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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평점 :

교수도 학생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지방대 시간강사 현실을 리얼하게 끄집어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방시)> 김민섭 저자의 신작 <대리사회>.
<지방시>이후 바깥으로 나온(밀려난) 그는 이제 대리기사를 하며 겪는 다양한 통제들을 보면서 이 사회 전체가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에 불과하고, 그 누구도 온전히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사유하지 못함을 깨닫게 됩니다.

읽는 내내 코끝이 시큰거리네요. <지방시> 출간 이후의 속앓이라든지 대리기사 초보자가 겪는 좌충우돌. 그 과정에서 분노를 함께 터뜨리기도, 함께 공감하고 웃기도 하면서 읽었습니다.
<지방시>를 내부고발식으로만 보며 공감해주지 않던 동료들에게서 벗어나 결국 대학을 그만둔 김민섭 저자. 8년의 시간강사와 1년 3개월의 맥도날드 알바 투잡을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오히려 대학 바깥에서 찾게 된 그는 더 이상 대학에 남아있을 수 없었어요. 읽는 저도 덩달아 착잡한 심정이지만 그래, 그깟 대학 잘 나왔어!하며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밀려나고서야 물러서는 법을 배운 부족한 한 인간은, 다시 타인의 운전석에 앉을 준비를 한다. 이제 다시는 괴물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이다." - 책 속에서.

<대리사회>는 우리는 과연 주체성을 가진 온전한 나로서 존재하는가의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대리기사를 하면서 타인의 운전석에 앉는 순간 개인의 주체성은 바로 통제되는 상황을 겪습니다. 핸들, 브레이크, 엑셀 이외에는 건드리면 안 되는 '행위'의 통제, 차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말'의 통제,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영혼 없이 운전만 하는 '사유'의 통제를요.
문제는 운전석에서 내려도 여전히 '대리'라는 단어에 묶여있더라는 겁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잊어간다는 거죠. 나/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그것. 주체적 사유를 하지 못하는 대리인간을 만들어내는 이 사회 시스템을 생각해봅니다. 2015년 초 읽었던 르포르타주 사진집 <변경 지도>가 생각났습니다. 이 사회가 만든, 중심으로 가고자 하지만 밀려난 것/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당시 성석제 소설가의 <투명인간>과 함께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거든요. 이 책 <대리사회> 역시 주제가 쭉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부모, 교사, 직장 상사 관계에 모두 퍼져있는 '순응'.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을의 공간에서 순응에 익숙해지면 운전석에서 내려도 각인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 속에서 '대리국민'을 만들어내는 거고요. 2016년 11월과 12월 현재 우리는 대리국민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는 중입니다.

대리운전 노하우 터득 중에 겪는 에피소드는 무게감 조절하며 웃음 짓게 하기도 합니다. 대리기사용 어플에 뜨는 콜 알림을 보자마자 수락과 거절 버튼을 실시간으로 판단해 눌러야 하는데 쉬려고 한 날이었음에도 일명 대박 지역이 뜨자 '이건 꼭 가야 해!' 하며 몸이 먼저 반응하기도 합니다. 진상 손님, 좋은 손님 별의별 손님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무서운 손님이 있었다는데 차 브레이크가 잘 안 잡힌다고 하더니 진짜였다고... ㅋㅋ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 책 속에서.
책임질 가정이 있는 만큼 아내와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절절했어요. 건강보험 같은 사회적 안전망조차 없는 대학 노동자의 삶을 사면서 가족 모두가 힘들었습니다. 부모, 아내, 아이에게까지 본인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아줄 것을 강요하고 부탁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하면서요. 고난의 시간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보다는, 상처를 주고받기 이전에 소중함과 감사함을 나누는 가족관계를 희망합니다. 대리기사를 하는 지금이 오히려 더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하고요.
"사회는 우리를 '대리인간'으로 만든다. 나아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한다. 그러한 대리사회의 욕망은 결국 모두를 집어삼키고, 주체로서의 자리 역시 빼앗는다." - 책 속에서.
대학의 꼰대에서 거리의 아재가 되어 이 사회가 말하는 노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노동은 그저 영혼착취를 하는, 노동자가 아닌 '대리인간'으로서만 존재하는 '대리노동'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의 주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아니라는 거죠.
<대리사회>를 읽으며 '노동'의 의미와 노동을 하는 '나'의 존재를 생각해봅니다. 대리사회 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 같지만, 밀려나면 그제야 보인다고 합니다. 그는 밀려났지만 우리에게는 물러서라고 합니다. 패배, 잉여가 아닌 주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죠. 그때부터 우리는 사유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가는 주체가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으니 올겨울의 촛불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의 주체로 자리할 수 있음을 몸소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다시 대리국민으로 되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