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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의 띠지에 쓰여진 말인 일본의 출판 잡지인 <다빈치>에서 무려 7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고 쓰여진 것을 보면 미야베 미유키는 일본 내에서 꽤 유명한 작가인 듯하다.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인 <이유>나 <인생을 훔친 여자>는 사회파 미스터리라 그런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우리나라에서는 되려 나긋나긋한 문체로 연애담을 다루는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같은 여성작가가 인기있을 뿐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미야베 미유키는 국내 독자들(특히 미스터리 독자들)에게 다가오고 있고, 개인적으로 앞으로 더 많은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을까하는 기대되는(혹은 바라는) 작가 중에 한 명이다. 그런 그녀의 작품인 <용은 잠들다>는 분명 어떤 기대치를 갖게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1992년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이 책은 지어진지 무려 10년 이상 지난 작품이긴 하지만 다행히 이전에 내가 읽어온 그녀의 작품과는 달리 시대적인 면과는 긴밀한 연관이 없어 거부감없이, 그리고 흡입력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야기는 거센 폭풍우가 쏟아지던 밤의 일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잡지사 기자 고사카는 차도에서 한 소년을 태우게 된다. 그 소년의 이름은 이나무라 신지. 자전거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는 소년은 비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마침 지나던 고사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둘은 조금 지나 노란 우산만 남긴채 맨홀로 사라진 초등학생 실종사건에 얽히고, 신지는 고사카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사람, 혹은 물건에 손을 닿는 것만으로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며 맨홀 뚜껑을 연 사람에 대한 정보를 풀어놓는다. 못미덥기는 하지만 신지의 말대로 고사카는 그들의 자취를 밟아가고 범인들을 찾아가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이 후, 고사카에게 오다 나오야란 남자가 찾아와 신지는 사기꾼이라 한다. 하지만 신지는 나오야 또한 자신과 같은 사이킥이라고 하고, 고사카는 그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고사카에게 날아오는 의문의 백지 협박 편지. 이야기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의문 투성이인데...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연한 만남, 파문, 과거로의 여행, 불길한 징조, 어둠 속에서, 사건의 전말.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사이킥'이라는 초능력이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라는 물음에서부터 우리가 그것을 믿어도 좋을 것인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거짓으로 치부해버려야 할지,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등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정상적인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그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이킥'도, 주변인물로 등장하는 '벙어리'도 모두 '정상'적인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뭔가 능력이 부족하거나, 과한 사람들. 그들은 정상인의 영역에서 살짝 벗어나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며 겉모습은 정상적으로 보인다해도 그 속은 뒤틀려 '비정상'적인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사이킥을 우상하지도, 신봉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일반 사람들이 느끼는 딱 그 정도로 사이킥에 대해 생각한다. '오호. 신기한 능력이구만. 나도 그런 능력이 한 번 있어봤으면 이럴 때 편하겠는데' 이런 정도. 하지만 그녀는 되려 사이킥의 입장에서 서서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 것들을 알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면 어떻게 할 거죠? 보이잖아요? 들리잖아요?"라고 하며 그들의 삶의 어려움(혹은 고달픔)에 대해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려한다. 또 "우리는 각자 몸 안에 용을 한마리 키우고 있다. 어마어마한 힘을 숨긴, 불가사의한 모습의 잠자는 용을. 그리고 한 번 그 용이 깨어나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 밖에 없다. 부디, 부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무서운 재앙이 내리는 일이 없기를, 내 안에 있는 용이 부디 나를 지켜주기를, 오로지 그것만을"라고 하며 사실상 우리도 알게 모르게 어떤 능력(용)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단지 그 용이 잠을 자고 있는가, 깨어나있는가만 다를 뿐. 그 용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손 밖에 있는 일, 우리의 몸을 빌려 나타나지만 우리가 조종할 수 없는 독립적인 일이라는 것. 만약 내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그 상황을 이어갈 수 있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신지와 나오야처럼 그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까.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 속에서 신지와 나오야. 너무도 닮은 두 소년의 사이킥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 잇달아 오는 백지 협박 편지의 진실, 그리고 신지와 고사카를 연결해준 폭풍우 치던 날 초등학생 실족 사건의 진행, 고사카의 과거와 현재의 얽힘에 관한 이야기 등이 기름칠도 잘 되어 있고, 어디 빈틈없이 잘 맞물려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 정상과 비정상. 과연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그리고 과연 우리는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까. 띠지에 쓰여진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 읽었다면 이제 미야베 미유키다!'라는 광고문구는 다소 과장되어 보이긴 하지만(둘의 글은 소재도 다를 뿐더러 이야기 방식도 다르지 않은가) 미야베 미유키의 힘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