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의 앞선 흐름을 알린다

최성일|도서평론가 robli@freechal.com

지난 6월 4일 오후, 2007 서울국제도서전을 보러 코엑스를 찾았다. 예년에 비해 도서전에 참가한 단행본 출판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공짜로 얻은 특별기획전 <한국현대사와 함께 한 우리 책 1945-2007>의 안내책자 몇 군데가 눈에 거슬린다. 양성우 시인의 시집 『겨울공화국』이 실천문학사에서 1977년에 나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실천문학사는 1980년대 설립된 출판사다. 나는 화다에서 펴낸 『겨울공화국』을 갖고 있는데, 이 시집은 그 전에도 출간된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안내책자에 소개된 실천문학사 판 『겨울공화국』은 세 번째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창작과비평> 복간호(1988년 봄호)가 창간호 표지를 대신한 것은 성의 부족에다 작지 않은 편집실수다. "문우출판사/복간호(제16권 제1호)"는 번지수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내심 아는 출판계 인사 서넛은 만나겠지 생각했는데, 두 시간 남짓 전시장에 머무는 동안 10명이나 마주쳤다. 도서출판 승산의 황승기(61) 대표와는 구면이다. 2000년 봄 복직한 <출판저널>의 첫 특집 '수학을 읽는다'의 한 꼭지로 그와 인터뷰를 했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수학전문 신생출판사 대표와의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승산은 과학전문 출판사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출판사 설립 초기, 학원가의 유능한 수학강사였다는 황 대표의 이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 망했습니다"
최성일(이하 최) 지금까지 펴낸 책은 모두 몇 종인가요?
황승기(이하 황) 정확히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거의 팔구십 종 될 걸요.

최  "안 망하겠다"라는 다짐을 지키셨습니다.
황  내가 그 얘길 다른 사람한테도 했어요. 과학책 붐을 일으키겠다는 뜻입니다.

최  '파인만의 빨간 책'이라 불리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1,2권을 번역 출간하셨는데요. 1권 '역자후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책은 설명 방식이 너무 독창적이어서 다른 참고 서적을 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황  2권의 번역자는 1권을 혼자 번역한 박병철 선생까지 8명입니다. 이 가운데 7명은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을 번역하자고 '물리사랑'이라는 사이트에서 의기투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번역 판권이 누군가에게 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꿩 대신 닭이라고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번역하자고 했어요. 그 책의 판권 역시 나갔다는 거예요. 우리가 다 갖고 있었거든요.
그 중 한 친구가 어느 출판사에 판권이 있는지 물어봐도 에이전시가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더구나 『엘러건트 유니버스』는 국내 에이전시가 아니었거든요. 이 친구가 승산이 갖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내게 전화로 문의를 해왔어요.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번역하겠다고 제안하기에 1권은 번역이 진행 중인 상태여서 2권을 맡겼지요. 책이 워낙 대작이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번역에 참여했으면 싶었지요.
2000년 무렵만 해도 물리학 교양서의 입지가 지금보다 훨씬 좁았어요. 혹독한 겨울이나 다름없었지요. 그 당시 내가 이 사람들한테 물리학에 관한 책을 한 스무 권 펴내 물리학책의 붐을 일으키겠다, 그것도 양자역학 쪽을 하겠다고 했더니 아무래도 못 미더워하는 눈치예요.
내가 누굽니까? 돈키호테잖아요. 나는 자신했습니다. "좋은 책만 만들어선 소용없다. 팔리고 읽혀야지. 좋은 책을 만들어도 못 팔면 기여한 게 없는 거다."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느냐? 출판사로선 대중적이고 쉬운 책을 선호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야 책이 많이 팔린다고 믿고 있거든요. 하지만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어떤 내용에 깊이 빠져들 때만이 연구와 학습이 제대로 되거든요. 나는 그전까지 출판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육이 정말 잘못된 점은 교육당국과 학부모, 그리고 출판이 아이들을 만물박사로 만드는 데 골몰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태를 바꾸는 것을 출판의 목표로 정했지요. 그러려면 내용이 어느 정도는 어려운 데까지 들어가야 한다고 본 거죠.
책이 진정으로 독자를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의 수준은 돼야 한다는 거죠. 물론 번역과 편집의 완성도가 높아야 합니다.
이 책 저 책, 이런 분야 저런 분야를 다 하긴 어렵습니다. 처음엔 수학 쪽에 관심을 가졌다가 물리 쪽으로 폭을 넓혔습니다. 수학은 추상적입니다. 물리는 자연현상을 다룹니다. 양자역학의 세계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응시할 수 있는 자연현상이어서 이해하기가 더 낫다고 본 거지요. 요즘 다시 수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물리학과 출신들이 양자역학에 대해 잘 몰라요. 뿐만 아니라 이공계 출신과 지식인층에서도 양자역학은 아킬레스건이에요. 이런 걸 해소하기 위해 관련서를 와장창 내자는 거지요. 그래서 『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2001)를 낸 거예요. 이 책은 60년 전에 나온 겁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 전파과학사의 '전파과학신서'로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승산에서 펴낸 수학·물리 교양서
도서출판 승산은 출판등록을 하고 1년 6개월 만에 첫 책을 냈다. 폴 호프만이 지은 수학자 폴 에어디쉬 전기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1999)가 승산의 첫 책이다. "이 책은 순수 수학의 흥분, 열광, 통찰, 그리고 수학에 미친 한 인간의 아름다운 몰두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에어디쉬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었다. 수학교사 중에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 책은 예술가와 전문직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수학의 해' 즈음하여 출판한 실비아 네이사의 『아름다운 정신』(2000)은 실제로 정신분열증에 시달린 수학자 존 내쉬의 생애를 다룬다. 책을 두 권으로 나눈데다 촌스런 표지 탓인지 몰라도 별 재미를 못 봤다. 러셀 크로우가 내쉬를 연기한 영화의 국내개봉에 맞춰 재출간했을 때 비로소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뷰티풀 마인드』(2002)는 두 권을 한 권으로 묶어 양장 제본하고 원제목과 영화제목으로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QED강의』(2001)는 다른 출판사를 통해 '숨은 질서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것을 재출간하면서 본문 편집과 표지디자인에 공을 들여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다음은 황승기 대표가 전하는 독자 반응이다. "병원에 입원한 여자 친구 간병하면서 다 읽었다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정작 물리학과 출신들은 불만이 있더라고. 양자역학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일반인을 위한 강의가 어떻게 가능하냐며."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2002)와 『우주의 구조』(2005)는 시각이 서로 맞선다. '초끈이론은 절대적이다'와 그렇지 않다로. 데이비드 린들리의 『볼츠만의 원자』(2003),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2004), 갈릴레이의 천문노트 『시데레우스 눈치우스』(2004) 등도 눈여겨봐야 할 책이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 사이에는 묵직한 책들을 내놨다.

황승기 대표는 "안톤 차일링거의 『아인슈타인의 베일』은 제목에 아인슈타인이 들어있지만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다룹니다. 독일어로 나온 원서를 번역했는데 영어판은 아직 안 나왔어요"라고 말한다.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의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는 "정보 개념이 어떻게 물리학의 열역학에서부터 생물학의 유전까지 다양한 원리들에 빛을 비추는지 보여준다."

존 더비셔의 『리만 가설― 베른하르트 리만과 소수의 비밀』과 마르쿠스 듀 소토이의 『소수의 음악― 수학 최고의 신비를 찾아』는 짝을 이룬다. 더비셔의 책은 번갈아가며 읽는 형식이다. 홀수 장은 수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면서 독자가 리만 가설을 수학적으로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게 돕는다. 짝수 장은 리만 가설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수학자들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이 책에는 리만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량의 수학만이 실려 있다. 이보다 더 간단한 수학으로 리만 가설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 리만 가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서문'에서) 『소수의 음악』은 수학의 성배 뒤에 숨겨진 놀라운 역사와 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흥미롭게 펼쳐보인다.

최  이런 책들의 주된 독자층은 누굽니까? 어떤 사람들이 승산에서 만든 책을 읽고 있나요?
황  독자서평 외에는 독자의 반응을 알 수 있는 피드백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는 잘 모릅니다. 똑똑한 중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교수, 연구원 들과 열독력 있는 문과출신까지가 주 대상이 됩니다. 특히 소설에 식상한 사람들이 우리 책을 좋아합니다. 독자들의 저변과 독서 풍토가 그리 삭막하지만은 않습니다.

파인만 책은 다 내겠다
최  출간목록에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비중이 높은데요.
황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이야기』(2003)는 처음부터 예감이 좋았어요. 이건 된다 싶었지요. 그런데 걸림돌이 없지 않았어요. 판권은 살아있지만 다른 출판사에 우선권이 있었어요. 다행히 그 출판사는 이 책에 관심이 없었어요.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저작권을 가진 미국 출판사에서 실적을 요구하는 거예요. 아직 책을 한권도 안 낸 상태였는데 말예요. 판권 계약만 진행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잘 할 수 있다" 했더니 "안 된다" 하진 않고 "지켜보겠다"는 응답이 왔어요.
에이전시를 통해 아무리 사정을 말해도 막무가내예요. 그러면 좋다, 너희에게 판권이 있는 파인만 책을 다 하겠다고 했어요. 거기서 펴낸 파인만 책을 다 계약하자 해도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니 누가 판권을 가져가면 어쩌나 얼마나 불안해요. 책이 나오는 대로 책을 보내줘도 함흥차사인 거예요. 그로부터 정확히 3년 뒤 오케이 사인을 받았어요.
의욕이 생겨서 파인만에 만족하지 않고 파인만의 라이벌인 겔만의 전기 『스트레인지 뷰티』를 낸 거예요. 이 책은 손해를 많이 봤어요. 겔만은 우리나라에도 한번 다녀갔는데, 흥미로운 것은 겔만의 전기에 나오는 물리학자와 파인만의 전기 『천재』(2005)에 등장하는 물리학자가 얼마 겹치지 않아요.
내가 봐서 좋은 책은 독자도 좋다고 인정하더라고요. 독자의 수준이 아주 낮은 건 아닙니다.
의외로 '어려운' 책을 이해할만한 독자가 꽤 있습니다. 우리가 콘텐츠를 잘 선택해서 책을 만들면 되겠더라고요. 비유하자면, 찐빵의 팥소 같은 책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책을 스무 권 정도 확보하면 어떤 중요한 흐름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최  번역할 책을 어떻게 고르시나요?
황  대부분 아마존www.amazon.com을 통해서 한다고 보면 됩니다. 에이전시를 거치는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아마존이 출판하는 사람을 살려줘요. 나도 한때는 아마존을 끼고 살았어요. 판매 예측이 가능하거든요. 원서가 잘 팔린다면, 번역을 잘못하지 않는 한 번역서도 십중팔구는 꽤 나간다고 봅니다. 문과 학문은 어떤지 몰라도 이공계 학문은 세계 공통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아마존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잘 활용해야죠.

최  10년 가까이 출판을 해보니 어떠세요. "출판사는 절대로 하지 말라"던 주변의 만류가 옳았습니까?
황  해보니까 그 사람들은 나를 위해 좋은 이야기를 해준 거더라고요. 그것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됐나 하면, 그 사람들은 선의로 만류한 거잖아요. 내가 돈키호테 기질이 있는데 심사숙고하게 해줬지요. 결과론적으로는 출판을 잘 했다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충고가 보탬이 된 듯해요.
아무튼 이 길에 정말 잘 들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을 살리고 싶어서 출판을 시작했거든요. 우리가 안고 있는 교육문제는 현행 교육체제 아래선 해결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보다시피 아주 엉망이잖아요. 다른 분야는 발전해도 교육 분야는 늘 뒤처져 있지요. 개인적으론 학원 강사로 일하고 학원을 경영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잘 되던 학원을 왜 접었나, 학원과 출판을 겸업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최  승산은 어린이책도 펴냅니다. 역시 분야는 과학이고요. 그런데 최근 출간된 '논술 쑥쑥 어린이 인권여행' 시리즈는 분야가 다르네요.
황  우리가 '문과'를 안 한다는 게 아닙니다. 콘텐츠만 좋으면 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상 과학의 비중이 높고 그것에 전력을 다하는 겁니다. 어린이책을 이왕 시작했으니 내지 않을 순 없는 거지요. 또 출판사가 한 달에 한 권은 펴내야 하는데 지난해엔 책을 몇 권 못 냈어요. 출판사 웹 사이트 만드느라 편집 진행 중인 책에 신경 쓰느라. 상대적으로 제작기간이 덜 드는 어린이책을 내야겠다 싶었지요.
시행착오를 겪고 난 지금은 어린이책이 꽤 선전을 하고 있어요. 우리의 경우, 계절적으로 성인책의 판매가 부진한 오뉴월에는 어린이책이 커버를 해줍니다. 어린이책에서 빠져나오려 생각했지만 안 빠져나온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출근해서 보면요. 매출도 매출이지만 책이 몇 권 나갔느냐가 굉장히 기분을 좌우합니다. 어린이책은 권수라도 많이 나가요. 그런 날에는 일할 활력이 솟구치지요. 그런 의미에선 어린이책 내기를 아주 잘 한 것 같아요.

수학공부, 하려면 제대로 하자
최  새 교육과정에서 수학교과의 비중이 낮아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  수학교양서를 내는 출판사로서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점은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목이 많다는 거예요. 나는 모든 사람이 수학을 다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체능을 하는 사람은 수학의 비중을 줄여줘도 되요. 그 대신, 줄인 비중이나마 제대로 된 수학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일주일에 두 시간 수업을 받아도 제대로만 한다면, 그 수학교육이 음악을 하거나 미술을 하거나 또 다른 예술 활동을 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음악, 미술 하는 애들까지도 문과와 같았어요. 요즘은 안 그렇지만. 그런데 얘들은 날마다 대여섯 시간 음악, 미술 실기를 해야 합니다. 언제 영어공부하고, 언제 수학문제 풉니까? 그들이 하는 영어와 수학은 정상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없지요. 나는 모든 사람이 영어, 더구나 수학을 다 해야 한다는 데에는 찬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해도 좋고, 한 해도 좋아요. 하지만 수학을 해야 할 사람은 수학을 줄여선 안 되지요. 단, 이 경우에도 많이 하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그러면 수학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 당장 써먹을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수학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력 형성입니다. 사고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차원 높은 사고력을 유발하고, 고차원의 사고력이 결과적으로 고도의 판단능력을 제공해주며, 창의력에까지 연결됩니다. 우리 수학교육은 이런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수학교육이 교육을 망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본연의 길에서 벗어난 수학교육은, 다시 말해 수학을 잘못 가르치면 창의력과 사고력을 배양하기는커녕 다 짓밟게 됩니다. 차라리 수학교육을 안 받은 사람이 나아요. 수학의 진정한 길을 가면 수학하는 것이 다른 문과에까지, 소설 쓰는 데까지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지금처럼 하는 수학교육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최  그럼, 수학을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황  수학의 기본 개념과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수학교육의 현실은 수학을 잘 하는 학생들도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풀이과정 자체를 외우는 형편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두세 시간이나 하루 이틀, 심지어 일주일 넘게 붙잡고 끙끙거리며 푸는 게 아니라 풀이과정을 외우는 데 급급한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도 문제를 풀 수 있으니까요. 아시아 지역에선 풀이과정을 노출하지만, 미국 쪽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사가 수학을 잘 가르치느냐, 못 가르치느냐의 여부를 떠나 교육시스템부터가 다릅니다.

논술대비는 독서가 최선
최  저는 대학입학 논술시험은 변별력에 문제가 있을뿐더러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판단하는 잣대로도 부적합하다고 봅니다. 앞서 말씀하셨듯이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고, 여기에 더하여 대학입학 응시자의 수학修學 능력을 가늠하고자 한다면, 정규교과와 대입에서 수학의 비중을 높이는 게 더 옳아 보입니다.
황  미국의 고등학교에선 학생에게 에세이를 많이 쓰게 하잖아요. 그걸 본뜬 겁니다. 미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작문 연습을 철저히 합니다. 영어시간, 곧 미국의 국어시간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에서도 에세이를 써내라 하지요. 대학입시에서도 에세이를 써서 제출해야 하잖아요. 한국에서 지원하는 학생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만, 자기가 써내라는 거 아닙니까. 또 우리는 논술과 독서의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책을 먼저 읽어야 마땅하지만 논술을 막 때려버리니까 수험생으로선 요점을 정리한 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수학교육의 문제점을 이야기하자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수학책이 어려워야 신뢰를 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풀 줄 아는 선생을 존경합니다. 대입 본고사 시절에는 일본 도쿄대학 입시문제를 풀어줘야 했어요. 이런 심리가 우리에게는 잠재해 있습니다. 학원, 과외, 개인지도 등이 모두 공부 잘하는 학생의 수준에 맞춰져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끌고 가다보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까? 어려운 문제만 풀어서 수학적 사고력이 길러지고 수학문제를 잘 푼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허우적거리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는 전체적인 체계를 잡아서 자기 힘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은 절대 안 생깁니다. 그러기에는 고등학교 3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짧습니다.

저번 인터뷰에서 황승기 대표는 수학 잘하는 방법을 귀띔해 줬다. 첫째, 문제의 답과 풀이과정을 보는 것은 금물이다. 단, 교과서에 예시된 비슷한 유형의 풀이과정은 참고해도 된다. 둘째, 교과서를 차근차근 15번 이상 읽는다. 또 그는 "학생들이 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는 것으로도 수학교육은 혁명이 이뤄지며, 학생들이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 같은 책을 한 권만이라도 제대로 소화하면 논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실전을 통해 터득했다"고 한다.

도서출판 승산은 향후 2-3년간의 출간 일정이 잡혀있다. 대체로 현대물리학의 앞선 흐름을 다룬 책들이다. 그 가운데 세 권을 황승기 대표의 설명을 토대로 살펴보면, 『The Road to Reality-A complete Guide to the Laws of the Universe』는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의 역저다. '우주의 법칙'이 부제인 이 책은 수학에 높은 비중을 둬서 학문의 근본부터 트위스트이론까지 다룬다. 누프양자이론의 창시자인 리 스몰린Lee Smolin은 입자이론의 '세 갈래 길'로 초끈이론, 누프양자이론, 트위스트이론을 든다. Peter Woit의 『Not Even Wrong』은 초끈이론을 비판하는 책이다.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이 서문을 쓴 줄리언 하빌Julian Havil의 『Gamma: Exploring Euler? Constant』는 오일러의 상수, '감마'를 본격적으로 다뤘다.

기사게재 : <기획회의> 203호 기획회의가 만난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홉 살 난 아들 녀석의 장래희망이 로봇과학자이다. '휴보'니 '아시모'니 하는 로봇 이름을 주워섬기고, 로봇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고, 학교 특기적성 수업인 로봇공학 시간을 일주일 내내 기다린다. 로봇에 대한 사랑을 품어보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그랜다이저, 아톰, 이겨라 승리호 등 만화영화 속의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에 열광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면 로봇과학자를 꿈꾸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역할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이가 바로 로드니 브룩스일 것이다.

현재 MIT 인공지능 연구소(현재는 컴퓨터과학과 통합된 CSAIL)의 소장인 그는 답보 상태에 있던 인공지능 연구에 물꼬를 트고, 더 나아가 주류의 물길마저 돌려놓은 패러다임 개척자였다. 선편으로 과학 잡지를 받아보는 데 3개월이 걸리는 호주의 벽지 출신의 소년이 쟁쟁한 세계적인 천재들을 제치고 한 분야의 우두머리로 우뚝 선 이야기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드라마이다. 또한 '룸바'라는 청소 로봇으로 글자 그대로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온 성공적 사업가라는 경력은 하고픈 일을 하면서 세속적 보상도 누릴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이공계 지망생들의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스탠퍼드 대학교 인공지능 연구소(SAIL)에서 로봇공학자로서 경력의 첫발을 내딛은 브룩스는 그곳에서 오늘날 로봇 분야의 리더 중 한 사람이며 기이한 상상력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가득한 한스 모라벡을 선배로 만나 그의 연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도왔다. 모라벡의 연구가 대표하듯 당시 로봇 연구는 기계의 연산장치를 통해 3차원적 세계의 내적 모델을 구성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계획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실 인공지능 초창기에는 높은 수준의 인지적 활동에 모든 관심이 모아졌다. 그 결과 체스나 미적분, 대수 문제, 수학 증명 등 가장 고차원적인 인지 활동에서 인간의 능력에 필적하거나 그 수준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지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쉬운 작업들, 컵과 의자를 시각적으로 구분하기, 장애물을 피해 방안을 돌아다니기, 두 발로 계단을 오르내리기 따위의 활동에서 연구자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바로 여기에서 브룩스는 과감하게 허를 찌르는 전법을 내세운다. "내적 모델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 어렵고 소모적이라면, 그 내적 모델을 없애버려라!"가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상세한 내적 모델의 구축 없이 지각과 행동을 직접 연결해 버렸다. 수많은 천재적 인공지능 연구가들이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려고 노력할 때 브룩스는 지능 진화의 역사에서 지질학적 시간 단위를 거슬러 올라가 곤충 수준의 지능에서부터 다시 출발한 것이다. 그가 '캄브리아기 대탐험'이라고 부른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자 자신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꼽는 징기스Gengis는 곤충을 모방한 6족 보행 로봇이다.

브룩스는 그 어떤 장애물도 기어올라 넘어서며 집요하게 사람을 쫓아다니는 로봇의 특성 때문에 징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 그의 지도학생들은 징기스의 친족 뻘 되는 쌍둥이 곤충 로봇, 아틸라와 한니발을 만들어낸다. 비록 브룩스 자신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이름들이 그의 연구와 그 자신의 행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고하고 콧대 높은 서구 국가들을 침략해 들어와 정교한 문명을 짓밟고 풍비박산 낸, (서구인의 기준으로 볼 때) 단순무식하고 야만스러운 이민족(몽골, 훈, 카르타고)의 수장, 징기스, 아틸라, 한니발…. 브룩스의 혁명은 바로 이들의 정복 사례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브룩스는 주류 연구자들로부터 많은 반발과 배척을 받았고 반 세대쯤 앞선 인공지능의 거두 마빈 민스키는 기회 닿을 때마다 브룩스 이래로 판을 치고 있는 이 '작은 로봇들'에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1989년 발표한 브룩스의 논문 제목 '빠르고 값싸게, 그리고 통제 없이'는 인터넷 상에서 일종의 언더그라운드 구호로 퍼져나갔고 그가 직접 출연한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그는 대중과 소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학자였다. 로봇을 다른 행성으로 실어 보낼 연구를 진행할 때는 관련 아이디어를 영화화해 판권을 할리우드에 팔거나 기업의 광고로 활용해서 연구비를 댈 궁리를 했다. 로봇 장난감을 상품화하기 위해서 세계 곳곳의 장난감 회사들을 발로 찾아다니며 제조, 마케팅 등의 경영기법을 제대로 배워나갔다. 너무 상업주의적인 것 아니냐고? 맞다. 엄청 상업주의적이다. 그는 기질적으로 학자이기에 앞서 발명가이고 사업가이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 소개란에 레이 커즈와일을 가리켜 '에디슨의 적자嫡子'라는 인용을 실었는데 그렇다면 커즈와일과 로드니 브룩스는 친형제 뻘 되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커즈와일과는 뚜렷한 반목을 드러낸다. 브룩스는 의식을 기계에 다운로드해 불멸을 실현한다든지 인공지능과 로봇이 엄청난 부와 풍요를 가져다 준다든지 하는 커즈와일, 모라벡, 민스키 등의 테크노 유토피아적 미래 예측에 냉소를 보내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브룩스와 다른 과학자들, 특히 민스키와의 미묘한 관계는 재미난 관전 포인트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역시도 ―로봇들의 아버지답게― 궁극적으로 로봇이 감정과 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렇다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도 기계일 뿐이라는 철저한 유물론과 지적, 도덕적 상대주의가 결합한 결과이다. 이런 것을 보면 과학의 엄밀한 분석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온갖 가설과 추측이 비온 후 잡초처럼 무성하게 돋아나고, 사람들은 결국 각자 자기 취향대로 믿고 싶은 것을 믿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룩스라는 인물에 무조건 찬사를 보낼 생각은 없다. 사실 학계를 정복한 그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오랫동안 왕좌를 지킬지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다. 어쩌면 그의 연구방향이 어디선가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고, 그가 조소했던 경쟁자들이 더 큰 광맥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땅에 발을 굳게 딛고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저자가 쓴 과학책을 읽는 것은 독자로서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이다. 나처럼 로봇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태권브이에서 졸업해버린 사람들도 이해하기 쉬울 만큼 친절하며 태권브이만큼 설레고 재미있는 로봇 이야기라고 감히 장담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7-07-27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네파벨님의 기고로군요!^^

딸기 2007-07-2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지금 시간이 좀 없어서... 이따가 다시 들어와서 찬찬히 읽어볼께요. :)
 

마음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오늘날 과학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문제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문제를 꼽지 않을까 싶다. 인간 존재의 정수인 마음에 대한 호기심은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주로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인 우주와 자연을 탐구하던 과학이, 신화와 종교, 철학과 문학의 영역에 속했던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달려든 것은 최근의 일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대중에게 열린 무대의 중앙에서 집중 조명을 받으며 지능, 의식, 자아, 자유의지 등의 흥미로운 주제들을 놓고 설전을 벌이고,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기꺼이 그 공연의 티켓을 산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자신만만한 제목을 붙인 이 책은 스티븐 핑커라는 스타 과학저술가의 연출에 컴퓨터과학, 인지과학, 진화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철학 등 매력적인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어 흥행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주제는 실로 방대해서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읽다 지쳐 베고 자기에 딱 좋은 1000쪽에 가까운 부담스러운 분량임에도, 저자는 지면이 모자랄까 두려운 듯 쉴 새 없이 밀도 높은 정보를 나열한다. (핑커의 글에서 아쉬운 것이 바로 여백의 미, 강약과 완급의 리듬이다. 저자로서 그는 분명 훌륭한 선생님이지만 굴드나 도킨스처럼 멋진 글쟁이, 마음을 사로잡는 웅변가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빽빽한 정보의 숲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잃지 않으려면 중심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핑커는 마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를 '지능'의 문제와 '의식'의 문제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지능의 정체는 더는 신비가 아니며, 인지과학으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았다. 그런데 재킨도프와 블록은 의식의 의미를 다시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자아' 개념 또는 자기인식 능력이다. 둘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대비되는, 접근 가능한 정보 또는 단기기억의 내용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의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각력'이라는 의미의 의식이 있다. 핑커는 의식의 이 세 측면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역시 오늘날의 과학 연구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결국 마지막 '감각력'의 문제가 남는다. 색조, 소리, 냄새에 대한 느낌, 통증과 같이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없는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은 왜, 어떻게 생겨났을까? 기계나 동물에게도 감각력이 있을까? 물리적인 뇌에서 어떻게 이런 신비스러운 현상이 빚어지는 걸까? 이는 생각할수록 심오하고 사람을 목마르게 하는 문제다. 토마스 헉슬리는 이 현상을 램프를 문지르면 거인이 나타나는 것만큼 신비스러운 일이라고 불렀고, 철학자 맥긴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에 비유했다.

핑커는 영리하게도 그 답을 책의 맨 마지막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마음을 역설계해 온 과학의 성과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는 계산주의 마음이론과 진화생물학을 결합시킨 진화심리학을 마음 설명의 기본적인 틀로 삼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마음이란 연산 기관들로 구성된 하나의 체계이며, 그 연산 기관들은 식량채집 단계에서 인류의 조상이 부딪혔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선택이 설계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계산주의 마음이론을 다루는 2장은 비록 다른 부분에 비해 어렵고 참을성을 요구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에 큰 무게를 더한다. 그 동안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 힘들었던 인공지능의 기초가 되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지각을 다루는 4장과 사고 과정을 다루는 5장에 소개된 실험과 연구들은 인간의 인지 과정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나가는 노력이 얼마나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인지 실감케 한다.

감정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6장 '다혈질'에서는 섬뜩하게도 얼마 전 우리를 경악시킨 버지니아텍 사건과 같은 총기 난사범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다.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행동도 자세히 보면 수없이 반복되어 온 보편적인 현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나름대로 냉철한 논리가 감추어져 있으며, 진화적 근거를 지닌다고 한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빌려온 '둠스데이 머신' 이론이다. 협상, 경쟁, 대치의 상황에서 상대방을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설득 또는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은 갈 데까지 갈 수밖에 없는 장치를 스스로 장착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의 한 속성으로 진화되어 왔다. 그리고 광분하여 이성을 잃은 사람은 작동에 들어간 둠스데이 머신과 같다. 이 장에서는 그 밖에도 다양한 감정의 진화적 맥락을 소개한다. 7장은 친족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에 기초한 인간의 다양한 관계들에 대하여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8장은 단순한 생물학적 목표를 뛰어넘는 인간의 독특한 특성인 예술과 유머감각, 종교 등을 다룬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줄곧 진화심리학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인 자세를 보인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견해인 표준사회과학모델(SSSM)에 대항하여 혁명적이고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 진화심리학이 마치 골리앗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다윗과 같은 처지라는 인상을 심어 준다. 그런데 6-7장에 걸쳐 소개되는 진화심리학은 상당 부분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본 친숙한 내용들이다. 그 이유는 원서와 번역서 사이에 10년이라는 세월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에서 핑커의 이름을 널리 알린 『빈 서판』보다 이 책이 몇 년 앞서 태어났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화심리학은 우리의 마음을 설명하는 주류 이론으로 자리 잡았고,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주장들로 가득한 이 이론은 과학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 빠르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한편 그 세월 동안 이 책에서 다루는 분야들에도 적잖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대한 현대 과학 이론의 종합인 이 책은 독자들에게 유용한 지침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 책의 맨 마지막 부분까지 꽁꽁 감추어놓았던 감각력 문제에 대해 핑커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그걸 밝힌다면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말하지 않겠다. 개인적으로 핑커의 결론과 그에 이른 논리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상관없다. 비록 의식의 주관성 문제가 일종의 미끼와 같은 역할을 했더라도, 그 미끼에 낚여 방대한 이 책을 읽어낸 경험은 즐겁고 유익하고 뿌듯한 것이었기에.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7-06-22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커의 대표작인 '빈 서판' 꽤 재미있게, 그러나 중간중간 참 지루하게 읽었어요.
이 책도 꼭 보고싶긴 한데 아직 '언어본능'도 책꽂이에 꽂아놓은채 그대로 있네요.
아무튼 땡스투 해놓습니다. ^^

군자란 2008-01-0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빈서판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핑커의 언어본능과 마음...은 책두께가 만만치 않아서 걱정도 되고 역자는 빈서판과 같긴한데 구매하기가 걱정됩니다.비슷한 이야기가 아닐지... 액수가 장난이 아닌지라....

이네파벨 2008-01-0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란님, 빈서판은 읽고 언어본능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요.....

이 책(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은 솔직히 빈서판보다는 많이 지루한 느낌이었습니다.

크게 보아 "인지과학"쪽 이야기(계산주의 마음이론)와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야기인데...
"인지과학"쪽은......교양으로 즐기기에는 무...척...딱딱한 내용이구요. (사실 분야 자체는 엄청 매혹적인데 이 분야의 교양과학서가 많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는....10년전에 나온 책이라 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내용들이거든요.

그리고 핀커의 글쓰는 스타일은 딱~ 제게 어필하지는 않는 편이어서....^^
(나름대로 중간중간 유머를 상당히 구사하는데도...전반적으로 지루해요...ㅠ.ㅠ 리뷰논문 읽는 느낌을 주는...)

사실 책 추천이라는게...그동안의 독서이력, 관심사, 스타일 등을 모르고 추천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러운데요...개인적으로 이 책은 좀 안읽혔습니다. ^^;;

군자란 2008-01-08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작년 가을부터 주로 도킨스나 굴드책들을 즐겨보다가 최근 로버트 라이시와 매트 리들리의 책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한쪽분야를 지겨울 정도까지 읽다가 지칠때까지 계속하는게 저 자신도 편집증 증세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정도입니다. 아뭏튼 감사합니다. 혹 재미있는 진화심리학관련 책들있으면 권해주시면 .......

이네파벨 2008-01-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란님 반갑습니다...
제가 사실...진화심리학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어요. 진화심리학책을 다룬 책 가운데 제가 무척이나 좋아한 책은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이구요...
(군자란님이 말씀하신 로버트 라이시가 로버트 라이트의 오타가 아닌지요? 저 이 작가 아주 좋아해요. 그의 날카로운 유머...매력만점!...그의 책을 제가 출판사에 제안해서 한 권 번역하기도 했죠. 아마 올해 안에 출간되지 않을까...생각하는데...)
그리고 제가 번역한 책 중 <섹스의 진화>라는 책이 있는데...이것도 진화심리학에 대한 책이죠. 저자가 제러드 다이아먼드인만큼..역시 재미있게 잘 쓴 책입니다.
(번역은 부끄럽지만요.)
<도덕적 동물>이 주로 진화심리학중에서 이타주의, 도덕에 대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섹스의 진화>는 성에 초점을 맞추었구요...
그밖에는 딱 진화심리학을 주제로 하는 책은...떠오르는게 없네요.
사.실.은. 저의 개인적인 입장을 밝히자면....진화심리학 자체를 약간 회의적인 시각으로 꼬나보고 있거든요.
다윈의 진화론이 역사상 최고의 통찰이자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과학철학 이론이라고 해서...
단지 "진화"를 끌어다붙인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검증할 수 없는" 가설과 이론들에 "진화"의 세례를 준다고해서
그것이 다른 가설보다 더 강력하거나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듯한...
(한마디로 진화심리학이 "유행"을 타는 듯한) 풍토에 약간 거부감을 느끼거든요...

"심리학"은...hard science와 달리...재현가능한 실험으로 검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미묘하고 논쟁적인 주장들을 덮어놓고 믿거나 인정하는건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때 떠받들어졌던 프로이트의 이론들이...나중에는 뭇매를 맞고(역시 너무 심할정도로 말이죠.) 거의 유사과학, 사이비과학, 사기꾼 취급마저 받게된 사례도 그렇구요...

스키너의 주장들도 그렇구요...

진화"심리학"에도 회의적, 비판적 시간을 견지하려고 하는 것이 저의 입장이랍니다...
(ㅎㅎㅎ 그렇다고 그쪽 책을 안읽는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진대...그냥..유행하는건 별로 안 쳐다보는 약간 삐딱한 성질머리때문에...^^)

군자란 2008-01-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네파벨님 말씀 감사합니다. 현재 진화심리학에 대한 님의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이타적유전자,도덕적동물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데이비드 버스에 욕망의 진화란책을 읽어볼까 하다가 거기에 나온 리뷰들을 보고 너무 남녀의 성심리 중심이 아닌지 해서 조금 망설여 졌습니다. 제가 즐겨읽고 싶은 책들은 굴드나 도킨스처럼 제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좀더 다른 진화론의 색다른 접근방법을 이야기하는 책들입니다. 예를 들면 로자님이 작년에 타임(?)지에 게재된 커버스토리 '절망의 진화(로버트 라이트)'에서 찾고 싶었던 우리 주위 풍경을 알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엄청나게 빠르게 진행되는 시간들 문화들 생활등.....이런 사회에서 우리 갖고 있는 사고체계가 따라가지 못해 생긴 갖은 적응지체현상들, 그로인해 생긴 각종 정신질환, 스트레스로 생긴 비상식정인 사고체계들, 등등등....이런 부분에 대한 대안들이 궁금하기도 하구요...

군자란 2008-01-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이네파벨님의 섹스의 진화를 오늘 새벽부터 해서 저녁까지 다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어 오늘 아들래미 병원갈때도.병문안갈때도 차안에 놓고 읽다가 병원에서는 제목이 좀그렇잖아요??? 구석에 짱박혀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이네파벨 2008-01-29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군자란님....
그 책을 읽으셨군요....제가 감사드리고 싶네요...
번역한지 오래되어서 사실 내용이 가물가물한데...
책이 마음에 드셨어야 할텐데...걱정입니다...
좋은 책과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아드님이랑..주위에 아픈 분들이 계신가봐요...병원다니는거 참 괴로운 일인데...모두 빨리 쾌차하시길 빕니다.)

군자란 2008-01-3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말하기는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사실 정말 번역은 너무 매끄러워 재미있게 읽었답니다.사실 저는 저같이 외국어에 젬병인 사람은 술술 읽게 만드는 이런 책하나로 정말 즐거운 하루가 되는 것 같습니다.지금은 욕망의 진화를 시간나는 대로 읽는데 재미는 있는데 회사일때문에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 이쪽 색다르고 즐거운 책있으면 너무 남녀 성심리에 치우친 소재 말고 다른 쪽 소개 해주시면.....

Isle 2008-02-12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진화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심리학과 학생입니다.
애초에 음악지각과 인지에 있어서의 'Nature vs. Nurture'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가 매트 리들리와 스티븐 핑커를 알게되었고, 진화심리학에 대한 관심에까지 이르렀네요...;

오늘 학교 도서관에서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 버스의 마음의 기원 : 진화심리학,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를 앞부분만 조금씩 읽고 왔습니다. 아쉽게도 폐관시간이 된데다가, 이미 빌려놓은 책이 많아서 빌려오지도 못했지만요...

제 판단으로는 진화심리학에 대해 알려면 버스나 핑커의 책을 먼저 읽는게 낫겠다 싶어서 서평들을 검색하던 중이었는데, 운 좋게도 여기에서 좋은 글을 읽고 가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네파벨 2008-02-1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란님, 답글이 너무 늦어서 죄송~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저도 사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살아요~
그나마 요즘 짬내서 읽은 책들을 서재에 올리려고 마음만 먹고 있습니다.
책 얘기 많이 나눠요~

Isle님 심리학을 전공하시다니...부러워요. 참 흥미롭고 연구할 것, 공부할 것이 무궁무진한 분야인것 같아요. 게다가 학생이시니...
음악지각과 인지...라는 부분도 무척 흥미롭네요. 좋은 책 저에게도 많이 알려주세요~
 

흥미로운 지적 모험을 위한 유용한 여행안내서

원고 의뢰를 받고서 많이 고민했다. 과학책 몇 권 번역했을 뿐인데 과학 분야의 '전문가 리뷰'를 맡아도 되는 걸까? 난감했다. 나는 과학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과 애정을 품어왔다. 나에게 과학은 우리 삶을 더 풍요하게 해주는 경이로운 선물이자,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낳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지적 활동이며,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 활동이 빚어낸 지고의 아름다움이다. 사실 나는 과학 활동에 담긴 땀과 눈물, 괴로움과 쓴맛은 피해가며 오롯이 과학의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부분만을 즐기는 딜레탕트적 과학애호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같은 취미나마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도 어쩌면 의미 있겠다 싶어 감히 과분한 책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에게 있어서 과학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고민이 자연스럽게 가 닿은 책이 바로 이 『과학으로 생각한다』이다. 과학과 인간, 과학과 세계,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저자들이 펼쳐놓은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양자 이론, 괴델, 튜링, 분자생물학으로 구성된 1장을 읽어나가면서 '이크, 책을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어본 듯 진부하고, 발을 물에 적시지조차 않고 표면만 살짝살짝 스쳐 지나가는 소금쟁이의 모습처럼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초중고생 논술대비 참고서류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시 접어두고 조금 더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과학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2장에 들어서면서 나의 경박한 선입견은 구름처럼 걷혔다.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새로운 세계, 지식의 블루오션이 눈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이 장은 마흐, 비트겐슈타인, 비엔나 모임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 포퍼, 파이어아벤트, 라카토슈 등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 과학을 논의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제각기 다르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규정하고 과학의 사례를 통해 지식을 추구하고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자기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벽이 느껴지곤 했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도 결코 이해하기 쉽거나 친근한 것은 아닐 터인데 저자는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친절하고 흥미롭게 핵심을 전달해주고 있다.

2장이 다소 난해하고 도전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면 그 다음 이어지는, 도킨스, 윌슨, 데닛, 굴드와 르원틴을 통해서 진화론이 세계관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논의하는 3장은 전혀 다른 템포와 리듬으로 배턴을 받는다. 한 사람, 한 사람, 워낙 유명하고 흥미로운 인물들인데다 이 부분을 쓴 저자의 맛깔스러운 글 솜씨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4장에서는 다시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로 돌아와 쿤, 해킹, 라투르, 갤리슨, 사회구성주의 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역시 토머스 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소한 인물들이었다.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사, 과학사회학 등 과학 자체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이들 학문은 내가 그동안 품고 있던 과학에 대한 막연하고 모호한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조차 주었다. 5장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헤친다. 앞서 논의한 과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우생학 사례, 보편주의, 집합주의, 무사무욕, 조직적 회의주의를 과학의 규범이자 에토스라고 주장한 과학사회학자 머튼, 현대 과학 정책에 깊은 영향을 준, 과학을 사회의 도구로 규정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버널과 과학 활동 그 자체에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폴라니의 논쟁 등이 여기에서 다루어진다.

그 다음,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진 '소칼의 속임수'에서 촉발된 '과학전쟁'은 소설처럼 극적인 흥미를 유발하는데다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수리물리학자인 앨런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쓴 글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엉터리 논문을 한 인문학 저널에 출판하고 또 다른 인문학 저널을 통해 자신의 속임수를 폭로한 사건이었다. 소칼의 의도는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퍼뜨리고 과학의 객관성을 부인'하는 과학학자 포함 인문학자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다. 과학자와 과학학자들 사이의 골 깊은 갈등을 드러냈지만 이를 계기로 양 진영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통합을 모색한다. 학제를 뛰어넘는 통섭이 강조되는 시대 풍조 속에서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앎에 대한 길은 결국 하나로 통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과학과 페미니즘, 과학에서 여성이 처했던, 그리고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상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특히 부각되었지만 논쟁적 주제들에 대한 저자들의 차분하고 공정한 시각이 돋보인다.

이 책의 제목은 '과학으로 생각한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과학으로 생각하기'에 해당되는 주제와 '과학을 생각하기'에 해당되는 주제들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과학자들이 생산한 담론을 중심으로 과학이 삶과 세상을 어떻게 설명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다루는 주제들과 과학의 경계 바깥에서 과학을 대상으로, 과학 그 자체에 대해 숙고하고 성찰한 주제들이 마치 탁구대 위에서 공을 주고받듯 펼쳐진다. 좀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과학 안쪽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시선과 과학 바깥쪽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이는 책의 부제인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에 함축되어 있듯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Drawing Hands'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면 과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메타과학 활동 자체가 자기지시적이고 회귀적인 호프스태터적 세계의 한 사례처럼 느껴진다.

각설하고, 짤막짤막한 글로 많은 수의 인물과 사상을 소개한 이 책은 입맛을 돋우는 요리들을 조금씩 담아놓은 애피타이저 접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 한 권으로 배부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한 항목에 멈추어서 그곳으로부터 더 깊이, 더 멀리 탐험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좋은 여행안내서가 될 거라 확신한다. 각 항목의 말미에 실린 '더 읽어볼 만한 자료들'은 유용한 팁이 될 것이다. 또한 애피타이저로 훌륭한 요리솜씨를 보여준 저자들이 만들어내는 메인 요리를 맛보고 싶어진다.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빼어난 솜씨를 살려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난해한 주제들을 재미있게 소개하는 본격적인 책들을 기대해본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기 2007-06-22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획회의'라는 곳에서 저한테 실은 의뢰가 왔었어요.과학책 리뷰 해주면 안되겠냐고. 그런데 저는 도저히 능력도 시간도 안 될 것 같아 거절했는데, 지금 이 리뷰를 보니깐 거절하길 정말 잘했군요! 제가 이렇게 잘 쓸수는 없었을테니. ^^

2007-06-22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7-06-26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네파벨님, 번역하시는 줄은 알았는데 과학분야 번역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혹시 무슨 책 옮기셨는지 살짝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궁금해서요. ^^

이네파벨 2007-06-2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요 서재의 마이 리스트에........제가 번역한 책들을 좌르르 엮어놓았답니다. 얼마 안되어요...(부끄부끄)
번역했는데 아직 빛을 못보고 있는 책이 댓권 되구요....암튼 초라한 서재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딸기 2007-06-27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어어어어억!!!
에덴의 용을 번역하신 분이로군요!
우와아아 영광이어요. 지금 제 책상 위에 있어요!
두달 전쯤 다 읽었는데 아직도 리뷰 정리를 못하고 있거든요.

딸기 2007-06-27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러드 다이아몬드 책도 번역하셨군요! 우와아...

영어 엄청 잘하시나바여... (살짝 주눅 모드...)

이네파벨 2007-06-2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무신 말씀을....
그냥 저도 과학책을 다른 어떤 분야보다 좋아하다보니 인연이 되어 계속 이쪽 번역을 하게 되고..그러다보니 과분하게 좋은 저자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딸기님 보기에 부끄러운 번역이 아니어야 할텐데...자신없네용...ㅠ.ㅠ

딸기 2007-07-0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다니요!!! 다음에 또 재밌는 과학책 번역하시면 알려주세요, 꼭 볼께요.
 

 

리뷰 쓰기 위해 공부하듯 읽은 책...

 

 

 

 

짬짬이 재미로 읽은 책....




<You are surely joking Mr. Feynman>

-> 큰 애 낳을때 병원에 1주일 입원한 동안 읽고나서 7년만에 다시 읽은 책....재미있다. 주로 가방에 넣고다니면서 아이 기다리거나 짬이 날때마다 읽고 있다. 절반쯤 읽은 상태.........

갑자기 파인만에 꽂혀서 주문한 책...사실 예전부터 별렀던 책이다. 앞부분만 살짝 들춰본 상태...

 

 

 

 

4월 초에 번역원고를 넘기고 지금까지 쉬고 있다. 쉬면서 책을 실컷 읽어야지 했는데...애계...고작 두권 읽고 두 권 읽다 말았다니........실망이다. 4월 내내 몸이 아프기도 했고...번역을 내려놓더라도 주부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다......책도 짬짬이 손에 들긴 했지만.........저 무지막지한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는데 거의 보름이 걸린 듯....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7-05-0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핀커를 읽으셨군요. 재미도 무지막지한가요?^^

이네파벨 2007-05-0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재미에 대해 말하자면....^^a
저는 솔직히 핑커의 글쓰는 style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강약, 완급 없이 다다다다다다다 정보를 쏟아놓는 느낌이랄까요...꽤 빈번하게 재치와 유머를 버무려 넣었음에도...글이 매력이 별로 없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는...재미있을 만한 부분(진화심리학)은 이미 꽤 알려진 이야기들이고 (이 책이 10년전에 나온 책이니) 새로운 부분(계산주의 마음이론..인공지능이라고 해얄까요? 그리고 인지과학과 실험심리학 연구내용)은...꽤...읽기 어렵고 쩜 지루합니다...(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야임에도 대중에게 많이 안알려진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죠^^)

하지만 그 지루함(?)을 보상하고 남을만큼 유익하고 보람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2007-05-13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5-14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