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둑싹둑 잘려가는 머리카락에

마음이 철렁, 하면서도 묘한 쾌감 같은 게 느껴졌다.

이상할까봐 걱정되는 마음 반,

이제껏 보지 못한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 거라는 기대감 반.

그것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설레임.

 

숏컷을 한번 해봐야지 맘 먹은 게 벌써 몇 년 전.

난 안 어울릴 거야. 그냥 짧은 단발로 할까.

수많은 고민과 생각의 시간들을 거쳐

정작 결심하고

미용실을 찾아가고

머리를 자르는 데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으면서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오랜 숙원사업을 푼 것 같아서

속이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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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0-22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숏컷으로 자르셨나요. 흔히들 그러잖아요. 머리 자르는 건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때 하는 거라고. 안 좋은 일 없이 무사히 지내셨죠~?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10-23 14:49   좋아요 0 | URL
그냥 한번 과감해져보고 싶어서요 :)
 

 

*

가을볕은 봄볕과는 다르다.

서른 넘게 살면서 처음 알았다.

아침에 창으로 스미는 햇살이 그렇게 눈부실 수가 없더니

가을이 되니 어스름하게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어른어른하다.

해가 점점 짧아지는 거야 당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빛의 투명도와 강약과 빛깔이 저리도 다르다니.

 

 

내가 늘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고 믿어왔던 사계절과 일상도,

실은 그렇게 조금씩 다른 강약을 주며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똑같다.고 말하기 전에.

눈 한 번 크게 뜨고.

사물을 바라보는 연습.

다시. 하면서.

설레고 싶은.

가을.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요. 문장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을. 한번. 찾아보고. 싶은.

아름다운.

나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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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0-1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마음님!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10-22 12:24   좋아요 0 | URL
어이쿠, 청년이 되어 나타나셨네요. :)

이진 2012-10-22 19:35   좋아요 0 | URL
청년이라니요. 아직 어린 꼬맹이입니다 ㅎㅎ
 

 

아이도 없는 기혼녀가 놀고 있다는 사실을 곱게 바라보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팔자 좋은 여편네로 군 하며 비아냥거리거나 이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혼자 벌서 어떻게 살겠다는 거지?라며 의아해하거나. 벌써 이런 반응에 대해 방어해온 게 햇수로 4년째이다. 한 일 년은 당분간은 좀 쉬고 싶다는 말로 일관했고, 그 말은 진심이었고, 모두들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다음에는 날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시엔 알바를 하려고 아등바등해도 이상하게도 일이 구해지지 않아 고군분투하고 있던 때였고, 마음속으로는 진짜 내가 일을 하고 싶은 건가 하는 의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에 오면 좀 달라질 줄 알았지. 난 경력도 있고 일본어도 잘하니까! 하지만 많이 놀고 조금만 일하고 싶은 나는, 게다가 경력단절 여성에 아이를 낳아 키워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도 없는 아줌마인 나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점점 더 소용되고 싶으나 소용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좀 더 무력해져보기로 했다. 사람들은 노는 게 편하고 좋은 건 줄 알지만, 일보다 더욱더 인내력과 창조력을 요하는 게 노는 거다. 온전히 하루가 주어진다. 간단한 집안일을 제외하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해야만 하는 리스트"가 백 가지도 넘는다. 노는 주제라 남편 아침은 꼭 차려 줘야 할 것 같고, 노는 주제라 집안청소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고, 노는 주제라 꼭 뭐라도 배워야 할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그건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시어머니의 목소리, 학교선생님의 목소리, 소위 잘나가는 유명인사들의 목소리가 리플레이되는 것이다. 온전한 하루가 주어지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정작 주제할 수 없는 지루함에 티비 리모컨을 돌리거나, 소설을 몇 권 뒤적이거나, 그러면서 난 왜이리 못났을까, 시간이 있어도 놀지를 못해요라고 자학하기 일쑤다.

 

잘 놀기 위해서는 우선 내안의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들과 자기검열과 규제와 같은 것들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나서야 텅빈 자리에서 내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목소리들과 싸우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같이 안 사는데도 늦게 일어나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불쾌해지는 건 내 안에 부지런한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시어머니가 살고 있기 때문이며, 하기 싫다고 생각하며 청소기를 돌리거나 신랑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밥을 짓는 일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착한 아내, 현명한 아내'의 틀에 나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 뭘 원하지? 뭘 하고 싶은데?

 

아직도 대답 없는 목소리. 하지만 이제야 좀 잘 노는 백조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은 뒷산 가기, 독서, 자기치유,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기 정도이다. 내 안에서 '해야만 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몰아내고 나니,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 생겼다. 만약에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매일 뒷산 정도는 가야만 해'라고 생각했으면 작심삼일에 그쳤겠지. 그런데 산에 가보니 운동도 되고 산도 푸르고 예쁜 새들도 많아서 몸과 마음에 생기가 생기는 거다. '좋다'라는 느낌을 받으니 그때부터는 '가야지, 말아야지' 실갱이를 벌이지 않고도 몸이 저절로 산을 향한다. 갈등하는 데 쓰였던 에너지가 온전히 '행위'에만 쓰이고 있다. 늘 계획이 오래 가지 못했던 건 내가 꼭 그래야만 한다고 나를 몰아부쳤기 때문인 것 같다.

 

결혼하고 몇 년째 놀고 있다고 하면(그간의 몇몇 알바는 제외하고) 이제 아이 낳고 계속 쭉 놀 것처럼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놀고 있을 뿐이지, 평생 놀 생각도 없고 평생 놀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 나는 다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잘 노는 법을 익히는 중이고, 내가 누군지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있고, 그러면서 반드시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를 수많은 규제로부터 풀어놓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안해도 돼.

자고 싶을 만큼 신나게 자도 돼.

암것도 안하고 멍때리며 보내도 괜찮아.

쓸모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보다 네가 뭘하고 싶은지 봐봐.

 

어쩌면 내가 자라는 과정에서 마음껏 듣고 싶었던 말들.

내가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산에 갈 때 꼭 바지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넣어 간다. 물은 가져가지 않는다. 혹시 목이 너무 말라 생수를 사야 하거나, 다리가 너무 아프고 힘이 빠져서 마을버스를 타게 될지도 모르니까 가져간다. 아직 한번도 사용해본 적 없지만, 천 원짜리 한 장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 든든할 수가 없다.

지금 당장은 소용되지 않아도, 언젠가는 백만 원만큼 소중히 쓰이게 될 천 원 한 장과 나의 백조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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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7-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루덴스~^^
인간은 어쩌면 적절한 생존(먹을 것)을 위한 행위 외에
대부분 놀이(유희?)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런데 현실은 절대로 이를 용납하지 못하죠..
자꾸 일에 사람을 얽어매는 사회니까요

천원짜리 한장이 든든한 사람이야 말로
보살의 경지에 다다른 분입니다.
장담하건데 분명히 장수하시고 질병으로 고생하시지 않으실 거에요.
나이가 더 둘면
주변인들의 부러움을 한 껏 받으실 거라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9-16 01:40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댓글을 답니다.
저도 놀이로 시간을 보내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한 표!!
근데 하도 안 놀다 보니 잘 놀줄 모르게 되었다는 슬픈 현실.
늘 야근하고 들어오는 신랑만 봐도, 현실의 가혹감이 느껴지죠.
이 문화속에서 건강하게 균형을 이루며 사는 법에 대해선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될 것 같아요.
^ㅡ^
 

 

밥먹어라.

 

이혼 사실을 밝히고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일숙의 손을 끌어잡고

할머니가 말한다.

"먹기 싫어도 먹어라. 안 넘어가면 국에 말아서 훌훌 삼켜."

 

나는 늘 궁금했다.

지금 속이 속이 아닌데 어른들은 왜 늘 밥을 먹으라고 난리인 걸까.

울며 억지로 삼켜서 체하느니 그냥 배가 고플 때 먹게 두지.

기어코 조금이라도 먹일려고 밥상 앞에 끌어다 세우는 걸까.

 

그런데 오늘 일숙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밥을 입에 넣는데, 아하 싶었다.

마음은 복잡하고 시끄러워도,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 들어가면

차갑던 몸에 혈기도 돌고,

각종 장기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며 순환도 되고,

그러면서 몸은 평소처럼 '살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배가 든든하면, 마음이 허기가 조금 해소된 듯한 착각도 경험할 수 있겠고.

 

밤 세우기를 밥 먹듯 하고, 먹는 것에 소홀한 친구가

나를 사랑하는 법이 뭔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잘 먹고 잘 재우고 몸에게 좋은 걸 해주라고 했다.

영혼이 아무리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라 해도

우리가 이 생에 사는 한,

껍데기로서의 몸도 아주 소중하니까.

 

'마음'만이 소중한 줄 알았는데...

이제 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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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1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도 이 드라마 보다가 할머니가 국 퍼주는 장면에서 목이 메이더라구요. 눈물이 글썽거렸어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7-16 15:47   좋아요 0 | URL
할머니가 그랬죠.
안 해보고 후회한 건 있어도, 해보고 후회한 적은 별로 없는 거 같더라고.
우회적으로 괜찮다, 괜찮다 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마음이 찡-했어요.

프레이야 2012-07-1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할머니의 대사가 참 마음에 들었어요.
같이 위로받는 느낌이었어요. 밖에서 아무리 찔리고 들어와도 집밥 한 공기 먹고나면
풀린다고. 눈물 콧물 섞인 밥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일숙이를 바라보던 할머니의 눈빛.
그런 게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7-16 15:48   좋아요 0 | URL
지지고 볶고 싸워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 모든 게 함축돼 있는 게 집밥인 거 같아요. ^^
 

 

난 시한부를 선고받고 '버킷 리스트'를 실현해나가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나도 그래야지 생각했었다. 살겠다고 항암치료 받고 머리털 빠지면서 구질구질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말아야지. 얼마든 전재산 탈탈 털어서 여행을 가든 먹고 마시든 신나게 쓰고 즐기다가 가야지, 라고.

 

아,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가.

 

진짜 죽음을 앞둔 사람의 현실이란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것은 물론, 숨쉬는 것조차 버겁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난 왜 몰랐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온 신랑에게 무슨 암이냐, 어디가 어떻게 아픈거냐 물어도 대답을 못 하길래 갑갑하고 답답했더랬다. 근데 막상 병문안을 가보니 알겠더라. 겨우 숨만 쉬면서 진통제 맞아가며 잠이 들다 깨다를 반복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 사람을 보며 한숨밖에 쉴 수 없는 가족들에게 어디가 아픈지 차마 물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실낱 같은 희망도 사치라는 것을.

 

기적이란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보다.

 

소식을 듣고 5일 만에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좋은 날, 건강한 날엔 서로 바빠서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는데, 마지막 가는 5일 동안엔 대화는 못해도 잠든 그 친구의 얼굴을 실컷 보고는... 찌질하게 울지 말라고 그러고는 그 친구는 떠났다.

 

젊은 만큼 전이도 빨랐고, 본인도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리라 추측한다.

 

장례식장에 가서 지하1층에 그 친구 이름이 써 있는데,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계단을 걸어내려가 그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너무 젊고, 젊었다. 꿈인 것마냥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삶은 이렇게 허망하고 어이없다. 깨달았을 땐 너무 늦다, 제길.

건강할 때, 행복할 때 서로 만나고 표현해야 한다는 단순하고 진부한 사실.

우리가 조금이나마 덜 후회하고 덜 아파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듯하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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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7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7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