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시집을 읽다가 부욱 찢어진 시 한 편의 추억이 생각나서 혼자 슬금슬금 웃었다. 술 마시는 자리에 친구를 불렀는데, 친구가 왔을 때쯤 나는 술이 조금 오른 상태였다. 그때 친구가 무슨 종이쪼가리를 건네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시'란다. 전철에서 책을 읽다가 시가 너무 좋아서 적어서 전해주고 싶은데 적을 시간은 없고, 그런데 오늘 꼭 전해주기는 해야겠고...... 그래서 그녀는 과감히 그 책에서 시가 적힌 부분을 찢어냈다. 그러고는 꼬깃꼬깃해진 그 종이쪼가리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던 것이다. 시가 너무 좋다면서.
그때는 그렇게 마음을 전달하고자했던 친구의 따듯한 애정에 감동하기보다는 친구가 그것을 찢어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재밌게 느껴졌다. 그래서 한번 낭송해보라는 친구의 말에 낄낄 웃다가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소란스런 술자리 속에서 시의 존재 같은 건 5분의 화젯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다음 날, 술에서 덜 깬 상태로 일어나 주변을 정리하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꼬깃한 종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꼬깃한 종이를 펼치니 연녹색 시가 보였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어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않아도 밤잠이 어렵지 않는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마종기, <우화의 강>
아- 찬찬히 읽다가 감동해버렸다. 그제야 이 시를 읽으며 나를 떠올렸을 친구의 마음, 그 마음을 당장에 전하고 싶어서 과감히 책을 찢은 친구의 따듯함이 내 마음으로 전해졌다.
그래, 소중한 건 그렇게 전해야 하는 것 같다. 그 순간, 그 마음의 진실을, 그때에 표현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과감해지는 것.
그래서 친구가 전해준 마종기 님의 <우화의 강1>은 나에겐 최고의 시이다. 이 시를 읽으면 친구가, 친구의 따듯함이 함께 겹쳐져서 나도 모르게 미소짓게 된다. 그리고 자랑하고 싶다. 나에겐, 멋진 친구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