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의 애창곡, 악보도 없이 구전되던 금지곡

부용산

 

도서관 서가에서 창비 20세기한국소설 전집을 펼쳐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읽고 있던 책을 서가에 꽂아두고, 아내와 아이들이 일어서기를 기다리려는데, 아직 시간이 몇 분 남았기에 생각없이 서가를 훑다가 무심코 집어들었다. 거기서 '부용산'을 만났다. 최성각 선생은 그저 환경운동가로서만 알았을 뿐, 그의 글은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산문을 스쳐 읽은 기억은 있었지만 소설은 한 편도 접해보지 못했다. 궁금했다. 마침 분량도 짧아서 금방 읽어 갔다. '부용산'이란 노래를 접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가는 내용이었다. 읽으며 이게 실제 노래에 얽힌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내용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 중에 한겨레 김종철 논설위원이 있어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실화라는 생각에 무게을 실어줬다. 

 

역시 나중에 찾아보니 부용산에 얽힌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두 차례에 걸쳐 쓴 글과 경기대 김효자 교수와 월북한 작곡가 안성현과 호주로 이민 간 작사가 박기동에 대한 내용 모두 사실이었다. 여러개의 토막 글을 찾아보다가 이 내용을 잘 정리해놓은 페이지를 발견했다. 이 페이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소설과 다른 지점이 있다. 소설에서는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 페이지의 각주에는 그런 추측이 있다고 안내하면서 사실이 아닐거라고 말한다. 근거로는 북한에서 안막과 최승희가 숙청당할 때, 안성현은 살아남았고, 이후 인민예술가 칭호까지 받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노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요 아래 페이지를 참고하세요.

http://mirror.enha.kr/wiki/%EB%B6%80%EC%9A%A9%EC%82%B0#rfn4

 

그리고 호주로 이민갔던 박기동이 영구 귀국했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와 연극인 손숙의 남편인 김성옥이 호주로 박기동을 찾아가 부용산의 2절 가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새롭게 알았다. 아 그리고 박기동이 국내에서 [부용산]이란 제목의 산문집을 출간했다는 이야기도 알았다.

 

 

 

 

 

 

 

 

 

 

 

 

 

 

웹에서 부용산을 검색해서 노래를 들었다. 안치환의 노래와 윤선애의 노래 두 개를 들었는데, 윤선애의 노래가 더 슬프고 애잔하게 들렸다. 노래를 들으며 왜 빨치산들이 이 노래를 즐겨 불렀는지, 어떻게 그 긴 세월 악보도 없이 구전되었는지를 알것 같았다. 왠지 형언하기 어려운 서글픈 감정이 흐느낌이 되어 목을 타고 넘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윤선애의 부용산, 전주가 길다. 1분 50초 즈음부터 노래가 나온다.

 

죽음을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

글루미 썬데이

 

수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노래. 노래를 들어보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노래를 듣고 사람들이 자살을 해? 영화는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픽션이지만, 그 노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은 사실이었다. 슬픈 곡조의 노래였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에리카 마로잔이 부르는 노래가 참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에리카 마로잔이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며 스테파노 디오니시에게 자신을 위해 연주를 하도록 부탁하는 장면(헝가리어 버전)

 

 

한창 이 노래에 빠져 있던 시절, 나는 여러 가수들이 부른 '글루미 썬데이'를 모으기 시작했다. 빌리 홀리데이, 사라 맥라클란, 비욕 등 유명한 가수들이 부른 노래가 많았다. 내 엠피쓰리 플레이어에는 폴더 하나에 '글루미 썬데이'만 예닐곱 곡이 들어 있었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 불을 끄고 누워 글루미 썬데이만 무한 반복으로 듣다보면 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을 스쳤다. 아, 자살 충동을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여러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기억은 아주 자세하게, 어떤 기억은 흐릿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같은 장면의 독일어 버전, 에리카의 노래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trauriger sonntag' 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이 무척 익숙하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다. 영혼을 울리는 노래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부용산을 듣고 나서 이 노래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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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국민 사기극

 

4대강 사업은 이 나라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 국민 사기극이다. 물론 그 전에도 수많은 사기극이 있었다. 시화호와 새만금 간척 사업 역시 대표적인 사기극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간척사업이었던 새만금도 비교가 안될 만큼 전 국토를 유린한 사기극이 바로 4대강 사업이다. 지금 낙동강, 영산강, 한강은 모두 녹조로 인해 죽음의 강이 되어버렸다. 역행침식으로 여러 제방과 다리가 무너졌다. 부실공사로 인해 댐은 물이 새고, 그걸 보수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또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런데 정부가 그렇게 선전한 물 문제가 해결되었나?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우리가 얻은 것은 생명의 강이 죽음의 강이 되어버렸다는 현실 뿐이다. 게다가 온 국민이 반대한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수많은 혈세가 건설업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쓰였다. 모두 이명박과 그 일당들이다. 불법으로 쓰인 복지예산 22조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어 모두 뱉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죽음의 강을 생명의 강으로 다시 바꿔야 할 것이다. 댐을 모두 허물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관련자들을 모두 찾아내어 정당한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이 지경이 된 이유로 일제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크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기극이 벌어질 수 없도록 이명박과 그 일당들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요즘 이석기의 내란음모에 대해 말이 많은데, 실제로 내란을 일으켰던 노태우와 전두환이 최근 추징금을 완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돈을 다 내기 전까지는 언제 어떻게 상황이 변할 지 알 수 없지만, 그냥 저대로 죽겠구나 싶었던 인간들이 그래도 돈이라도 내 놓는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한편으로 쪼으니까 되는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 거만한 전두환이 돈을 내놓겠다고 하다니 몰리니까 어쩔수 없구나 싶은 거다.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은 박근혜 이후 차기 정권에서 대운하 사업으로 전환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데, 그 허황된 꿈이 실제로 실현되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 한다. 강과 생명을 죽인 책임을 묻고, 낭비한 혈세를 모두 환수 조치 시켜야 한다.

 

다행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래서 현재 국민고발인단을 모집 중이다. 어려운 것 없다. 시간도 1분이면 충분하고, 돈도 안든다. 그냥 웹페이지 들어가서 이름과 주소와 연락처를 쓰고 서명한다고 선언하면 된다. 국민고발인단의 요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책임자들의 처벌이다. 또 하나는 죽어가는 강을 살리기 위한 특별법의 제정이다. 지금 꼭 필요한 일이다. 많은 이들이 동참해주시기를, 혼자만 서명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알리고 서명해달라고 부탁해주시기를 바란다. 서명 페이지 주소는 아래와 같다.

 

http://www.4riversjustice.net/

 

 

 

 

 

 

 

 

 

 

 

 

 

 

 

 

책은 안 읽히고 살만 찌는구나!

 

누가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했나? 후덥지근한 날씨가 선선해지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동한다. 읽어야 할 책이 쌓이고 쌓였는데 도무지 책장으로 눈길이 가지 않는다. 눈은 자꾸만 창 밖 먼 곳을 향한다. 그런데 나만 책을 안 읽는 건 아닌가보다. 실제 통계를 내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체감상으로 현재 출판 시장은 최악이다. 물론 개별 출판사와 서점의 상황은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책의 성격과 시기에 따라 매출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기 마련인데, 내 경험으로 또 주변에서 듣기로 가을에 매출이 오르는 경우로 거의 못 봤다. 입 아프게 반복하는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시기다. 이 가을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과연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지만 답은 없다. 그저 살아남도록 발버둥을 쳐 보는 수 밖에.

 

지난 주말 생협에서 생산자 조합인 '강원유기농'으로 일손돕기 행사를 다녀왔다. 행사 이름은 일손돕기 이지만 도시에서 몇명 내려와봐야 뭐 얼마나 일을 하겠나? 그냥 몇 시간 일하는 시늉만 내다가 돌아가는 거지. 어쨌든 강원도니까 길이 멀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고 아이들을 깨우고 바쁘게 움직였다.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인데다 잠을 많이 못 잤더니 무척 피곤했다. 차량 2대가 움직였는데, 앞서가는 차는 고급 외제차였고, 우리 차는 90년대 중반에 나온 낡은 소형차였다. 고속도로에서 그 차가 달리기 시작하니 이 낡은 차로는 따라가기 어려웠다. 가장 어려웠던 곳은 언덕길이었다. 운전에만 정신이 팔려 어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산 허리를 지그재그로 돌아 올라 넘어가는 긴 언덕길이 있었다. 평소보다 사람을 많이 태운 낡은 우리 차는 엑셀을 끝까지 밟아도 빌빌거리며 기어올라갔다. 일행들이 탄 차가 여유있게 저만치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곧 20년이 되는 이 차가 안쓰러워졌다.

 

도착해서는 예상대로 힘든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나름 배려해서 쉬운 일을 시킨 것일텐데, 그래도 도시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익숙치 않은 일을 열심히 하고 기대했던 점심시간 밭 한쪽 넓은 공터에 넓찍한 판을 깔고 식탁을 마련했다. 한쪽에선 숯불에 고기를 구웠다. 갓 수확한 유기농 쌈채소와 야채를 간단히 조리한 반찬들이 식탁에 놓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음식에 달려들었다. 아니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집이나 식당에서 먹을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물론 유기농 음식이고, 공기 좋은 곳에서 먹었고, 육체 노동 후의 식사니까 맛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맛있었다. 당연히 나는 과식을 했고, 배가 터질지경이 되어서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후 일은 오전 일 보다 더 쉬웠다. 그래도 열심히 했다. 오후 늦게 일을 마치고 농부들이 싸준 값진 유기농 채소들을 얻어서 나왔다. 강원유기농 사무국장님께서 어차피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테니 저녁을 드시고 가라고 해서 막국수에 메밀전을 또 배가 터지도록 먹고 운전대를 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돌아오는 길은 도로가 아닌 주차장이었다. 정체되는 길에서의 운전은 평소보다 훨씬 더 피곤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잠시 한 눈 팔면 옆에서 끼어들거나 뒤에서 빵빵 거린다. 다들 예민하고 짜증이 난 상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체를 견디고 견디고 또 견뎌서 간신히 서울로 돌아왔다. 거기서 만난 농민 분들이 참 좋았고, 맛난 음식을 많이 먹어 좋았건만 돌아오는 길이 너무 오래걸리고 피곤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하루였다. 새벽녁 피곤에 지친 아이들을 간신히 달래서 씻기고 재운 뒤 나도 쓰러졌다.

 

요즘은 점심에도 내장탕이나 순대국을 자주 먹는다. (좋아하긴 하지만)딱히 일부러 찾아 먹는 건 아닌데 동료들과 가다보니 연달아 과도한 육식을 하고 있다.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연일 과식에 육식을 하다보니 다시 뱃살이 나온다. 운동을 시작하고부터 서서히 줄어들어 8월 중순 즈음에는 이제 곧 '왕'자가 새겨지겠구나. 젊은 시절 몸매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구나 했는데, 이게 왠 일인가? 가을엔 말이 살찐다더니, 나는 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이 찌는 걸까? 이 뱃살을 다시 넣으려면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해야겠구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운동법과 무술에 대한 책들을 살피다가 눈에 띄었다.

 

 정희준 선생님은 예전에 잠시 인연을 맺었던 분이다.

 

 전부터 느꼈지만 글을 참 잘 쓰신다.

 흥미롭고, 요점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다.

 같이 빌린 다른 책들(원래 빌리려던 책들)을 미뤄두고

 먼저 읽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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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5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3-09-09 18:5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꼭 강을 살리고, 정의를 바로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숲노래 2013-09-06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손돕기 틈틈이 가셔요.
그러면 날마다 밥맛이 새롭게 돋으리라 생각해요.

알고 보면,
일손돕기라기보다
도시에서 살아갈 기운을 얻도록 돕는
'마음치유와 몸치유'라고 할 만할 테지만요.

4대강사업 벌인 이들은 우두머리뿐 아니라 끄트머리 공무원까지
역사가 심판하리라 믿습니다.

감은빛 2013-09-09 19:01   좋아요 0 | URL
네, 함께살기님.
그런데 딱 그날 거기서만 밥맛이 좋더라구요.
도시로 돌아오니 또 조미료 맛으로 식당 밥을 먹어야 하니 말이죠.
물론 집에서 먹는 밥은 맛있지만,
보통 하루 3번 중 2번은 밖에서 먹으니까요.

가만히 있으면 역사가 심판하지 않겠죠.
좀 더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yamoo 2013-09-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국민 사기극이죠! ㅁㅂ이 이하 관련자 모두 교도소에 쳐 넣어야 하는데~ 아우~~
저두 사이트 가서 서명하고 와야 겠어요!

흠...저도 코리아 판타지 클리는 걸요~ 서점에서 좀 봐야 겠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솨~~~^^

감은빛 2013-09-09 19:02   좋아요 0 | URL
야무님, 고맙습니다!

[스포츠 코리아 판타지]입니다.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에서 숨겨진 이야기 묶음 같은 거랄까요.
저도 아직 읽는 중입니다만 아주 재미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13-09-1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법제도가 아무리 잘 잡혀도, 결국 이를 실행하는 것은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요즘의 교육은 이 '사람'이 제대로 나오기 어렵게, 사람바보를 양산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 같아요. 4대강 사업은 전 이명박 일가를 거대한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벌인 반인류적인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재판도 좋고, 바로잡기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신성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돈'을 빼앗아야만 해요.

감은빛 2013-09-12 11:22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 것처럼 교육과 사회구조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자 되세요!" 따위의 천박한 인사말이 유행하는 나라.
돈과 물질만을 쫓도록 가르치고 강요하는 사회가 문제겠지요.

글에도 언급한 것처럼, 노태우와 전두환에게 추징금을 받아냈듯이,
이명박과 그 일당들에게도 끝까지 다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원 동물은 행복할까?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1
로브 레이들로 지음, 박성실 옮김 / 책공장더불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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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일본 ‘도쿄권업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서는 조선인, 류큐인(琉球人), 아이누인 그리고 대만의 고산족(高山族) 등을 진열하여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충격적이다. 인간을 마치 물건이나 동물처럼 진열해두고 구경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리고 아프리카 원주민을 전시한 유럽의 사례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오타 벵가라는 피그미족 청년은 만국박람회에서 전시된 후 동물원으로 팔려가서 오랑우탄의 우리에 함께 갇혔다. 미국과 유럽과 일본의 야만적인 제국주의에 분노했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중에 G. A. 브래드쇼의 『코끼리는 아프다』와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 등을 읽으면서 그때 놓쳤던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가두면 안 되고, 동물은 구경하기 위해 가둬두어도 괜찮은가? 우리는 오타 벵가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오랑우탄을 비롯한 수많은 동물에 대해서도 함께 분노해야 했다.

 

이 책의 원제는 ‘Wild Animals in Captivity’다. ‘창살에 갇힌 야생동물’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저자인 로브 레이들로는 생물학자이자 운동가로 특히 동물원에 갇혀있는 동물들에 관심을 두고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동물원을 찾아다니며 그 안에서 고통받는 동물들을 지켜보았다. 이 책은 인간 사회에 그 실상을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북극곰이 있다. 북극이 아닌 열대지역인 인도네시아의 한 동물원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다. 뜨거운 태양과 무더운 날씨를 피하고 싶겠지만 갈 곳은 없다. 그저 좁은 우리 속에서 그늘을 찾아다니는 것 외에는 할 일도 없다. 그런데 한낮이 되어 우리 안의 그늘이 사라지자 북극곰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한쪽으로 걷다가 방향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걷기를 반복했다. 이런 행동을 스테레오타이피(stereotypy), 즉 비정상적 반복행위라고 한단다. 동물원에 갇힌 많은 야생동물이 이런 무의미한 행동을 온종일 반복하고 있단다.

 

충격적인 것은 새하얀 북극곰의 털이 초록빛과 누런빛으로 얼룩덜룩한 모습이었다. 더러워진 것일까? 목욕을 안 시켜주나? 북극곰의 겉 털 안쪽에 녹조류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란다. 올여름 낙동강과 영산강을 뒤덮은 죽음의 녹조가 떠올랐다. 새하얀 얼음나라에서 새하얀 털을 바람에 날리며 살아야 할 북극곰이 바람 한 점 없는 습하고 뜨거운 곳에서 물감으로 장난치고 안 씻은 것처럼 얼룩덜룩한 모습으로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을 보며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맨 처음 들려주는 두 마리의 도마뱀 이야기처럼 갇혀 있는 존재는 그 존재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좁은 우리에 갇힌 채 인간이 갖다 주는 먹이에 의존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존재는 이미 예전의 자유로웠던 존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사자를 철창 안에 가둬두고 지켜본다면 그건 생김새만 사자일 뿐,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사자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 사자를 지켜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자의 생김새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영상물로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다. 직접 보고 싶다면 사자가 사는 곳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제 더는 인간의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이용한 돈벌이 때문에 야생동물들을 콘크리트 지옥에 가둬두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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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9-07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날 그 길에서> 영화를 찍은 황윤 감독님이 동물원 이야기도 영화로 찍었는데... 저는 황윤 감독님 말이 참 옳다고 생각해요. '동물원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요, 동물원은 모두 없어져야 하지요. 돌고래쇼도 없어져야지요...

감은빛 2013-09-09 18: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최근에 동물원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관람객으로 지나칠 때는 몰랐지만,
동물들은 창살 안에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버티고 있더라구요.
동물을 이용한 모든 쇼와 오락거리는 없어져야 합니다!
 

 

배신감

 

주말에 녹색당 지역모임에 회의가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애들은 아빠가 회의를 하는동안 알아서 노는 일에 익숙하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놀이터에 놀러간다. 한창 회의를 하고 있는데, 큰아이가 자꾸 아빠를 부른다. 왜? 큰 소리로 대답하니, 빨리 와보라고 한다. 회의를 진행하던 입장이어서 갈 수 없으니 말로 하라고 했다. 그러니 말로 할 수 없다고 와보란다. 옆에 있던 당원들이 잠깐 갔다오라고 해서 가봤다. 작은 녀석이 물 컵을 엎어서 탁자와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물을 쏟았으면 걸레나 행주를 찾아 닦아야지. 큰 아이에게 걸레를 찾아 건네주고 다시 회의하러 갔다.

 

회의가 끝나고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한 잔 했다. 한 분이 말씀하시길 "아유! 좋으시겠어요. 따님이 둘이니, 저는 아들만 둘이라서......" 뭐, 딸은 딸대로 예쁘고 귀여울테고, 아들은 좀 더 말썽을 부리긴 하겠지만, 그 나름 귀엽고 사랑스러울텐데. 물론 서로 못 가진 것에 대한 아쉬움과 질투심은 있을 것이다. 난 식당이나 공원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은 남녀 상관없이 무척 좋아하고 잘 놀아주는데, 아내는 하필 내가 남자 아이들을 예뻐해줄 때만 그 사실을 지적한다.

 

어른 다섯과 아이 둘이 치킨 두 마리와 맥주 서너병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헤어질 무렵 누군가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랑 놀러나와서 좋아?" 아이는 당연히 좋다고 대답을 했을테고, 그 누군가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아빠랑 노는 게 좋아? 엄마랑 노는 게 좋아?" 아이는 아마 아빠라고 답을 한 것 같다. 옆에 있던 큰 아이도 덩달아 "나도 아빠!"라고 대답을 했다. 질문을 했던 누군가는 내게 와서 "아유, 딸들이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네요! 비결이 뭐예요?" 그러나 그 질문은 잘못된 사실을 근거한 것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아빠보다는 엄마를 훨씬 더 좋아한다. 아이들에게 그런 류의 질문을 하면 대개 그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답을 한다. 엄마랑 있으면 엄마를 답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아빠랑 있으면 아빠를 답하는 경우가 조금 더 많다. 그리고 아빠랑 있어도 엄마를 떠올리며 엄마를 답하는 경우가 제법 많고, 엄마랑 있으면서 아빠를 떠올려 아빠를 답하는 경우는 아주 적지만 가끔 있다. 어쨌거나 빈도를 따져보면 엄마가 답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회의도 마치고 간단한 뒤풀이도 마치고 아내를 만나 공원으로 놀러갔다. 토요일 저녁이라 조금 늦은 시간까지 부담없이 바람을 쐬었다. 아이들은 낮에 누군가에게 아빠가 더 좋다는 답을 했던 것을 잊은 것처럼 아빠를 밀어내고, 엄마만 찾았다. 채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이 배신감에 이미 아주 익숙해져 버렸으니까.

 

맨 처음 배신감을 느낀 때는 아마 아내가 해외출장을 다녀 온 후였을 것이다. 큰아이가 두 돌이 되기 직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둘째는 아직 없었다.) 대략 보름 가량 아내가 집을 비워야 한다고 했을때 걱정이 되긴 했다. 아이를 돌보는 건 늘 함께 하던 일이니 걱정할 것이 없었지만, 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는 별로 엄마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일하게 자신의 생존에 도움을 줄 어른인 아빠에게 더 확실하게 애정표현을 했다. 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잘 받아들이는 듯 했다. 누군가 물으면 엄마는 아주 멀리 갔으며 며칠 밤이 지나면 돌아온다고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런데 막상 엄마가 돌아오고 나니 아주 서럽게 울었으며,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 이유없이 아빠를 미워하고 밀어냈다.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비슷한 패턴은 반복되었다. 아이는 대견스럽게도 엄마의 부재를 잘 견뎠는데, 엄마가 돌아오면 이유없이 아빠를 밀어냈다.

 

그 배신의 수준이 가장 심했던 것은 아내의 마지막 출장이었다. 둘째가 아직 어려서 걱정이 되었다. 큰 아이도 걱정이 되긴 했지만 이제 초등학생이니 잘 견디지 않을까 생각했다. 출장 기간도 둘째가 걱정되어 확 줄였다. 일주일만 버티면 되었다. 막상 아내가 떠나고나니 큰 아이가 심하게 엄마를 찾았다. 작은 아이는 평소에도 자주 울었고 딱히 엄마를 찾아 더 많이 울지는 않았다. 매일 아침 아이 둘을 깨워서 씻기고 입히고 간단히 먹여서 데리고 나와야했다. 큰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엄마를 찾아 울었고, 작은 아이는 언니를 따라 울었다. 달래고 얼르고 노래도 불러주면서 출근 준비를 했다. 간신히 준비를 마치면 어린이집을 들렀다가 학교에 들렀다가 출근했다. 하루는 비가 많이 왔는데, 한 팔에 작은 아이를 안고, 기저귀 한 꾸러미와 분유가 든 가방을 매었고, 다른 한 손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큰 아이는 우산을 들고 내 가방 끈을 붙잡고 따라왔다. 비가 제법 많이 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자세 때문에 발밑을 살피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맨홀 뚜껑에 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휙 기울어지면서 넘어졌는데, 이대로 넘어지면 아이가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발이 기묘하게 비틀어지면서도 아이만은 품에 꼭 안았다. 하필 아내가 없는 아침에, 하필 어린이집에 기저귀가 떨어져서 갖다주는 아침에 이렇게 비가 오나 싶어 무척 원망스러운 아침이었다. 발을 절뚝거리며 아이 둘을 데려다 주고 출근하는 길이 무척 멀게 느껴졌다.

 

아이 둘을 돌보면서 직장 일을 해낸 그 길고 험난했던 일주일이 지나 아내가 돌아왔다. 아이들은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엄마에게만 매달렸고, 아빠를 멀리하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건만 당연히 올해도 그러리라 예상했건만 그때만은 나도 무척 서러웠다. 지난 일주일 동안 고생했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멀쩡한 녀석

 

작은 녀석은 자주 아침에 깨자마자 짜증을 부리고 울어댄다. 큰 녀석도 한동안 거의 매일 깨우면 짜증과 울음을 반복했지만, 아내와 내가 달래보고 또 야단치고 다시 대화하는 등 계속 노력해서 많이 좋아졌다. 작은 녀석은 아직 어려서 그렇겠지만 달래고 야단치고 알아듣게 얘기해도 변화가 없었다. 정신 없는 아침, 요즘처럼 아침부터 더운 날엔 그 스트레스가 정말 심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어쩐 일로 웃으며 일어나서 한 번도 울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양말도 혼자 찾아 신고 나보다 먼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찾아 신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빠도 회사 가야지?" 하고 묻는다. 아주 멀쩡한 얼굴로.

 

또 며칠 전 저녁엔 운동을 나가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작은 녀석이 "아빠, 아빠 어디 가?"하고 묻는다. "아빠 운동하고 올게." 했더니, "아빠 지금 깜깜한데 운동하러 가?" 라고 묻는다. 그래서 "응. 아빠는 저녁에 운동하러 가." 하고 답했다. 잠시 생각하던 녀석은 "아빠, 어, 아빠 지금 깜깜하니까 조심해야 돼. 어, 어, 또 비 올때, 어, 비가 오면 위험하니까 빨리 와야돼. 알았지?" 하고 말한다. 아주 멀쩡한 얼굴로.

 

요 녀석이 이제 아빠 걱정을 할 정도로 컸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빠가 조심해서 다녀올게. 빨리 올게." 라고 말해주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시 아빠 걱정을 해주던 녀석은 금새 인형과 장난감을 찾아 뛰어갔다.

 

경상도 말에 '시건이 멀쩡하다'는 표현이 있다. 대략 '대견하다.', '어른스럽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려나? 특유의 경상도 말투로 해야 어울리는데, 요즘 작은 녀석을 보면 저절로 이 말이 튀어나온다. "요 멀쩡한 녀석!"

 

 

아쉽다!

 

 이번 주 들어 읽기 시작한 책이다.

 물론 지난 주와 지지난 주에 시작한 책도 아직 끝내지 못했다.

 왠만하면 소설책은 주말에 밤을 새서 한번에 몰아서 읽으려하고,

 그외 나머지 책들은 천천히 쉬엄쉬엄,

 이거 조금 읽다 또 저거 조금 읽다 하고 있다.

 

 향가, 고려가요, 시조, 가사, 민요 등을 다루고 있다.

 아, 맨날 수업 안들어가고 땡땡이 치거나,

 수업을 들어가도 잠만 잤던 국문과 시절이 생각난다.

 

 

 

 

  해방일기를 야금야금 읽고 있었다.

 워낙 천천히 띄엄띄엄 읽으니 진도가 늦다. 

 현재 2권을 읽고 있다. 2권을 다 읽어갈 무렵 3권을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알라딘에서 1~5권 세트를 반 값 할인 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앗! 이럴수가! 반 값이라니!

 

 이걸 지르려니, 이미 사서 읽은 1, 2권이 아깝고, 무시하고 지나가려니 흔치 않은 기회인 것 같아서 놓치기가 아깝다. 잠시 마음의 동요가 일었으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래 지금 사놓아봐야 어차피 5권까지 다 읽으려면 아주 오래 걸릴거다. 원래 읽던 속도대로 천천히 읽으면서 3권 사고, 또 나중에 4권, 5권도 사면 되지 뭐. 당장 읽지 않을 것을 미리 사는 것은 낭비다. 라고 생각하며 지나쳤지만, 그날 이후 보관함과 장바구니를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다 반 값 할인 끝날 즈음에 나도 모르게 결제를 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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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8-2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ㅎㅎ
아빠의 입장에서 쓴 아이들의 이야기 참 재밌어요. 한편으로 다른 집들도 비슷비슷하구나 싶고요.
아이들이 부모를 걱정하는 표현할때, 가슴 뭉클한 뭔가가 있었는데......애들 마음 잘 이해해주지 못하는 우리가 더 부끄러울때가 있죠.ㅎㅎ

감은빛 2013-08-29 20:0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꿈꾸는섬님.
아이들 키우는 집은 대개 비슷하겠죠.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말씀처럼 아이들 마음을 잘 살피지 못해
늘 미안하고 또 부끄럽고 그렇네요.

Mephistopheles 2013-08-3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신감....공감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죠.
엄마에게 들러붙는 건 물론이요. 단 둘이 있을 때 일을 엄마에게 고발까지 하니까...ㅋㅋㅋ

감은빛 2013-09-06 09:57   좋아요 0 | URL
역시 아빠 입장에서 공감해주시는군요.
아이들은 무서워요!
엄마나 할머니한테 금방 다 일러버리니까요. ㅠ.ㅠ

무해한모리군 2013-08-30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딸은 제 딸이 아니예요 ㅎㅎㅎ
제가 오면 손정도 흔들어주고 할머니가 오면 격하게 뛰어가서 안겨요.. 외로워요 흑흑

감은빛 2013-09-06 09:58   좋아요 0 | URL
음 지금은 그렇군요.
좀 더 지나면 더 심하게 엄마를 찾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오히려 지금이 더 좋았지 싶을걸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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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현실의 가족이나 친구보다는 실체도 보이지 않는 온라인 상의 인간 관계가 더 소중하고 깊을수 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처음 인터넷을 통해 채팅이란 걸 경험해보고, 이메일 계정이란 걸 만든 이후로 온라인을 통해 얼굴 모르는 이들과 감정을 나눈 경험은 생각보다 많았다. 부모나 친구에게는 말 못할 은밀한 고민도 낯 모르는 채팅 상대에겐 편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고, 친구들이라면 잘 들어주지도 않을 별 것아닌 일상 얘기를 펜팔(이메일 친구)에게 메일로 장황하게 풀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느끼게 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상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상대와 내가 접해있는 면이 아주 작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의외로 낯선 사람들과 낯선 분위기에서 아주 대담하고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해가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만약 일상에서 만난 여성이었다면 그렇게 적극적으로 대쉬하지 못했겠지만, 온라인을 통해 알게된 인연이어서 과감한 도전이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온라인에서 인연을 맺어 사귄 여성이 두 명이다. 한 명은 아주 우연히 채팅으로 시작해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다음날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대략 5시간 동안 채팅을 했고, 5시간 동안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란 인사말을 주고 받은 지 10시간 만에 우린 서로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과 현재 그리고 미래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이런 대화는 (당연하지만) 막연하게라도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막상 손가락과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 호감이 깨어질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서로 외모에 대한 기준이 높지 않았나보다. 한번 사귀어 보기로 결정했고,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두번째 인연은 한때 몸담았던 문학동호회에서 알게된 사람이다. 글을 아주 매혹적으로 쓰는 사람, 글에서 아주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고, 댓글과 채팅을 주고받다보니 약간의 친분이 생겼다. 점점 자주 채팅을 했고, 쪽지나 메일도 주고받았다. 어느날 채팅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그이가 사는 도시를 찾아가겠노라고 말했고, 그이는 환영의 뜻을 보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귀기 시작했다.

 

온라인을 통한 인연은 좁은 면적의 접점으로 시작한다. 그 관계가 진행하면서 점차 넓어지겠지만, 그 관계가 넓어지기 전에 단순히 호감만으로 시작한 연애는 생각보다 험한 길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현실은 정말로 복잡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자꾸만 끼어든다. 어쩌면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가진 채로 그냥 그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다. 내 경우엔 둘 중 하나는 살짝 후회가 되었고, 하나는 그래도 제법 오래 착실히 만났다.

 

이 책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약간 뻔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재미가 있었기에 처음 손에 쥔 상태로 끝까지 다 읽을 때까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세 시간 쯤 걸렸던 것 같다. 맥주를 마시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여유있게 한 손에 책을 쥐고 눈은 책에 둔 채 나머지 손으로 맥주를 홀짝 거렸지만, 나중에는 맥주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이 빠르게 책장을 훑어나갔다.

 

여러모로 에미에게 공감이 많이 되었다. 남편보다 어쩌다 인연을 맺게 된 펜팔에게 더 감정을 쏟는 부분에 대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의 말투와 태도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당히 밀고 당기면서도 절대 쎄게 밀거나 놓지 않는 모습을 보아 나 못지 않은 선수임이 틀림없다 싶었다.

 

공교롭게 책을 다 읽은 시간이 세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찾아보려고 컴퓨터를 켰다가 이 책의 후속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이대로가 더 좋을 듯한데, 후편은 왠지 이만큼의 감동을 주기 어려울 것 같은데, 사야할까 말아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문득 [비포 썬라이즈]가 생각났다. 무척 감동적으로 본 영화였고 그래서 오랜 후에 [비포 썬셋]이 나왔을때 무척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실망이었다. 최근 마노아님을 통해 [비포 미드나잇]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별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금방 마음이 정해졌다. 일단 구매는 보류.

 

컴퓨터를 켠 김에, 메일함을 뒤져 한때 펜팔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찾아봤다. 대략 10여 년 전 캐나다 여고생과 주고 받은 메일을 어딘가 백업해 둔 것으로 기억했는데, 찾아보니 없었다.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네이티브 스피커와 대화를 자주 나누는 것이 좋을텐데, 현실에서 그런 친구를 찾기 어려우니 온라인에서라도 만들어보자 싶어서 좋아했던 가수 '알라니스 모리셋'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이름과 이메일로 무작정 연락해서 얻은 펜팔이었다. 내 어줍잖은 영어가 많이 답답하고 시시했을텐데, 의외로 이 친구가 친절하게 대해줘서 한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뒤이어 생각이 나는 건 군대에서 인연을 맺은 여중생이었다. DMZ에 있을때 한 달에 몇 차례 통일전망대(강원도 고성) 주간 근무를 나갔다. 4월과 5월에는 전국 각지의 학교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수학여행은 일정부분 반공여행의 성격이 있어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에는 수많은 학교들이 끝없이 몰려왔다. 우린 철책선 안쪽에서 원래라면 해안을 감시해야 할 배율이 좋은 쌍안경으로 7번 국도를 올라오는 수학여행 차량이 여학교인지 남학교인지를 살폈다. 만약 여학교라면 학생들이 도착해서 전시용 탱크 앞에서 사진을 찍을 무렵, 군복 매무새를 잘 다듬고 총을 거꾸로 메고 철책 문을 열고 내려가는 것이다. 원래라면 근무지 이탈로 징계감이지만,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는 듯 전시용 탱크 주변을 살펴보는 것처럼 어슬렁 거렸고, 금방 여학생들에게 둘러쌓여 사진 한번 같이 찍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럼 슬쩍 한번 튕겨줘야한다. 근무 중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굵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총을 고쳐 메고 자리를 뜨는 것처럼 굴어야 하는데, 당연히 여학생들은 팔짱을 끼고 매달린다. 그럼 어쩔수없이 해주는 것처럼 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여학생들이 신나서 탱크 앞을 떠날 무렵, 사진을 보내달라고 주소를 적어준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여중생과 장장 5년 넘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물론 내가 제대하고 그 친구가 여고생이 된 이후에는 뜸했다. 뜸했어도 연락이 끊기지는 않았다. 종이로 편지를 쓰기가 귀찮아서 나중에는 이메일로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결국 완전히 연락이 끊긴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루한 군 생활을 견디게 해주었고, 무료한 일상에 웃음을 주는 소중한 인연이었다.

 

계속 메일을 뒤지다보니 지금의 아내와 연애시절에 주고받은 메일이 나왔다. 내가 보낸 메일은 거의 안 남아 있었지만, 받은 메일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남겨두었다. 우린 기차로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에 살았으니 나름 장거리 연애였다. 금요일 밤에 기차역에서 만나서 주말을 함께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마치 주말부부 같았다. 평소에 보고 싶어도 자주 못보는 마음을 전화와 이메일로 달랬다. 다시 하나하나 열어본 메일에서 아내는 무척 낯설었다. 아! 당시에는 이랬구나. 이 사람이 당시에는 날 이렇게 생각했구나. 신기하고 낯선 느낌에 적지 않은 이메일을 하나하나 열어서 읽었다.

 

그렇게 펜팔 인연들을 추억하고 또 아내의 편지를 읽느라 시간을 보내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4시를 살짝 넘겼다. 푹푹찌는 열대야는 이 늦은 시간까지도 기승이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선풍기에선 오히려 더운 바람이 나오는 듯 했다. 새벽 4시 바람 한 점 없는 밤, 어느 낯선 이에게 엉뚱한 메일 한통 보내보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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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2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은빛님, 완전 낭만적이군요! 기차역에서 만남과 헤어짐이라...영화같은 연애를 하셨습니다그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이 책을 읽고 이런 진솔한 리뷰를 쓰시다뉘~! 공감을 안할 수 없는 걸요~^^

감은빛 2013-08-26 15:52   좋아요 0 | URL
야무님, 시골 간이역이었다면 좀 낭만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희는 서울역에서 만나고 헤어졌기에 그닥 낭만은......
모든 연애는 영화처럼 극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따라쟁이 2013-08-2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새벽세시에 오신것을 환영해요, 이제 문득, 새벽에 깨어있는날 문득 시계를 보며, 어? 세시네... 하실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참고로 저는 그 뒷편도 읽었어요.

감은빛 2013-08-29 17:59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 환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책을 막 읽었을 때는 속편을 읽을까 말까 좀 고민했는데,
별로 궁금하지 않은 걸 보니 안 읽어도 되겠다 싶어요.

다락방 2013-08-29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읽고 책장을 덮자마자 그 알싸하고도 완벽한 결말에 어쩔줄을 몰랐더랬죠. 그리고는 메일함을 뒤졌어요. 누군가에게든 메일을 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전 이 책이 정말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읽고, 할 줄도 모르면서 독일어 원서도 사고, 읽을 줄도 모르면서 영어책까지 사놨지 뭡니까. 심지어 독일어 오디오북도 있다능 ㅋㅋㅋㅋㅋ

온라인 활동을 해본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당연히 자기만의 레오나 자기만의 에미를 생각하게 될 거에요. 제 경우에도 제게 레오 같다고 느껴졌던 남자가 있었고(그 남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찬가지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저를 에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죠. 또한 저는 에미와 레오처럼 후버까페 만남도 해봤습니다. ㅋㅋㅋㅋㅋ

저도 온라인에서 알게 되고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다가 사귀게 된 남자가 한 둘이 아닌데요(응?), 하아- 추억 돋네요. 저는 요즘 이 책을 회사 동료들에게 빌려주고 있습니다.

속편은, 읽게된다면, '그래 이럴 수 밖에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테고, 그러니 읽어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완벽한 건 새벽 세시로 끝내는거에요. 새벽 세시의 결말이야 말로 모든걸 말해주는 가장 완벽한, 소설이 완성할 수 있는 최대치인것 같아요.


아..좋다. 저는 새벽 세시 얘기만 하면 참 좋으네요.

감은빛 2013-08-29 18:21   좋아요 0 | URL
우와! 독일어 원서에 오디오북 그리고 영어판까지 모으셨다니!
이거 왕팬이시군요!

후버카페 만남도 해보셨군요!
정말 서로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고 그냥 찾기로 했나요?
찾아보고 아는 척 하지 않고 돌아와서 나중에 물어봤어요?
아! 그 이야기 정말 궁금해요!

온라인을 통한 인연이 한 둘이 아니었다니,
역시 다락방님도 선수이시군요.

속편은 지금은 안 읽어도 되겠다 싶은게 별로 궁금하지가 않네요.
나중에 다시 읽게 되거나 했을 때 궁금해지면 그때 사던가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