 보이는 것들을 중심으로 살펴봤을 때, 독자들은 대략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변화의 두려움, 가능성, 기호란 무엇인가, 내부 폭발, 진정한 보편적인 사랑, 글쓰기, 생물의 출현, 욕망, 내부와 외부의 차이, 열망, 눈(目), 죽음. 그 외에도 각 문단마다 마치 아포리아처럼 뽑아낼 수 있는 튼튼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이 책은 곁에 끼고 두고두고 읽으면서 칼비노의 고민을 나의 것으로 연장시키기에도 ‘용이’하다. 내가 방금 ‘용이’라는 단어에 작은따옴표 두 개를 붙이면서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위에서부터 이 글을 쭉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것이 ‘칼비노식 환상’이 나에게 준 위안이며, 커다란 확신이었음을 결코 부인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화자 크프우프크를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그는 시대를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공룡이기도 했고, 선장이기도 했고, 오늘날 인류의 문명 이전에 있었던 문명의 사람이기도 했으며, 지구의 내부에서 살던 존재이기도 했다. 어린 우주에서 원자를 갖고 놀기도 했다. 25편의 단편이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사려 깊은 화자 덕분이다.


  빅뱅에서부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는 크프우프크는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크프우프크는 모든 것을 탐구하고 성찰하고 내다보는 인간에 대한 칼비노의 희망, 그가 ‘우리의 선조들’에서 보여준 인간 유형의 ‘총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크프우프크는 독자에게 “여러분은 결코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라며 한계를 정해준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상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결코 허황되지 않은 의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칼비노와 크프우프크가 알려준 환상문학의 가능성은 바로 그런 까닭에 나에게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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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3-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님 안녕? 저도 칼비노 읽어볼게요. 뭐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탕기 2013-03-24 00:23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는 <나무 위의 남작>이 지금까지는 가장 재미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은 한 번 읽어보세요. <우주만화>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쉽거든요.
일단 그렇게 칼비노에 맛 들리면(?) 다른 것들도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제 막 칼비노의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읽기 시작했습니다. ^^

2013-03-29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4-26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달이 지났는데, 할 일이 많은가 봐요 :)
그 3부작은 늘 읽어볼까말까 했는데, 탕기님 집중력 끝내준다, 한번에 몰아치기.
저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어요!
 
침묵의 세계 - 개정3판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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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우리에게는 한 가지 슬픔이 있다. 기계에 둘러싸여 살 수밖에 없는, 즉 불가항력의 조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이라는 태생적 슬픔이다. 그러나 이 슬픔은 하루도 빠짐없이 편안해하고 행복해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배반이다. 우리가 슬픔의 편에 서 있을 때, 아니면 그와 반대로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낄 때, 슬픔과 행복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너는 위선자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읽어 라다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라다크 사람들은 우리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들도 맥도날드를 먹고, 나이키를 입는다. 우리 중 일부가 “그래봤자 소용없어요!”라고 외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들 중 나이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옛 삶을, 당신들은 그토록 그리워하는 거지요?”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얻어진 셈인데, 중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도 그거다. 우리는 북적거리는 커피숍에 앉아 소로의 『월든』을 읽는 현대인이다. 커피숍에 앉아있기만 하면 『월든』쪽으로, 그리하여 중간으로 걸어가 서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건 반대편에 있다. 한 쪽 사이드에서만 공을 돌리다보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축구팬들은 알 것이다. 이때, 시야가 넓은 선수[현명한 저자]는 반대편에 있는 동료[독자]에게 정확한 롱패스[저서]를 보내준다. 또 다른 수[진리]가 생기고, 상대편[우리의 폐습]은 다시 수비전형을 갖춰야 하는 번거로움에 빠진다. 골[삶의 목표]을 넣으려면 되도록 경기장을 크게[여러 저자들의 비판을 수렴해] 써야 한다.


  읽는 이에게는 미안할 정도로 식상한 비유였나? 그러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긴장하고, 시야가 좁아지며, 점점 체력이 고갈되고, 결국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그 때 즈음 되면 골을 넣는 것, 이기는 것, 페어플레이 하는 것, 어느 것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아주 고통스럽다는 것만 느낀다. 누구든 이런 삶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반대편을 바라보는 책은, 그래서 읽어야 한다.


  반대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추천한다. 앞만 보고 달리거나, 개인기술을 남발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원제 : Die Welt Des Schweigens)』이다.

 

 

 

 

*    *    *

 

 

 

  시끄러운 세계의 반대편에는 침묵의 세계가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바다 건너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나와 우리, 그리고 세계의 깊은 곳까지 침전하려는 노력과 탁월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코 쉽지 않다. 막스는 문학과 에세이, 인문학적 진단, 철학, 종교(그리스도교), 신화, 역사의 경계를 ‘침묵’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붕괴시켜버린다. 막스에게 유일한 경계가 있다면, 그건 침묵의 세계와 시끄러운 세계(‘잡음어’와 ‘라디오’, ‘소음’으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세계)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거리이다. 우리는 그가 말한 침묵의 세계에서 이미 한참을 벗어난 우리 조상들의 후손이다. “좁힐 수 없다.”는 건 우리가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막스의 글에 적응하는 어려운 과정을 잘 치렀다면 독자들은 한없이 슬퍼지는 독서의 연속을 견뎌야만 한다. 침묵의 세계는 막스의 뛰어난 비유와 문학적 묘사로도 도무지 손에 잡힐 듯 확실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우리를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허상을 보는 것일까? 침묵의 세계의 실존을 추적하겠다고 책의 문두에서 막스는 선언했지만 도대체 어떤 모습이 우리 앞에 그려지고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생각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의 우리와 비교되면서 부재, 결핍, 상실 등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이것이 실존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쓰레기통에 아무렇지 않게 버렸고, 혹은 강탈당했으며, 그리하여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설명이 말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을 갖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는 걸. 때문에 막스가 우리를 그리워하도록 만드는 방법 자체가 실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된다. 나는 과학을 존중하고, 과학적 이론들을 지지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실존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굳이 실증적 자료들을 내놓을 필요는 없다는 걸, ‘비과학의 영역’에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다른 이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한 권의 경전과도 감히 비교할 수 있다.


  종교 경전들의 특징은 자세한 설명을 피한다는 것에 있다. 막스가 ‘고대의 언어’라고 해서 특별히 고찰한 부분에서도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말 자체가 자세하지 않아 그 자체로 말 이면의 세계와 아주 면밀하게 닿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에게 그 말들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가리킴, 즉 지칭의 명백한 능력은 사물 자체를 말 안의 개념 속에 종속시켜버린다. 이러한 말에는 무한의 가능성도, 충분한 공간도, 포괄성도 없다. 현대인들이 에둘러 말하는 걸, 뭉뚱그려 묘사하는 걸 옛날의 유행이나 고리타분한 것 따위로 대부분 치부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서 무한의 가능성, 충분한 공간, 그리고 포괄성이 추방당했다는 것을 정확히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 사실 막스도 이 단어를 쓰는데 있어 상황마다 차이가 있다는 걸 굳이 주지시킨 적은 없는데 - ‘말’이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부정적 이미지를 갖진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막스에게 하나의 경계가 있다고 했었다. 시끄러운 세계와 침묵의 세계. 그렇다면 말 역시 각각의 세계에서 존재할 것이다. 막스가 사용하는 ‘말’이라는 단어는 어떤 때에는 시끄러움 속에서 나와 기계적이며 수평적인, 그래서 틀에 박힌 “고아의 말(waisensprache)”인 경우가 있고, 반대의 경우에 ‘말’은 아기, 노인, 시인, 농부 등이 사용하는 “침묵으로부터 출발한 말”, 그래서 야성적인 침묵을 인간 안의 침묵으로 ‘능동적’으로 바꿔주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전자, 즉 ‘고아의 말’이다. 그러나 시원(始原)에는 말이 침묵으로부터 나왔다. 막스는 그것을 수직적 관계로 설명한다. 침묵에서 거침없이 뛰어 올랐으나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 태양의 홍염(prominence)과도 같다. 거대한 백열가스인 홍염은 태양의 표면에서 솟아올랐으나 다시 표면으로 둥글게 내려오는 고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에 지구가 여러 개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크다. 옛 침묵과 말의 관계는 이러했을 것이다. 크고, 넓었을 것이다. 막스에 따르면 침묵에서 떠오른 말은 삶과 부활을, 다시 침묵으로 떨어지는 말은 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천체의 운행과 진리 사이에는 어떤 겉보기의 유사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 것들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성스러움이 느껴진다는 점에서도, 동시에 끝없는 호기심과 경외를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도 막스가 들려주는 침묵의 모호한 정체는 신적인 것과 닮아 있다. 실제로 막스는 침묵이 말로 변환되는 과정에는 신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그렇게 변환된 말 중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소음에서 태어난 말”과는 다른 말의 예로 ‘복음’을 든다. 종교에 적(籍)을 뒀으나 무신론자인 나에게 침묵의 세계를 ‘신’과 몇 차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막스의 시도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했을까? (나는 “종교적 해석?”이라고 이면지에 수차례 적어놨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과학적 반박을 포기한 상태였다. 막스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현대문명, “잡음어”와 “라디오”로 묘사된 우리의 삶을 비판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옛 사람들은 말을 통해 막스가 ‘짐승의 단계’라 했던 형상과 상징에서 벗어나 그것의 지배자가 된다. 여기서 나는 괴테의 인용문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음의 저 낮은 곳까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그 구절을 여기에 옮겨본다.


  “인간의 외면(인간의 형상)이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것은 실은 그 내부를 위해서 비상하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124쪽)


  물질에 얽매여 있지 않은 사람들은 말과 마주 선 채 형상으로부터 독립하여 풍요한 침묵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것이 막스의 해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얼굴에는 자연의 침묵이 새겨져 있다. 흔히 산사람은 산처럼 생겼고, 어부는 바다처럼 생겼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 그렇다. “풍경은 인간의 얼굴 속에 자기 자신의 유적을 가지고 있고(121쪽)”라는 막스의 기막힌 문장은 인간의 얼굴이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옛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얼굴을 고치면서 외면의 성장을 도모하기도 하고, “텅 빈 얼굴 속에 거대한 도시”가 자리 잡아 볼품없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차라리 응고되어 있는 동물들의 고독한 침묵보다도 못하다. 이것의 모든 원인은 잡음어에 있다. 막스가 ‘잡음어’에 어떤 묘사들을 붙여놨는지 열거해보면 그 정체가 조금은 선명해지지 않을까? 세포분열, 양적증가, 말의 망령들이 주고받는 말, 사이비 말, 죽은 말, 허술한, 구멍이 뚫린, 악마적인, 불확실한, 무책임한, 말의 파괴, 동물적, 배설, 비현실적, 위험한, 무절제의.


  그 위에 터를 잡은 라디오의 세계는 - 이걸 인터넷, TV 등 타매체의 총제적인 상징으로 봐도 무관하다 -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변조시키고, 인간의 현존성을 완전히 강탈해버리는 중이다. 세상은 이제 순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짧은 템포를 지니게 되었다. 잡음어가 수평적인 말을 통해 개별성을 죽이고 모두를 똑같이 만들어버렸다. 소리 큰 이가 이기는 세계가 되었다. 평등의 군중과 목소리 큰 독재가가 교묘한 짝을 이뤘다. 제 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일어났다.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안 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정치는 쇠퇴하고, 사건은 망각된다. 창조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정신병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윽고 절망하게 된다.


  “모든 것이 저절로 거기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이비 연속성 속에서 인간은 모든 본질적인 것이 어떤 특별한 한정된 행위에 대해서, 어떤 창조적인 행위에 의해서 생긴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유 의지적인 요소와의 연관성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것이 바로 라디오의 구제불능적인 점이다.(239쪽)


  이런 세계는 데카르트의 선언으로부터도 이탈되었다. 막스는 “나는 생각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침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게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수도원의 밀실에만 존재한다는 비유로 마지막 비판의 일격을 가한다.


  나는 얼마 전 한 글에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임을 그리다 돌이 될 정도의 지극정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향수를 잊어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도 일종의 순환이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돌아올 때마다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막스에게서 어떤 희망을, 그 수많은 비판 속에서 어떠한 긍정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대목은 짧으나 강렬하다. 침묵이 죽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시 얻거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확신이다. 소음이 제 뿔에 지쳐 터져버릴 것이라는 예상. 그래서 막스는 그 빈 공간에 침묵이 깃들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멸망 후 찾아오는 ‘인간 없는 세상’의 원초적 침묵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책 커버에는 유명한 릴케가 막스를 소개한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다. “피카르트는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실패를 거듭한 끝에 그의 고뇌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사변이 단순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종의 ‘개똥철학’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의 깊이를 체험해볼 것을 권한다. 항간의 대중들이 자기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 물론 그들은 그들의 생리대로 부인하겠지만 - 궁극의 가치와 의미들은 막스와 같은 ‘고뇌하고 쓰는 자’들이 보존한다. 우리는 우주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는 대중문화 상에서만 통한다. 우리가 찾는 우주는 그곳에 없다.

 

 

 

p.s 이번 방학의 마지막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작년 12월 말이었다. 오래토록 나를 괴롭혔던 책이니만큼 훗날 여러 번 읽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나 세계를 이해했는가를 가늠할 척도로 나는 이 책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 없는 이들은 읽지 말고, 주저하는 이들은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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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6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2013.02.21

 

 

  자유의지[명사] :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 라틴어로는 Liberum Arbitrium Voluntatis. 영어로는 Free Will.


  나는 사람들이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원제 : Free will)』에 대해서 어떤 다양한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저 상상만 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리스를 아예 ‘허풍쟁이’라고 예단하는 바람에 이 책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분노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화를 낼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은 대개 어떤 것들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혹은 않으려는 태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믿음’이 탐구하려는 자세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러니까 해리스가 ‘자유의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문제에 대해 평소 깊은 생각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독서취미나 글쓰기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그의 주장은 별로 생소하거나 놀라운 것이 아니다. 고대철학에서도 ‘나’에 대한 전복적 사고는 있었다. 예컨대 장자(莊子)가 있다. 다만 그런 철학자들이 오늘날 ‘전복적 사고’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그들의 대부분이 광인(狂人)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뛰어난 성찰과 획기적인 사고로 기존의 믿음을, 대륙처럼 큰 거인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위험했다.


  나는 적게나마 거인을 무너뜨리려는 시도, 혹은 그런 시도들로부터 여전히 저항하며 자신들을 지켜나가는 거인들의 시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활동하게 되는지를 읽어왔다. 물론 그것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에 직접 뛰어든 적이 없다는 한계는 앞서 고백해야겠다. 나는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이라든지, 리처드 도킨스가 근본주의적 종교세계와 전쟁을 선포한 역작들, 지적설계론들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반론, 니체, 진화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존 브록만의 등을 보면서 ‘확신’이라는 기둥이 무너져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계속 탐구하고 질문하다 보면 인문학은 어느 순간 과학적 진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종교처럼 과학과 아주 다른 대륙의 진리들에 접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인문학을 붙잡고 있으면 그 진실들을 피해갈 수가 없다. 과학은 증거를 통해 가설을 세우고, 입증이 되면 반박의 논거가 나오기 전까지 그것을 잠정적인 사실[fact]로 공인하는 공적 제도이다. 인문학이 과학적 진실들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아닌 증거를 찾아야만 한다. 논리는 현대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때론 ‘말놀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중한 현대인들은 유전자학, 진화론, 우주과학, 뇌과학, 지질학, 고고학 등 인류가 발견해온 증거들의 역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이런 증거들에 기초한 논리가 아니라면,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조차 없다.


  그런 면에서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환상이다.”라는 주장은 확신에 대한 의심을 예전보다는, 적어도 근대 사람들보다는 더 쉽게 할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다지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항간에 이 책은 엄청난 문제작이라고 소개되는데, 아마 그 까닭은 현대인의 양자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매사를, 심지어는 모든 것, 아니 신까지 의심할 수 있으면서도 이것만큼은 의심하기 힘들고, 혹은 하기 싫을 때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 ‘이것’이란 바로 ‘나’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솔직히 말해 장자는 사유놀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물증이 없다. 현학적이고, 해학적이고, 그래서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철학들은 어렵지만 그만큼 수용하는데도 별 무리가 없다. 더군다나 오늘날은 지식 소비시장의 세계가 아닌가! 그런데 해리스는 막강한 증거를, 실제 실험들의 데이터들을 들고 우리에게 선언한다.


  “자유의지는 없다.”


  책에 소개된 생리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은 생각에 앞서,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의지’라 부르기 좋아하는 어떤 과정에 앞서 뇌피질의 뉴런 256개가 활동하는데, 그것을 분석하면 우리가 내리는 의사결정의 무려 80% 정도를 예측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도출해냈다. 쉽게 말해 ‘나’보다 뇌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를 해리스는 “나의 정신생활은 단지 우주에 의해 내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28쪽)”라고 표현했다. 그럼 자발적 행동과 비자발적 행동의 차이는 어떨까? 해리스는 이것을 그저 “뇌의 수준” 정도라고 여긴다.


  해리스는 우리의 이해를 (종교적 의미가 배제된) 결정론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과는 다르다. 운명론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문제시되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되어 있어서 Pricrime 시스템에 따라 적색경고볼에 내 이름이 새겨진다고 하자.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톰 크루즈(극중 앤더튼)과는 달리 그저 내 방 침대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만을 기다린다고 하자.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해리스의 말처럼 운명론을 믿고 그저 관망하는 태도는 단순한 결과 딱 하나만 만들어낼 뿐이다. 내가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서는 영화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야만 한다. 즉 운명은 없고,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해리스에 따르면 이 선택에 대해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생성’하는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리는 다음 번 선택은 선행 원인이라는 암흑 속에서 출현하기 마련인데, 그 원인들은 당신 경험의 의식적 목격자로서 당신 스스로 생성한 것이 아니다.(45쪽) [중략] 당신은 이번에 왜 상황이 달라졌는지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후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48쪽)


  해리스는 우리에게 계속 “우리는 왜 그런 선택을 했지?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지?” 등을 심리적 원인을 찾는 방식대로 추적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자욱한 안개”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또 한 편으로는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남는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통제를 받는다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도 이 우려에 대해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그는 바꿔 생각할 줄 알았다. 실제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생각의 실종은 “희망과 두려움, 노이로제가 덜 사사롭고 덜 부담스러워(58쪽)”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여기서 훌륭하며 재치 넘치는, 생화학적인 비유를 하나든다.


  “본인의 인격에 필요한 건 다름 아닌 한 끼 식사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59쪽).”


  자유의지는 죄(원죄:sin)와 도덕관념과 당연히 연관된다. 근대철학이 그것을 부추겼다. 따라서 해리스처럼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우리 사회의 윤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해리스는 윤리제도를 존중하는 뉘앙스 속에서도 일단 그것을 의심해본다. 선악과 진위 같은 것은 인간의 복잡한 패턴 속에서 “일관적으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의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63~64쪽에 다섯 개의 사례를 수록했다. 아마 이 책을 읽을 용의가 있는 많은 독자들이 이 대목에서 상당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실제 윤리제도는 다섯 가지의 사례에 동일한 형량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유를 불문하고 일단 분노부터 하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쨌든 피해자는 죽었고, 가해자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뇌의 상태, 가해자의 유년시절 등을 고려했을 때, 그다지 합당하지 않은 편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과관계를 더 넓은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을 없애야 하며,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증오의 논리”를 마음속에서 지울 수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종교가 그들의 신자들에게 부여하는 ‘영원한 형벌’이라는 논리도 부정할 수 있다.


  이 책은 해리스의 전략에 따라 짧고 간결하게, 때로는 반대 인용문이 많이, 그리고 재치 있는 표현과 질문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들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멈춤 구간’이 많은 책이다. 문제 자체도 첨예하거니와 “과연 우리는 해리스에게 어떤 반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를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감이 아닌 증거를 기초로 한 논리적 반론을 우리가 얼마나 제시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기대하지 못할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해리스의 주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효용의 문제를 늘 인문학에게 물어보듯, 우리는 “그래, 그렇다면 자유의지 없는 나의 삶에 대해서 나는 어떤 기본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지?”라고 물어볼 수 있다. 해리스는 변화의 순간에, 혹은 개선의 순간에 우리가 보다 넓은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해자를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예로 들며 - 내 생각에 이 예 말고도 더 많은 영역에서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 생각할 여지 한 가지를 남겨둔다.


  “상황을 이해하는 태도의 변화는 보편적인 인간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깊고 더 지속적이고 더 동정적으로 진보한 것이다.(69쪽)


  자유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넓게 보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서 그가 ‘정치’라는 짧은 장(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변화할 수 있는 지점에서는 그렇게 하고, 혹 변화할 여지가 없거나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 지점에서는 무작정 밀어붙이지 않는 대신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꼼꼼하게 따져보는 태도이고, 현대인들의 특징인 ‘유용성’에도 맞는 자세이다.


  “우리가 자유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꼼꼼히 따져보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81쪽)


  따라서 이 책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충격을 준다. 하나는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선언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를 맹종하면서도 실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이다. 이것이 시대가 기억할 만한 양심적인 ‘사건’이 될 수 있을까?


  해리스는 지식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늘 그러했듯이 수많은 종교적 믿음, 철학적 노선, 혹은 과학적 반증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고, 그것들에 대응하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와 같은 학자들의 충격적인 소수 의견, 이 글의 앞부분에서도 잠시 인용했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그 ‘소수 의견(minority report)’이 오늘날에는 쉽게 폐기되지 못하며, 충격적이고 신선한 것일수록 우리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선까지 우리는 이것을 수용할 수 있을까? 전복적 사고에 대해 우리들이 지닌 저항심리, 은연중에 발동하는 경고 사이렌의 소리를 과연 해리스의 주장이 침묵시킬 수 있을까? 우선 나부터 그의 주장을 꼼꼼하게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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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1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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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6 1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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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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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이로써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을 다 읽었다. 즉흥적이었지만 이번 방학의 목표는 칼비노의 작품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반쪼가리 자작(1952)』이 나에게 준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1959)』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작품은 칼비노의 3부작 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었고, 나는 내친 김에 1957년 작품(3부작 중 두 번째)인 『나무 위의 남작』을 사서 읽었다. 그때, 나는 바우만과 피카르트를 같이 읽고 있었다. 어려운 글과 무거운 분위기 속에 한동안 헤매던 때라 칼비노의 작품은 단비와도 같았다. 학기 중에 틈틈이 읽겠노라고 『보이지 않는 도시(1972)』와 『우주만화(1965)』도 사뒀다.


  어쩌면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남에게 소개시켜줄 수 있는, 그런 애정과 사랑을 보낼 수 있는 작가를 만난 것이 아닐까 지금도 조심스럽게 기대해보고 있다. 아직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를 많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은 칼비노가 20대 후반부터 약 7년 간 문학적 기틀을 다져가며 만들었다. 작가는 40대에 접어들면 30대와는 또 달라진다고 하니, 서재에 꽂아둔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게 될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느낌은 아주 좋다.


  좋은 느낌의 이유를 나는 칼비노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대답들처럼 열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 한 순간도 독자를 지루하게 하는 법이 없는 그의 재치 있는 문장들, “있을 법 하면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놀라운 이야기들, 그러한 진행 속에서 분명하게 제시되는 작가의 역사·도덕관 등. 그런데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낙관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한 국내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칼비노는 지나친 낙관과 부담스러운 비관의 사이를 ‘환상’을 통해 돌파한다.


  3부작 중 어떤 작품을 읽어도 독자들은 칼비노가 지금의 우리가 갈구하는, 이 시대에도 그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재한 채로 막연하게 추구되고 있는 인간상과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반쪼가리 자작』에서는 메다르도를 둘로 쪼개어 선악의 분리가 갖는 의미를 제시하며, 결국 두 동강 난 두 개의 가치를 하나로 봉합해 인간의 ‘원래’ 모습을 보여준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거의 허상과도 같은, 갑옷 속에서만 정신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기사 아질울포와 그 주변의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통해 인간의 ‘전체’를 그려낸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마지막에 읽은 - 발표 년도로는 두 번째(1957)이지만 작품 속 시대상으로는 가장 최근 작품인 -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칼비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미 고인이며,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의 작품을 고작 세 편만 읽었을 뿐이라 그가 정확히 이 작품에서 ‘이상적인 인간’을 독자들에게 제시했다고 확신에 찬 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일말이라도 들게 되는 것은,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이 공감하겠지만 이 작품이 세 편의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인생을 보여준다는 이유, 그것으로 인한 직감 때문이다.


  남작의 이름은 코지모이다. 소설 초반부에는 코지모의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말하는 이는 코지모의 동생 비아조이다. 코지모는 판에 박힌 귀족 생활을, 단 열 두 살의 나이에 청산하기로 마음먹고 나무 위에 올라가 죽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기로 결심한다. 코지모의 부모는 귀족답게 ‘정석’대로 반응한다.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어머니는 어머니처럼 염려한다. 코지모가 나무 위에 올라가 만난 세상은 다채롭다. 코지모의 첫사랑 비올라(신포로사)도 나무 위에 있다가 처음 만났고, 나무 위를 돌아다니는 어린 좀도둑들도 만났다. 나무와 새를 진정으로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비아조가 말한 것처럼 코지모는 은자(隱者)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물물교환도 하고, 숲에 불이 난 뒤로는 마을 사람들을 단결시켜 스스로 진화대(鎭火隊)를 결성하도록 고취시켰다. 그는 나무 위에 숨어 살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땅으로, 그러니까 사람들에게로 굽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배움을 게을리 한 적도 결코 없었기 때문에 많은 책을 두루 섭렵하고, 시대의 명사(디드로, 볼테르, 나폴레옹 등)들과도 교류했다.


  코지모의 독서와 관련해서 대조될 만한 인물은 ‘악명 높은’ 잔 데이 브루기이다. 코지모와의 만남  이후 그도 코지모와 마찬가지로 책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책에 빠져 지내는 바람에 그의 ‘역할’인 도적 두목의 일은 내팽개치게 되고, 부하들에게 등 떠밀려 마지못해 도적질을 하다가 예전 같지 않은 어리숙한 행동 탓에 체포된다. 그는 결국 사형을 당하는데,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을 때”조차 코지모에게 소설 <클라리사>(1784~85년에 발표된 새뮤얼 리처드슨의 서간문 장편소설)의 결말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이 목을 매단다고 하니 잔 데이 부르기는 “나도 그럴 건대”라고 말한 뒤 직접 사다리를 차고 죽는다.


  정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삼촌 카레가(코지모와 비아조의 삼촌으로 등장하는 에네아 실비오 카레가는 왠지 『반쪼가리 자작』에 등장하는 의사 트렐로니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러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트렐로니는 쿡 선장과 함께 바다로 돌아가는데 성공했지만 카레가는 터키로 돌아가려다가 회교도들의 칼에 목이 잘린다. 아마 그가 비밀거래를 마을 사람들에게 폭로함으로써 해안에서 습격당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제공했다고 여긴 듯하다.)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실의에 빠져 죽자, 코지모는 ‘디 론도 남작’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코지모는 “광적인 이야기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가 늘 결핍된 느낌이 들었다. “사랑을 모르고 다른 경험을 다 해보는 게 무슨 소용 있겠는가?(211쪽)” 이것은 비아조의 말이기도, 코지모의 말이기도 했다.


  코지모가 사랑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카를로스 3세에게 내쫓긴 귀족 가문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산다는 올리바바사에 간 코지모는 가문의 수장인 돈 프레데리코의 딸 중 우르술라와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둘을 결국 가르게 되는 다른 이유 때문에 흐지부지 끝난다. 국왕이 “관대한 사면”을 베풀어 프레데리코의 가문이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코지모는 나무에서 내려가지 않겠다는, “난 저항을 하고 싶소.”라는 말로 압축될 수 있는 그의 오래된 결심을 끝내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우르술라는 억지로 끌려간다. (그녀의 결말은 알 수 없다. 올리바바사에서 프레데리코를 선동한다는 이유로 코지모와 대결을 했던 예수회 신부 술피시오는 훗날 코지모와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코지모에게 우르술라가 수녀원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아조는 그것이 거짓말일 수 있다고 했다.)


  코지모와 비아조의 어머니가 죽고, 두 가지의 좋은 일 - 사실 그 중 하나는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인데 - 이 일어났다. 하나는 비아조가 결혼을 한 것이다. 형을 존경하고, 역시 형의 삶을 동경했지만 비아조는 보통 귀족의 삶을 살았다. 다른 하나는 코지모가 비올라와 다시 만난 것이다. 여후작이자 과부인 비올라는 코지모와 소위 ‘밀당’을 한다. 그런 그녀는 코지모에게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일부분”이었고, 그녀가 들려주는 다른 남자들의 이야기에 질투를 느끼게 된다.


  로맨티스트인 그녀는 분명 계몽주의자(소설에는 “볼테르주의자”라고 언급된다.)인 코지모와 많은 면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둘의 사랑 방식은 거의 완벽하게 어긋났고, 코지모는 그녀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그녀는 코지모가 너무 자주 질투심을 느끼는 완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둘은 비올라가 두 명의 기사 - 한 명은 프랑스인, 다른 한 명은 영국인 - 로부터 코지모의 사랑을 실험한 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관계를 끝냈다. 둘의 사랑에 대해서 비아조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모든 불만과 변덕은, 금방 절정에 도달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서서히, 절정에 이를 때까지 키워나가려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강한 갈망일 뿐이었다. 형은 이런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가 떠나는 순간까지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307쪽)


  코지모는 뼈아픈 이별 이후 거의 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전채, 비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 존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는데, 오직 동생 비아조만이 코지모가 추구하던 세계를 알고 있었다. 가령,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활동했지만 열의를 갖는 때와 그렇지 않는 때가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못 박았을 것이다. 그러나 비아조는 “많은 단체들 중 정의롭다거나 다른 단체와 완전히 구별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 때문에 형은 철저하게 자연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327쪽)”면서 그가 보편사회를 추구했음을 말한다.


  연이은 대격변의 시대에도 비아조가 알려준 코지모의 속마음은 그대로 드러난다. 대혁명의 여파로 옴브로사에서도 ‘불평 노트’가 작성되고, 마을 사람들은 “변화의 열망”을 갖게 된다. 결국 포도수확시기에 십일조를 거두러 온 경찰들이 포도를 담은 통 안에 거꾸로 처박히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자유의 나무’도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분노”를 외쳤다. 다행이도 그들은 진압되었을 때 주동자들이 도망쳤다고 주장하며 석방되었고, 언제나 그렇듯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결코 잡히지 않았다.


  칼비노는 코지모와 프랑스 혁명을 나란히 대비시키면서 이것 한 가지를 말하려는 듯하다. 진정한 혁명은 코지모의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충분히 관철된 후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혁명가들이 보수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형식주의자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352쪽)” 코지모의 글은 ‘죽은 글’이 되었고, 세상은 그가 원하는 보편사회를 등진 채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혁명은 끝나고,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왕정복고의 시대가 열렸다. 이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사람들을 지켜준 건 코지모였다.


  칼비노에게도 나폴레옹보다는 코지모가 더 바람직한 인물이었다. 그는 보나파르트가 코지모에게 이런 말을 해주길 내심 기대했던 것 같다. 이것이 코지모의 꿈이다. “당신 말이 맞았소, 시민 론도. 당신이 저술한 헌법을 다시 내게 주시오. 위원회에서도 통령 정부에서도 제국에서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당신의 충고를 내게 들려주시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자유의 나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전 조국을 구합시다!(360쪽)”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패퇴했을 때, 코지모는 파리로 향하는 러시아의 안드레이 왕자와 아주 잠깐 마주친다. 이렇게 프랑스와 러시아는 코지모와 무관한 사이인 것처럼 나무 밑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젊은이들의 이상과 빛과 18세기의 희망이 모두 재가 된” 19세기에 이르렀고, 칼비노는 비아조의 입을 빌려 그가 소설의 훨씬 이전에 독자들에게 미리 넌지시 던졌던 한 뭉텅이의 말을 다시금 상기시키도록 만든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세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며 세상 모든 것,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호의적이지 않은 세대의 출현으로 세상은 변해 버렸다. 이제 나무 위로 당당히 걸을 수 있는 코지모 같은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178쪽)


  그 코지모가 늙어 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여전히 뭔지 잘 모르겠는 코지모만의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사려를 발휘해 그를 보살피려고 했지만 이 기이한 인물은 최후마저도 환상적으로 끝냈다.


  나는 그 장면이 정말 멋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거의 운명처럼 나타난 한 열기구의 닻에 뛰어들어 그것을 잡고 열기구와 함께 대양의 한복판으로 사라져가는 모습. 이것은 극적이면서도 황당무계한 결말인데, 사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코지모의 최후, 칼비노가 비아조와 마을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코지모’다운 최후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노라.(374쪽)


  이것이 코지모의 비문이 되었다. 비문의 뒤로 옴브로사의 배경이 펼쳐지고, 그곳에 격동의 19세기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대로, 그 역시 펼쳐질 것이다. 코지모가 죽자 “옴브로사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나무를 사정없이 베어냈다. 타지에서 들어온 나무들이 옴브로사의 옛 나무들을 밀어냈고, 비아조는 옴브로사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변한 것 같았다고 했다. 야자수의 잎은 빈약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가히 ‘나무의 고장’이 됐을 법한 옴브로사의 상실이 무엇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지, 독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    *    *

 

 

  ‘우리의 조상들’ 3부작 중 유일하게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반쪼가리 자작』에는 두 개의 ‘해피엔딩’이 겹쳐 있었다. 메다르도가 본래의 모습으로, 그러나 한껏 현명해져서 돌아왔고, 트렐로니는 바다로 다시 떠났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는 비록 아질울포가 사라지긴 했지만 소설의 서술자임을 끝내 숨겨왔던 브라다만테가 랭보와 다시 만났고,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는 “이제 달라질 것이다.”라는 풍성한 의미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나무 위의 남작』에서는 사라져버린 이상과 여전히 존재하는 빈약한 현실 사이의, 그러니까 하늘로 사라져간 코지모와 땅에 남은 사람들의 일상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격차만이 오로지 확인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칼비노 특유의 낙관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코지모 그 자체이다. 사랑에 실패한 것은 분명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한 가지 불리한 이유(그러나 코지모가 볼테르주의자라는 것, 우르술라와의 이별, 그리고 비올라와의 파탄 등은 계몽주의가 낭만주의와 결합할 수 없다는 칼비노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소설 속 장치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가 되겠지만 그가 땅 위의 사람들에게 제시한 이상과 직접 헌신적인 행동으로 보여준 이상은 적어도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한 어떤 가치들을 생각해볼 때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칼비노가 그런 사람의 등장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가 희망하는 것은 우리의 열린 태도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의 의미에 대한, 우리를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정말 허황된 것도 같은 주장들이 나폴레옹과 코지모,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관계로 비유되는 것처럼 실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는 것. 이것이 바로 칼비노의 메시지이며, 또한 ‘환상’이라는 장르가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해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가 소설을 덮고, 이제 막 밝아오는 우수(雨水)의 나무들 사이에 혹시 코지모 남작이 앉아 있나 쳐다보게 된다면, 칼비노는 우리를 보며 웃어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의미를 찾아가고, 그렇게 아주 미세하게 바뀌어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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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1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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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8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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