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다 - 신선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인간 장자의 재발견
왕보 지음, 김갑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2013.09.06



  큰 수레가 다가오고 있다.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갈수록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코앞까지 굴러온 수레를 있는 힘껏 밀었다. 그러나 붙어보기도 전에 수레바퀴에 처참하게 짓눌려버렸다. 수레바퀴는 너무나도 컸고, 수레바퀴를 밀어보겠다고 호기롭게 덤빈 상대는 사마귀였기 때문이다. 이를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 한다. 옛날에 '안합'이라는 현자가 있었는데, 그가 '거백옥'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조언을 청했다. 안합의 고민은 자신이 새로 교육을 맡게 된 태자가 성품이 워낙 포악하다는 것이었다. 거백옥은 걱정하는 안합에게 사마귀의 예를 들어준다. 뛰어남을 뽐내는 순간 태자가 안합 당신을 죽일 것이니 경계하십시오. 안합은 기뻐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잔인했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정치판에서 살아남으려면 큰 수레바퀴를 피하는 사마귀가 되어야 했다.


  나에게는 이 사마귀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뒀다는 감상에 젖어 지난 대학생활을 돌아보면 사실 별로 인상에 남을 만한 공부는 하지 못했다. 대학에 실망한 이유도 있겠고, 대학공부를 무척 게을리한 이유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별 볼일 없게 생긴 수많은 자갈들이 즐비한 개울에서 아주 소중한 자갈 하나를 손에 쥔 것처럼 두 개의 단어를 대학에서 얻었다. 그 중 하나가 장자(莊子)이다. 사실 학점 때문에 한 학기 커리큘럼에 그냥 껴넣은 과목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기말 시험지에 장자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거의 모든 명사나 주요 문장을 한문으로 적어서 제출했다. 시험공부할 시간의 절반을 한문 외우는데 썼었다. 그만큼 한 학기 동안 장자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내가 20대에 만난 최고의 사상가다. 이런 생각에 이르니 30대에는 또 어떤 사상가가 마음 속에 자리잡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제 사설은 거두절미하고, 다시 사마귀 이야기를 좀 해보자. 당랑거철은 여러 문헌에 나오지만 장자(莊子)의 천지(天地)편에도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장자'하면 호접몽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강의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호접몽은 아주 짧게만 언급된다. 장자를 읽어보면 그가 어떻게 현실세계를 바라봤는지, 문자 그대로 '인간세(人間世)'를 어떻게 바라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절절하게 다가온다. 왜 장자는 현실을 절절하게 논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학자들까지도 장자의 비관적인 시선을 예로 들면서 그를 서양의 니힐리즘과 묶는다. 어쩔 수 없이 뭘 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말야." 이 문장의 단어 하나가 장자에도 나온다. 바로 '부득이(不得以)'이다. "멈출 수 없다."라는 뜻이다. 장자는 거스를 수 없다면 저항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당랑거철도 부득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 둘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장자는 디스토피아에 항복하는 초라한 사상가 정도로 비춰질 것이다.


  차라리 이러한 장자의 모습보다는 굴원(屈原)이 더 멋지지 않은가? 초(楚)나라의 대부였던 굴원은 간신의 농락에 넘어간 왕에게 애국했기 때문에 눈엣가시로 여겨져 양쯔강 이남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그는 '창랑(滄浪)'이라는 거센 물살에 몸을 던졌다. 마침 늙은 어부가 막 물에 뛰어들려고 하는 굴원에게 왜 그러냐고 묻자, 굴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노부이시여, 창랑의 물이 맑으면 저의 갓끈을 닦겠습니다만 창랑의 물이 더럽다면 저의 발을 닦겠습니다. 어부는 물이 더러우면 같이 더러워지면 된다고 조언했으나, 조언이 어찌 됐든 간에 굴원은 창랑으로 투신했다. 그 날이 5월 5일, 단오이다. 중국에서는 이 날이면 곡식을 강물에 뿌린다. 물고기들이 굴원의 시신을 쪼아먹지 못하도록 말이다. 굴원의 지조와 애국은 한문문화권의 많은 문인과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됐다. 그러나 내가 읽은 장자는 다름 아닌 늙은 어부였다. "대부님, 물이 더러우면 대부님께서도 함께 몸을 더럽히시구려." 장자가 거백옥의 입을 빌려 안합에게 한 조언과 똑같다.


  장자는 생각이 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권력에 가담하려면 권력에 물들어야 한다는 치졸한 '정치의 생리'를 조언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그가 「인간세」에서 한 말인데, 문단의 전문을 한 번 옮겨보겠다. 이 역시 거백옥이 안합에게 한 조언 중 하나이다.


  "무릇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광주리로 말똥을 받아내고 대합조개의 껍질로 말오줌을 받아냅니다. 그런데 어쩌다 모기나 등에가 달라붙어 있어서 갑자기 말등을 때리면 놀란 말은 재갈을 끊고 머리를 뒤흔들며 사육사의 가슴을 걷어차 부숴버리기도 합니다. 이는 말을 사랑하는 뜻은 지극하지만 말은 때때로 그 사랑을 잊기 때문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夫愛馬者,以筐盛矢,以蜄盛溺,適有蚊虻僕緣,而拊之不時,則缺銜毀首碎胸。意有所至而愛有所亡,可不慎邪)"


  사실 인간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가치는 고대의 사상가들이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혹은 초월자를 논하면서 뽑아낸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국지성 호우라고 비유하면 괜찮을까. 장자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비관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라고 숨김없이 말했다. 그러나 추측해보건대 아마 누군가가 장자에게 현실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고, 장자는 저런 식으로 대답해줬던 것 같다. 하지만 장자의 진짜 가르침은 구구절절 흘러가는 「인간세」가 아닌 「소요유(逍遙遊)」편에 있다. 인간세는 현실의 비관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장자의 비관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망원경인 소요유를 보면 비관적 현실로부터 멀리 날아오른 장자의 사유를 음미해볼 수 있다. 장자가 사유를 멀리까지 띄울 수 있었던 힘은 '비어 있는 마음', 즉 '허(虛)'이다. 배운 것도, 깨달은 것도 버리는 경지가 '허'이다. 유교와는 이 지점에서 전적으로 반대된다. 유교는 꽉찬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장자는 비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장자』에서는 빈 그릇과 빈 배가 강조되고, 겉모습을 상관하지 않는 신체장애자들, 예컨대 인기지리무신(절름발이에다가 꼽추에다가 언청이), 옹앙대영(목에 항아리처럼 큰 혹이 달린 사람) 등이 등장하여 고민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일화가 많이 있다. 때문에 「인간세」의 일면만을 보고 장자를 니힐리즘 철학자라고 규정하는 건 너무 섣부른 진단이다. 장자의 진면목은 현실을 통째로 역전시키는 힘에 있다. 장자는 그런 사유를 정말 잘하는 철학자였다.


  「소요유」는 그 자체로 풍부한 비유가 담긴 기이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장자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學習)'이라는 단어를 맨앞으로 빼냈다. 「소요유」는 장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인사이다. 짧게 요약해보면 이렇다. 옛날에 북쪽 검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었다. 엄청 큰 이 물고기는 붕(鵬)이라는 이름의 새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붕의 그 '붕'이다. 붕은 남쪽으로 간다. 즉, 북쪽의 곤이 붕으로 변신해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그 새가 날기 위해서는 마치 큰 배를 띄우기 위해서 많은 물이 쌓여야 하는 것처럼 날개 밑에 바람이 두텁게 쌓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적후(積厚)'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붕이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 많아야 한다. 붕을 사람에 비유하고, 바람을 우리가 도야해야 하는 인격, 혹은 장자가 말하는 도(道)라고 생각해보면 「소요유」에서는 「인간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장자의 광대한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장자 자신도 그런 생각을 매우 큰 것, 즉 현실의 논리가 되기에는 너무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물고기 '곤'과 새 '붕'의 등이 몇 천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크고, 붕이 날아오르는 높이는 무려 9만 리나 된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장자는 현실에서 날아오르기 위해 권력싸움의 모든 걸 털어버리는 것, 즉 '비우는[虛] 것'을 강조했다. 비록 정말 조언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권력에 물들라고 말해줬지만 말이다. (덧붙이자면 장자가 중니(仲尼), 즉 공자의 입을 빌려 공자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안회에게 가르친 '비움'의 조건은 거백옥의 입을 빌려 안합에게 한 조언보다 훨씬 장자답다. 하지만 그 '비움'은 이곳에 적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아서 생략했다.) 반면 「소요유」에서는 날개 밑에 바람을 '쌓아야[積]' 한다고 말한다. 비우는 것과 쌓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우리는 현상을 정확히 둘로 나누려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에 흡수되면서 지적된 것이지만 사실 현대과학의 놀라운 발견을 통해서 서양 스스로가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현상은 이어져 있다. 장자가 그걸 몰랐을리는 없다. 장자에게 비우는 것과 쌓는 것은 연속되는, 혹은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장자에게 있어 철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그 유명한 호접지몽이 나오는 그의 「제물론」 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생략하겠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是]'과 '저것[彼]'이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상이다.) 밭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아야 하는 것과 같다. 다음 해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가을의 열매를 거둬들여야만 한다.


  「인간세」에 대한 오독이 장자를 이해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인간세」에서 시작해 「소요유」로 거꾸로 읽는 방법으로, 학기가 끝난 후 다시 그간 배웠던 것을 복습했었다. 그리고 교수의 추천으로 산 왕보의 『장자를 읽다』를 나란히 놓고,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던 구절들까지 곁들여 읽으면서 전체적인 '장자'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려고 나름 끙끙 앓은 적도 있었다. 벌써 지난 겨울방학의 일이다. 한 겨울의 얼음판 위에서 크게 넘어지듯 나는 장자를 읽을 때마다 늘 삐그덕거렸다. 아마 누가 그 모습을 봤다면 난 정말 창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자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장자를 읽고 있으면 왠지 고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잔뜩 맞고 있는데,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더니 그 안에 따뜻한 손난로가 들어 있는, 그 느낌이다. 장자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니, 주변이 춥다는 것을 알 것 같다. 더불어 장자가 위안이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나'를 바꾸려고 한다. 세계는 크지만 우리의 세상은 작다.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세상을 놔두고, '나'를 세계만큼 크게 만드는 것이 장자의 '프로젝트'이다. 나는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발생시키는 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사마천은 장자가 옻나무 언덕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고, 짚신을 엮어 팔았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추정컨대, 장자는 굉장히 가난했을 것이다. 그의 행적은 『사기』에서도 별로 눈에 띠지 않을 정도로 (그것도 혼자 언급된 게 아니라 한비자랑 엮여서 기록된 것이다.) 초라했다. 인간의 역사는 그를 그렇게 봤다. 그러나 왜 우리는 오늘날에도 "장자, 장자"하며 그의 나비와 꿈을 운운하고, 도저히 머리를 굴려봐도 잘 모르겠을 '도(道)'와 '허(虛)', '덕(德)' 같은 것들을 언급할까. 도가(道家)는 노자(老子)의 "감춰진 덕"인 '현덕(玄德)' 때문에 흔히 검은 이미지로 회자된다. 나는 장자를 그 검은 도화지 위에서 뜨거운 열을 내는 한 줄기 빛에 비유하고 싶다.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공자를 자신의 이야기 속에 끼워넣는 위트를 지닌 사상가, 온갖 자연과 사물에서 나는 소리를 묘사하면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대해 논한 낭만적인 사상가, 도살자가 칼로 소고기를 뼈에서 도려내는 장면에서 자연의 길[天里]를 비유해냈을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사상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붙여 항간을 비판한 마음씨 따뜻한 사상가. 이런 사상가라면 살짝 마음을 기대도 되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장자』 중 가장 오래 마음에 새기고 싶은 구절이 「덕충부(德充符)」에 있어 그걸 옮기고 글을 맺고자 한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겉모습은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니, 이것을 정말 잊어버렸다고 한다.(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 此謂誠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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