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을 떠나 벌교를 접어드니 낙안읍성 민속마을 이란 표지가 보인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사라진 표지판으로 허둥지둥 각종 교통신호를 위반하며 겨우 도착한 민속마을. 마을을 둘러싼 성곽주위를 개나리, 유채꽃이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민속촌처럼 인위적으로 꾸면진 것이 아닌 초가집집마다 걸린 전깃줄, 빨래, 낮잠든 개...그런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는 정경이 오히려 정겨움이 더하고 있다.



가끔은 사전적인 의미보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더 가슴이 와 닿는 경우가 있다. "고즈넉하다" "정겹다" "아늑하다" 라는 말의 의미를 고개 끄덕이며 느끼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 잠시 머물다. 일반적인 전문 가게가 아닌 초가 대문을 밀고 들어선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장독대 옆에 다정스레 서있는 해맑은 표정의 인형들이다. 웃는 모습이 하회탈을 문득 떠오르게 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웃음지며 살았을까?

전통 민속놀이인 닭싸움이다. 부리로 눈과 머리를 공격하는 그들의 모습에 호기심으로 셔터를 눌렀으나 어느 순간 그로기 상태에 몰린 권투선수처럼 비틀거리는 모습에 측은한 기분이 들어 발길을 돌리다.
성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순간 어떤 소리가 발걸음을 잡는다.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땅콩 사세요"란 말이 다시 발걸음을 잡는다. 돌아본다. 언뜻 보아도 측은한 기분이 드는 한 소녀의 외침이다. 열살이나 되었을까 꾀죄죄한 모습으로 땅콩 자판앞에 서있는 소녀의 모습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그 또래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응석을 부리는 곳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다. 울컥~ 하는 기분과 함께 소녀의 모습만이 남는다. 다가가 먹지도 않는 땅콩을 한봉지 사고 돌아선다. 무슨 말을 해줄까도 생각했지만 그 또한 내가 지닌 말의 사치에 지나지 않을것을 알기에 그냥 돌아선다. 또 다시 들린다. "땅콩 사세요...." 차에 올라 음악을 크게 틀고 낙안을 떠난다. " 소녀여! 꿈을 꾸어요. 꿈을 잊지 말아요. 비록 지금은 힘들더라도 시간이 지난 어느날 지금의 자기 모습을 추억으로 간직할 그런 꿈을... 세상풍파에 부딪히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믿어줄 그런 꿈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낙안을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