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509쪽에서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라고 쓴 샌드위치 광고판을 둘러쓰고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종말이 임박했다”라든지 “심판의 날이 온다” 따위의 말로 사람들을 위협하며 종교를 전파하는 광신도의 모습을 패러디한 것이리라. 인공지능 분야의  선도적 연구가, ‘커즈와일 신시사이저’를  비롯하여 걸출한 발명품을 여럿 내놓은 발명가, 수많은 기업을 일으킨 성공한 사업가, 지적 깊이와 폭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상가인 레이 커즈와일은 과연 과대망상에 빠진  기술낙관주의의 광신도일까? 아니면 어수룩한 사람들의 눈앞에 첨단과학이라는 마법 모자에서 가짜 토끼를 꺼내는 일종의 지적 사기꾼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 진짜로 선견지명을 지닌 현인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이 두꺼운 책을 펴들었다.

 

그가 임박했다고 말하는 ‘특이점’은 무엇일까? 원래 특이점은 수학에서 어떤 수를 0으로 나눈 값이라든지, 물리학에서 블랙홀 내의 밀도와 중력이 무한대인 지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커즈와일이 말하는 특이점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이다. 그러니까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가는 기술 발전의 그래프에서 기울기가 무한대에  가깝게 뻗어나가는 지점이 되겠다.

커즈와일은 특이점이 도래한다는 근거로 단기적으로는 무어의 법칙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의 발전 추이를 제시하고 장기적으로는 지구와 인간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진화의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우주 만물은  질서와  정보가 축적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과거에는 DNA와 뇌의 신경패턴이 정보 저장과 질서 창조의 주역이었으나, 이제 그 주도권이 기계와 기술로 서서히 넘어가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 인간 지능과  기계 지능이 융합되는 시기를 거쳐 궁극적으로 둘 사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온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패턴이  지적 과정과 지식으로 포화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본다.

그 같은 미래 예측의 거시적 틀 안에서 구체적인 뼈와 살을 붙여나갈 증거들은 GNR, 즉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의 연구 성과에서 찾는다. 그의 예측에 따르면 유전학 또는 생명공학의 발달로 질병과 노화가 정복되어 인간의 수명이 놀라울  정도로 연장될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에 기초한 수명 연장과 삶의 질 향상은 나노기술의 혜택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정도에 불과하다. 분자수준에서 활동하는 나노봇이 탄생하면 우리 몸속을 돌아다니며 손상된 기관과 조직을 복구하고, 신경계에 작용하여  가상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 한편  포글릿이라는 나노봇의 무리가 자유자재로 온갖  사물을 창조하고 변화시키게 되어,  사실상 모든 물리적 현실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나노봇은 환경문제와  에너지문제를 해결하고 굶주림과 빈곤을 퇴치하며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로봇공학은? 로봇공학은 인공지능, 생물학적 지능의 한계를 넘어선 초지능, 궁극의 지능을 의미한다. 엄청난 혜택과 위험을 지닌 양날의 검 같은 나노기술을 비롯한 미래의 첨단 기술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기계지능의 도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커즈와일의 이런 주장은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까? 나는 그의 주장의 학문적, 기술적 측면을 분석할만한 입장은 못 된다. 나노기술이나 로보틱스 쪽은 문외한이고, 생명공학 기술에 대해서도 비전문가이다. 다만, 몇 년 전에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의학, 생물학 관련 기사를 번역한 일이 있는데 그때 접했던 수많은 연구가 이 책에서 낙관적 기술진보 사례로 인용되었음을 목격했다. 그 연구들의 상당수는 임상시험 승인조차 나지 않은 갓 돋아난 새싹 같은 단계일 뿐인데 전도 유망하고 현실적인  대안인 양 부풀려 포장한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사실 나노기술에 대한 커즈와일의 전망은 1986년 에릭 드렉슬러가 『창조의 엔진』에서  내놓은 주장에 그대로 기댄다. 그런데 드렉슬러의 주장은 1986년에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 나노미터 수준의 미세한 구조를 다루는 현실적인 나노기술과 분자제조니 나노봇이니 하는 궁극적 나노기술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마치 오늘날 커즈와일이 만든 여러 기계들에 적용되는 ‘약한  인공지능’과 인간 이상의 사고하는 능력을  지닌 기계를 일컫는 ‘강한 인공지능’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버티고  있듯이. 그가 강한 인공지능의 출현을 지지하는 근거는 나노튜브, 3차원 분자 연산, 양자 연산 등 새로운 연산 패러다임이 도래해 하드웨어의 연산 용량이 인간의 뇌 수준을 뛰어넘게  될 것이고, 또한 인간 뇌의 역분석을 통해 자기조직적이고 카오스적인 뇌의 특성을 구현하는 소프트웨어가 기존  소프트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이론적  기반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 같은 세계는 적어도 아직은 이론과 몽상에 속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커즈와일은 기하급수적 발전에 의한 ‘수확 가속의  법칙’이 마치 마법의 양탄자 같이  이런 몽상과 현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를 테크노유토피아 세계로 데려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 예측은 그 미래가 오기 전에는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커즈와일은 자신만만하게도 구체적인 시기까지 못 박는다. 나는 그가 틀릴 것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겠다. 설사 기술 발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뻗어나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사회, 제도, 관습, 심리적 장벽 등은 같은 속도로 발맞추어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공정하게 주의를 기울였다고 보기 힘든, 첨단 기술의 비관적이고 위험한  측면들 역시 발전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한편 마음 깊숙이에서 나는 그의 예언이 맞기를 바란다.  그가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한 해리 포터의 세계, 어린 과학자 톰 스위프트의 세계, ‘충분히 발달한 기술이 마술과 구분되지 않는’ 모험과 낙관주의로 충만한 세계야말로 너무나 되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의 꿈이 아니던가! 내가 ‘성장’이라는 관문을 거치며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추방당한 그 세계를 커즈와일은 바위 같은 의지력과 마법사 같은 능력으로 꽉 붙들고 지켜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커즈와일이 괴짜라고 하더라도 외톨박이는 아니다. 과학기술계의 엘리트들, 세계에서 가장 명석하다고 할 사람들이 이 해괴한 신념을 종교처럼 믿고 있다. 누가 알랴? 그들이 우리보다 한 발짝 먼저 미래를 살고 있는지….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기획회의 11월호, 전문가리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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