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진다는 것은 어찌할수 없이 해이해짐을 동반한다. 그 해이함으로 인하여 여권을 분실하였다. 여행 초기 침낭 속에까지 넣고 잠이 들던, 잃어버리면 여행 끝이란 생각으로 소중히 다루던 여권이었다. 중국 생활 6개월, 몸에 배기 시작한 익숙함은 내가 외국인이라는, 여권이 이 나라에서 나를 증명할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을 잊게 만들었나보다. 분실신고를 위해 찾아간 공안국 직원이 나에게 "헌 마판(겁나게 귀찮을꺼야)" 이라고 말할때만 해도 이리 귀찮은 행보가 이어질지 몰랐다. 북경의 한국 영사관 - 천진 공안국 - 저장성 근무지로 이어지는 장거리 루트를 따라 여행 아닌 여행을 하게 되었다. 북경 - 천진간 3차례 고속철도 왕복, 천진-상해간 1차례 기차 왕복, 북경-항조우 1차례 기차 편도, 버스를 탄 구간을 포함한다면 대략 8000KM에 윽박하는 거리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는 아니더라도 해저 이만리에 버금가는 거리이다. 지금 신규 발급 여권은 천진 공안국에서 거류허가 대기중이니 미친 척하고 직접 받으러 올라간다면 엄마 찾아 삼만리도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리 귀찮은 행보도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여행이라 생각하고 다녔는데 최고의 기차 여행은 상해-천진간 19시간 완행이었다. 원래는 상해-단동간 36시간 완행이지만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천진이 종착이었다. 인도여행시 탄 델리-자이샬메르 구간도 19시간이 걸렸지만 침대칸이었다. 이번 기차는 잉쪼우(딱딱한 의자)인데 말 그대로 딱딱한 의자에 2명/3명 앉아 가는 기차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외국인은 나 혼자인듯 싶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윗통을 벗고 카드를 치는 중국인부터 노트북 영화를 빙 둘러싸고 마치 동네 하나뿐인 티브이를 보는 모습을 연출하던 중국인까지 기차안의 풍경은 나름 흥미로왔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문화를 접하더라도 멈춘듯 흐르지 않는 시간은 지겨운가 보다. 졸리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여도 시간은 죽은듯 멈추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준 건 가끔씩 멈추어서던 역사뿐이었다. 해질녘 도착한 역사는 중국의 베네치아 수조우였고, 한밤중 단잠을 깨운건 일본 제국주의 학살의 현장 난징이었다. 겨우 잠이 들었다 깬 아침 나를 맞이한건 타이샨이었고, 다시 돌아오던 길의 아침 나를 깨운건 호수도시 항조우의 아침 햇살이었다.   

음,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럴때가 아닌듯 하다. 여권이 없는 지금 공안의 검문이라도 받는다면 철창 신세를 져야할지도 모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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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5-29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헉
정말 말도 안되게 귀찮네요! ㄷㄷㄷㄷ
말도 안되, 말도 안되;;;;;;;
잉크냄새님 몸생각도 하셔야지ㅠㅠ 19시간 앉아서 가는 기차라뇨! ㅠㅠ 제 허리가 다 아파옵니다. 휴.. 특히 중국은 아무리 가도 창밖 풍경이 다 똑같다던데; (정말인가요??)
여튼 고생하세요.. ㅠㅠ
중국은 뭐든간에 스케일이 다르구만요 ㅎㅎ

잉크냄새 2010-05-29 09:17   좋아요 0 | URL
귀찮죠. 뭐, 다 제가 저지른 일의 결과니까 받아들여야 하지만요.
중국 기차는 허리는 안 아픈데 엉덩이가 아프답니다. 옆에서 밀치고 들어오는 중국인 엉덩이 방어도 쉽지 않고요.ㅎㅎ
중국 기차 풍경은 제가 동부만 다닌것이라 뭐라 말씀 드리기 힘드네요. 인도만큼 다채롭지 못한것은 사실입니다.

2010-06-02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2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