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다보면, 어쩐지 그가 매우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정반대로 평소에는 무척 과묵한 편이데, 글을 쓸 때만 끝없이 수다를 늘어놓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쩜 이렇게 많은 지식을 끝없이 쏟아낼 수 있을까? 그의 이런 경이적인 ‘수다’능력 덕분에 그의 책은 늘 재밌다.

 

빌 브라이슨이 이번에 관심을 가진 건 집이다. 그가 살고 있는 영국 어느 작은 마을의 오래된 목사관을 조목조목 살펴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생활사를 다룬 역사서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다루고 있는 것들은 영국 혹은 미국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밝혀주는 역사적인 지식이다. 대개는 그 집이 세워진 1800년대 중반의 이야기들이지만, 가끔 고대문명을 언급하기도 하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정보들이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무척 재밌어서, 한번 책장을 펼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들게 된다. 처음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슬쩍 맛만 보고 자려고 앞부분을 읽기 시작했는데, 대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수정궁 이야기에서부터 흠뻑 빠져들어 버렸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걸 깨달으며, 기분 좋은 낭패감을 느꼈다.

 

저자가 살고 있는 영국에서 ‘풋볼매니저’라는 제목의 축구게임이 유행하는데, 한번 빠지면 속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게임만 하게 된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있다. 게다가 남편이 이 게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이혼소송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다분히 과장이 섞인 이 게임에 대한 소문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게임을 한번 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히딩크’라고도 된 것처럼, 자신만의 선수들을 키우고, 유명한 선수들을 데려오고, 상대에 따라 적절한 전략을 짜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면 자꾸만 게임 속으로만 빠져들게 된다. 난데없이 축구 게임 얘길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저 유명한 게임만큼이나 나를 정신못차리게 만들었다는 얘길 하기 위해서다.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아내는 몇 번이나 뭔가 말을 걸었다가 별 반응이 없자, 그냥 대화를 체념해버렸고, 큰 아이는 훨씬 더 자주 놀아달라고(혹은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다가 지쳐 혼자 놀아야했고, 둘째 아기는 울음으로도 평소처럼 강력하게 내 주의를 뺏어가지 못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우리 집’은 단칸방에 좁은 재래식 부엌이 딸린 공간이었다. 그 집에는 그렇게 작은 단칸방이 아주 많았다. 집의 중앙공간에 주인집 가족이 살았고, 그 주인집을 빙 둘러서 디귿자로 단칸방들이 포위하는 모양이었다. 일층에만 대략 예닐곱의 단칸방이 있었고, 그보다 조금 적은 숫자의 단칸방이 이층에도 있었다. 그 집에는 적어도 열다섯 가족이 살았던 셈인데, 한 가족을 네 명(당시 가장 보편적인 핵가족의 숫자인)으로 잡으면 약 육십 여명이 그 좁은 공간에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은 마당 한쪽 구석에 겨우 두 칸이 있었을 뿐이다. 아침마다 그 두칸의 화장실 뒤에는 신문지와 질이 좋지 않은 (회색빛에 가까운)휴지를 손에 쥐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바쁜 아침시간에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오래 시간을 끌면 뒤에 선 어른들이 소리를 지르곤 했다. 나와 동생은 주로 재래식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큰일을 보았고, 작은 일은 마당 구석 담벼락에 해결하곤 했다. 세면공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여성들은 한 사람이 겨우 서있을 정도의 폭인 재래식 부엌에 쭈그리고 몸을 씻었고, 남자들은 마당 한쪽 구석에서 쭈그리고 씻었다. 지금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싶지만, 그때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 집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주인집은 절대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구역이었는데, 나중에 어떻게 한번 가본 후로, 처음으로 ‘빈부격차’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 가족이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에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두 번째 ‘우리 집’은 소형임대 아파트였다. 초등 2학년 때였다. 멀리 해운대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산 기슭에 지어진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우리 가족은 이 집에 꽤나 오랫동안 살았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동생과 나만 따로 방을 쓴다는 것이 몹시 낯설었다. 아직 어렸던 동생은 밤마다 울면서 큰방으로 가서 엄마 품에서 자곤 했다. 그러면 나 혼자 방 하나를 온전히 다 차지하고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았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나가지 않아도 집안에 화장실과 부엌이 있다는 것도 무척 이상했다. 부엌은 뭐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화장실이 집안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뒷베란다에는 연탄창고도 있었다. 단칸방에 살 때는 가끔 이웃에서 연탄가스 사고가 나서 일가족이 몰살했다거나,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았다는 소릴 듣곤 했는데, 이 아파트는 그런 걱정이 없다고 했다. 연탄창고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탄 이삼 백장쯤은 거뜬히 들어갔다. 우리 집은 4층이었는데, 겨울이 되면 연탄 집에서 아저씨들이 4층까지 부지런히 연탄을 날랐다. 연탄 배달이 오는 날이면 현관에서 부엌을 가로질러 뒷베란다까지 더러운 깔판을 깔아놓고 신발을 신은 그대로 아저씨들이 들락거렸다. 게다가 시커먼 연탄 가루가 여기 저기 바닥과 벽을 더럽혀놓았다. 배달을 마친 아저씨들이 깔판을 둘둘 말아 들고 계단을 내려가고 나면, 더러워진 부엌 바닥을 닦은 것은 내 일이었다. 연탄보일러는 나중에 기름보일러로 바뀌었다. 연탄창고로 쓰이던 공간은 잡동사니를 쌓아놓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연탄창고 바로 옆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작은 문이 있었다. 시커먼 철제문을 잡아당겨서, 쓰레기를 버리면, 짧은 경사로를 따라 미끄러지던 쓰레기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잠시 후 1층 쓰레기장에 무사히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저녁에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문을 열면, 다른 층에서도 쓰레기를 버리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쓰레기의 낙하 시간은 층마다 달랐다. 저녁마다 쓰레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기다리며 ‘중력’의 존재를 느끼곤 했다. 그 문으로는 쥐나 바퀴벌레 따위가 드나들기도 했다. 여름이면 악취가 심하게 올라왔다.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통로마다 마련되어 있던 쓰레기장이 폐쇄되고, 더 이상 그 문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했다. 더 이상 쓰레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세 번째 ‘우리 집’은 어느 빌라 지하주차장 옆이었다. 서민들의 보편적인 거주지인 반지하였다. 방은 두 칸이었는데, 방 한 칸이 특이하게도 무척 길었다. 이제는 다 커버린 여동생과 계속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 그 긴 방의 중앙에 바퀴달린 플라스틱 병풍처럼 생긴 칸막이를 달았다. 밤에 잘 때면 칸막이를 치고, 아침에 일어나면 걷었다. 남자인 내가 입구 쪽 공간을 쓰게 되었는데, 밤에 여동생이 방을 드나들 때마다 ‘드르륵’하고 칸막이 여닫는 소리에 깨곤 했다. 하루는 주말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동생의 친구가 놀러와 있었다. 살짝 잠이 깼는데, 여학생들의 수다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었고, 나는 팬티만 입고 자고 있었다. 낮이어서 칸막이는 열려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화장실을 갈지, 계속 자는 척하면서 녀석들의 수다를 듣고 있어야 할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좀 아팠다.

 

네 번째부터 ‘우리 집’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 선배들과 술 마시느라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는, 안 들어오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군대를 갔고,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가족들은 이사를 했는데,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휴가를 나왔다가 옛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제대하고 나서는 아예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방과 고시원을 떠돌던 시절 얘기는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쯤에서 줄이는 게 좋겠다. 결혼 후 서울에 정착해서 전세방을 떠돌고 있는 지금의 얘기도 할 말이 무척 많지만,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가끔 딸아이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 얘기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하나 난감할 때가 있다. 한 끼에도 계란 프라이를 두 개씩 먹곤 하는 아이에게, 계란이 너무 먹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화만하면 이삼십 분 안에 프라이드치킨을 배달해주는 시대에, 전기구이 통닭이란 걸 한번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시절을 어떻게 얘기해줘야 하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을 준비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빌 브라이슨처럼 재밌게 ‘수다’를 떨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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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1-04-1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아들이 책가방이 무겁다고 불평을 하더라구요.
생각해보니 제가 고등학생이던 때에는 사물함이 없어서 날마다 그 날 수업이 있는 책들이 가방 안에 꽉 차 있었고, 거기에 체육이 있는 날이면 체육복 가방도 들어야 했고, 도시락 두 개에 신발주머니까지 챙겨들고 학교를 다녔더라구요.
아이들 소꿉장난감을 봐도 격세지감을 느껴요. 제가 어렸을 때엔 아궁이에 가마솥,, 뭐 그런 것들이 소꿉장난감 세트에 들어 있었거든요. 요즘은 가스레인지도 모자라 전자레인지에 오븐까지 갖춰있더라구요.
감은빛님 글을 읽으며 저도 추억에 잠겼다가 갑니다. ^^

감은빛 2011-04-16 03:24   좋아요 0 | URL
그랬죠. 가방엔 무거운 책들과 점심과 저녁 도시락이 들어있었죠.
그뿐아니라 가방 자체도 요즘 가방보다는 훨씬 더 무거웠을걸요.
아궁이에 가마솥. 요즘 아이들은 아마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함께 추억에 잠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4-1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시대에 바나나는 또 얼마나 귀했어요!
요즘은 썩어 버려지는게 바나나인데, 아유, 그때는 아주 횡재한 기분이었죠.
토막씩 나누어 먹으면서. ^^

저두 4층에 살았는데, 연탄 나르던 아저씨 기억나네요.
연탄 들어오는 날은 정말 집안이 난리였죠, 죄송스럽기두 하구.

저두 요즘 집 관련된 책을 줄줄이 세권이나 샀어요. 주로 짓는 쪽으로요.. ㅎㅎ

감은빛 2011-04-16 03:26   좋아요 0 | URL
바나나! 엄청 귀하고 비싼 과일이었죠.
저는 아마 거의 먹어보지 못한 과일이었습니다.

집짓는 책이라니!
어디 시골에 집 지으시려나요? ^^
 

우체국을 가며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보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철공고 졸업 1991년 육군 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황규관 / 패배는 나의 힘 / 창비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살때 나는 자유로웠다. 일하고 싶지 않을 때는 그냥 놀았다. 대신 소비를 줄이면 그만이었다. 정 돈이 떨어져 밥을 굶을 지경이 되면, 노가다라도 한탕 뛰면 그만이었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다. 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뭔가 갖고 싶은 것이 생기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알바를 뛰든 어쩌든 일을 구해서 돈을 벌었다. 원하는 만큼 돈을 갖게 되면 또 일을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했다.

시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면 정말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는다.(지금은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사정이 생겨 일을 쉬게되면 학원강사를 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해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내가 가고 싶으면 전국 어디든 원하는 곳에 가서 활동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바닥은 늘 사람이 아쉬운 곳이고, 특히 지역으로 갈수록 더 하기 때문에 마음만 맞는다면 일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점점 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줄어들었다. 한때 다니던 단체를 그만두고 좀 더 안정적인 다른 단체를 찾아보다가 결국 시민단체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수도권을 벗어나 지역으로 내려가면 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아내의 직장과 집 등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섣불리 모험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닥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서울에 있는 단체에 들어갔다가, 운동의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 동안 나는 큰 보람도 없고 활동에 대한 의욕도 없었다. 그냥 당위성 하나로 버티는 나날이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은 넓은 대한민국 땅 전국 곳곳에 펼쳐져 있었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좁디좁은 서울바닥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날, 가슴 속에서 치받아 올라오는 그 답답함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비뚤어진 허수아비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 마저도 내게는 욕심'이었던 것이다!


황규관 시인의 선한 눈매와 웃고 있는 얼굴이 기억난다. 촛불 집회를 통해 여러 차례 스쳐 지나게 되었다. 작가회의 깃발을 보게되면 근처에는 반드시 황규관 시인이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기 전에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시집 한 권을 찬찬히 읽으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해보았다. 

대한민국, 시인이 살기에는 참 잔인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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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4-1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 많은 장소에서 황규관시인을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그 얼굴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의 시와 시인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무모한 생각들이었지만 뭔가 작은 변화라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말이 무책임하지만 그 말 밖에 할 수 없는 날들입니다.
저도 집에 있는 시집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1-04-15 04:59   좋아요 0 | URL
시와 시인이 닮았다는 생각, 저도 가끔 하게 됩니다.
확실히 황규관 시인은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4-14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분의 시집 제목을 보고 한동안 낱말 바꿔부르기 놀이를 했었어요.
패배의 자리에 이런 저런 낱말들을 넣어서 말이죠.
질투는 나의 힘, 사랑은 나의 힘, 밥은 나의 힘 등등이요.
근데 그 어떤 것도 패배는 나의 힘 만큼 둔중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건 없더라구요.
그래서 어떤 시인이 이런 말을 했나봐요, 4월은 잔인한 달~(에고고, 이건 아니잖어?)

감은빛 2011-04-15 05:01   좋아요 0 | URL
4월은 잔인한 달! 인가요?
어느 해는 그랬던 것도 같아요.
올해는? 글쎄요. ^^

마녀고양이 2011-04-1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여자는 조금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는거 같아요.
저는 회사를 때려치워도 신랑은 회사를 때려치우지 못 하는 모습에 미안함을 느껴요.
하지만 시부모님과의 갈등이나 아이들, 남편에게 꼼짝도 못 하는
주부를 보면 감은빛님의 부자유를 떠올리죠.

결혼이란게,,, 참 다채로와요. 비단 결혼 뿐 아니라 사람 산다는게 다 그런거죠?

감은빛 2011-04-15 05:0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부분들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가족 내에서도 위상이 많이 다르죠.

네, 다채롭죠. 삶의 모습은 정말 천차만별인 것 같아요.
 

낮밥


삼남매가 평상의
반상에 둘러앉아
볼이 미어져라
상추쌈을 우겨넣는 근경을
열댓 발치에서
묵묵히 바라다보며
오져해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큰 손 하나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였다


조성국 / 슬그머니 / 실천문학사


 이등병 시절, 처음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최전방 철책선이었다. 연대본부에서 다른 동기들은 다들 군용 포차나 육공트럭을 타고 자대로 떠났는데, 우리는 인솔장교와 함께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어딘가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비로소 포차를 타게 되는데, 인솔장교가 전방에는 한번 들어가면 전화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미리 전화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한 사람당 2통의 전화를 쓰게 해줬다. 물론 전화카드나 동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동기들이 각각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혹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친하게 지냈던 동기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 부모님께 대신 전해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왠 여자애가 전화해서 내 소식을 전하면 그것으로 더 놀랄 양반들이었다. 그냥 전방으로 간다고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끊었다.

 대대본부를 거치고, 중대 본부를 거쳐 다시 소초로 이동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소초에서는 앞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진짜 고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다 만나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도 있었지만, 왠지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처음 소초에 들어갔을때, 가장 고참은 부산 사람이었고, 그 바로 밑에 있던 고참이 광주사람이었다. 왕고인 부산 사람은 내가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제대했다. 나는 화기분대 기관총 탄약수로 들어갔는데, 화기분대장이 바로 두번째 왕고였던 광주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척 잘해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이 나와 마주치면 매일같이 했던 말이 바로 '낮밥문냐?' 였다. 난 전라도 사투리를 하나도 몰라서 '낮밥'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안그래도 어리버리하던 이등병시절, 천천히 또박또박 잘 말해줘도 긴장해서 두세번은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소리지른 후에야 비로소 고참이 무슨 말은 하는지 알아들었던 시기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 '낮밥문냐?'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세번째였던가 네번째였던가 계속 내가 못알아듣자, 결국 그는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퍽 치고는 '낮밥 무긋냐고?'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낮밥'이 뭔지 몰랐던 나는 계속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숙인 나를 내버려둔채 그냥 가버렸고, 나중에 다른 고참이 '낮밥'이 점심이라고 말해주었다. 낮밥, 이 쉬운 말을 왜 못알아들었을까? 이 시를 읽는 순간 그 고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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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2011-04-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고향이 경상도, 남편은 전라도거든요.
결혼해서 한동안은 시어머님 말씀을 남편이 통역해줘야만 알아들을 수 있었답니다.
15년을 훌쩍 넘긴 지금은 웬만한 사투리는 다 알아들어요..^^

근데 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가 통화를 하시면...서로 네~네~만 하시다 끊는답니다.
시어머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 친정어머니는 시어머니 말씀을 하나도 못알아 들으셨다더군요..ㅋ

저도 낮밥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요.
남편오면 물어봐야겠네요...^^

감은빛 2011-04-13 15:23   좋아요 0 | URL
사투리라는게 그래서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같은 나라에서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거 신기하죠.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조차 말예요.

낮밥이란 말 생각할수록 간단명료하고 좋은 것 같아요.
조기 시에서 '오져해한다는' 표현도 전라도 사투리더라구요.

책가방 2011-04-14 01:00   좋아요 0 | URL
(오지다)에 대한 일화도 있답니다.
경상도에서의 (오지다)는 (고소하다, 샘통이다)등의 뜻으로 쓰인답니다.
그런데 전라도에서의 (오지다)는 (든든하다, 알차다)등의 뜻으로 쓰이더군요.
첫아이 낳고 친정에 있을 때 시부모님이 오셨었는데...
그때 시어머님이 친정엄마께 "아들딸들이 많아서 오지겄소" 하셨다는...ㅋ
친정엄마는 당황해하시면서도 침착하게 "네~그렇지요" 하시더군요.
나중에 나를 통해, 나는 남편을 통해 그 (오지다)의 뜻을 알고나서는 오해가 풀렸답니다...^^

감은빛 2011-04-14 03:2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일화네요!
제가 경상도 사람이라 잘 아는데요.
'오지다'는 그닥 좋은 뜻이 아니거든요.
어머님께서 무척 당황하셨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신중하게 잘 대처하셨네요.

재미있는 사례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굿바이 2011-04-1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져해하고 있는데" 저 문장을 읽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

감은빛 2011-04-13 15:2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찾아보니,
역시 사투리더라구요.
표현이 참 좋아요.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04-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경상도 지방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동기며, 고참들 말을 대체 하나도 알아 듣기가 힘들더라고요. 사투리가 꽤 심한 동기의 얘기는 제대할 때까지 늘 반만 알아듣고, 대강 흘려 듣던 기억이 납니다.

10년만에 만났는데, 잘 풀려 있더라고요. 꽤 부럽기도 했지만, 그 친구가 준비한 시간들이 꽤나 의미 있는 것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어떤 고참은 제게 괴롭혀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메일도 보내기도 했는데 감은빛님 페이퍼 보니 막 생각이 나네요 ㅎ

감은빛 2011-04-13 15:25   좋아요 0 | URL
군생활을 경상도에서 하셨군요.
저는 경상도 사람인데, 강원도에 있었어요.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시나봐요.
저는 군대와 관련된 사람은 모두 연락이 끊긴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아요.

따라쟁이 2011-04-1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점심 먹어야겠어요. 갑자기 막 배가 고파지네요

감은빛 2011-04-13 15:25   좋아요 0 | URL
뭐 맛난 거 드셨나요? ^^

2011-04-13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3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4-1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낮밥'이 점심이라, 저도 군대에서 주요 대사가 '잘 모르겠습니다.' 였는데 감은빛님도 비슷하셨군요. 저는 예전 커피숍 근무 시절에 나이든 손님들이 '엽차'를 달라고 하셔서 이게 도대체 무슨 차인가 메뉴판에도 없고 한참을 헤맸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그냥 맹물이었다는 사실에 어찌나 황당하던지 ^^ 암튼 '낮밥'이 점심밥이라 단어가 멋지네요. 감은빛님의 군대 추억도 그렇구요. 아!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감은빛님은 글 잘 쓰시는게 확실합니다!

감은빛 2011-04-14 02:30   좋아요 0 | URL
네, 이등병때는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

'엽차'라는 단어 참 오랫만에 들어보네요.

축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제가 글을 잘 쓰는 건 아니구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영원한 청춘 2011-04-1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밥이라는 말은 저도 처음 듣네요. 엄마가 전라도 분이시지만 저희엄마도 모르시는듯.ㅋㅋ
감은빛님은 낮밥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렇게 군대시절을 떠올리겠네요.
멋진 글 잘 보고 가요~

감은빛 2011-04-14 02:32   좋아요 0 | URL
아마 전라도 중에서도 지역마다 단어나 뜻이 다르겠지요.
경상도도 그렇더라구요.
부산 바로 옆에 있는 김해는 부산말과 완전히 다른 억양과 단어를 쓰거든요.
고맙습니다.

순오기 2011-04-14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전라도 며느리 돼서 '낮밥'이란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낮밥과 더불어 '식은밥'도 생소했는데, 그건 충청도의 '찬밥'이란 걸 알아들었지만...ㅋㅋ
'오지다'는 말은 광주살이 20년 넘으니 저도 곧잘 씁니다.^^
그리고 전화 통하를 끝낼 때 '들어가라~'는 말,
처음엔 '들어가긴 어디로 들어가!' 하면서 웃었는데, 이제는 나도 쓴다는~~ ㅋㅋ

감은빛 2011-04-14 02:34   좋아요 0 | URL
'식은밥'이란 단어도 있군요.
'오지다' 조기 위에 책가방님께서 알려주신 사례가 굉장히 재밌네요.
경상도에서 '오지다'는 사실 좋지 않은 뜻이거든요.

'들어가라'는 말, 서울 사람들도 많이 쓰던데요.

양철나무꾼 2011-04-1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남편은요,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를 해서 평상시엔 전혀 못 느끼는데...
한번씩 부모님이랑 전화통화를 할때 보면 '오지게' 사투리를 써요.

이 '오지다'는 말은 연애 6년, 결혼16년 만에 깨친 것들이구요~^^

감은빛 2011-04-15 05:06   좋아요 0 | URL
저도 평소에는 사투리를 거의 안쓰지만,
(억양에는 살짝 남아있다고 하더라구요.)
가족들이나 고향친구들과 전화(혹은 대화)할 때는 '오지게' 쓰게 되던데요. ^^
 

꽉 막힌 도로를 쳐다보다가, 운전대에 이마를 기댄다. 라디오에선 교통정보와 함께 날씨정보가 나온다. 날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목소리의 여성 아나운서는 '비에 섞인 방사성 물질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가 없지만, 만약 걱정되신다면 안맞으시면 됩니다.'라고 말한다.(표현이 약간 달랐을수도 있지만, 그런 뜻이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저건 저 예쁜 목소리의 아나운서 개인 의견이 아닐 것이다. 어딘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분으로부터 내려온 지침에 의해 작성된 문장일 것이다. 그걸 그저 읽었을 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을 읽어버런 아나운서가 원망스럽다. 저게 대체 방송에서 읽을 문장인가? 이제는 방송이 그냥 장난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일본의 방사능 유출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미 체르노빌 수준의 위험상황이라고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사실을 은폐하고, 나중에 더 큰 사고가 터지면 뒤늦게 인정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이건 무슨 어린애 달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다. 합리적인 이유도 없고, 과학적인 근거도 없다. 그냥 걱정 말란다. 외국에선 특히 한국의 상황을 우려하고 걱정하고 있다는데, 이 나라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손놓고 있는 듯 하다. 

어제 내린 방사성 물질이 섞인 비에 대해 며칠전부터 많은 경고와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학교에 '휴교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은 자율적인 '휴교'를 허용했고, 일부 학교에서 단축수업이나 휴교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프로야구 경기는 모두 연기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다는 차를 끌고 나와서, 도로는 평소에 비해 훨씬 더 복잡했다. 행여 비를 한방울이라도 맞을까봐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평소라면 그냥 맞고 다녔을 수준의 비에도, 모두 우산을 받쳐들고 걸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평소에 비해 눈에 띄게 준 듯했다. 이렇듯 정부의 계속되는 '걱정말라'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상황을 매우 걱정하고 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거짓 선전하는 시간과 돈으로, 정확한 오염수치와 규모 등의 실제 현황을 파악하는데 힘쓰고, 이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내놓는데 더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그리고 '미량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거나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등의 표현이 아닌 구체적이고 정확한 설명으로 국민들에게 상황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어제 밤 방사성 비가 그치는 것과 동시에 황사가 날아들었다. 방사성 물질과 황사라는 무서운 위험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무섭다. 아니 내가 병이 들거나, 다치거나, 죽는게 무서운 게 아니다. 우리 아이들.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갈 큰 녀석과 아직 태어난지 일년이 채 안된 둘째 녀석이 이렇게 위험하고, 무책임한 세상을 살아갈 일이 무섭다. 어제 밤 아기를 재우다가 문득 녀석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젠장! 맨날 말로만 출산장려정책을 펼치겠다고 떠들면 뭐하나, 실제 부모들은 열악하기 짝이없는 육아정책과 무한경쟁을 장려하는 교육정책과 온갖 위험물질에 노출된 먹거리 문제와 다양한 환경문제, 부동산 문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를 비롯한 각종 생활문제, 그리고 지금처럼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정부의 태도 때문에 아이를 갖기를 꺼린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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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1-04-0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래요.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해요.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그게 너무 미안해요.

감은빛 2011-04-11 13:01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이 생길때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인 것 같아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lanca 2011-04-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반핵 운동이라는 게 사실 이 정도로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결과를 통해 관심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결국 어떤 힘이 정말 이건 아닌 거다! 라고 징벌을 가하는 것 같아요. 왼쪽 두 권의 책은 읽어 보지 못했는데 찾아 봐야겠습니다. 저도 아이를 볼 때마다 괜히 눈물이 나요. 마스크 씌우고 놀이터에서도 예전처럼 신나게 못 놀리고 비 맞을까봐 전전긍긍하고 이게 대체 뭐하는 쇼인가 싶어요.

감은빛 2011-04-11 13:09   좋아요 0 | URL
독일 시민들이 열심히 반핵운동을 펼치고,
재생가능에너지 사용에 힘을 쏟는 것도 옛날 체르노빌 사건때,
독일까지(동독지역) 방사능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옆에서 피해를 입고 있는데도,
정부부터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으니, 참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꿈꾸는섬 2011-04-0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내린 방사능비는 정말 무섭더라구요.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은 부모들의 마음인가봐요.
오늘은 황사까지......ㅠㅠ

감은빛 2011-04-11 13:11   좋아요 0 | URL
방사능 비에, 황사까지!
정말 무서워서 애들 나가놀게 하지도 못하겠어요!

cyrus 2011-04-0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일본이나 우리나라 정부나 국민들에게 불신을 안겨주는 태도를 버리고
보다 더 실황을 파악하고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총리가 막연하게 방사능 비 맞아도 된다는 식의 발언도 삼가해주었면
좋겠구요,.. ^^;;

감은빛 2011-04-11 13:13   좋아요 0 | URL
저는 라디오에서 방사능 비 맞아도 별 문제없다는 식의 망언(!)을 듣고,
무지 열받았었어요. 그렇게 말한 사람 자신은 과연 비 맞았을까요?
자기 가족들, 자기 아이들에게 비 맞아도 된다고 말했을까요?
어떻게 그런 소릴 방송에서 지껄일 수 있는지 따져묻고 싶었어요.

차트랑 2011-04-09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정부는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급적 회피하고 싶어하는 듯 보입니다. 마치 '일본의 방사능 문제가 국내의 원자력 문제로 확대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과거 핵 폐기물 처리 문제로 국민들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던 쓰라린 경험을 한 바 있는 정부입니다. 몇년 전 경주시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기로 정부와 협의한 후 핵폐기물 처리장을 수용을 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의 핵 방사능으로부터 한국은 안전하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왔습니다. 그동안 국내의 전문가들이 몰랐던 것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발표를 한 것인지... 최근 일본 및 해외의 전문가들이 한반도가 방사능에서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고 발표하자 한국의 정부와 전문가들은 안전한 수치라고 정보를 전달합니다. 방사능의 수치상 비를 맞아도 될정도로 미약하다는 것이지요.
왜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에 국민은 신뢰를 줄수가 없는 것일까요.. 저는 우리 정부를 믿고 싶은데 실제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부의 발표를 국민이 믿지 못하는 현실은 비극입니다. 제발 국민들로하여금 정부를 믿도록 해주면 안되는 걸까요?

감은빛 2011-04-11 13:15   좋아요 0 | URL
차트랑공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부가 지금처럼
어이없는 태도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반도의 방사능 수치는 점점 더 심각해질텐데,
언제까지 정부가 지금처럼 손놓고 있을지 두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4-09 0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우비입고 우산쓰고 마스크하고 입었던 옷은 폐기처분 하라는 메뉴얼을 어디서 봤습니다.
너무 유난스러운 걸까요?

그런데 말이죠, 경기도의 휴교령 그것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더라구요.
그 휴교령으로 인하여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또 어떻게 방치되는걸까 싶어서 말이죠.

어제 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한국원자력 기술원장이 나왔었거든요.
손석희 참 재치발랄햇었는데 말이죠~^^

감은빛 2011-04-11 13:17   좋아요 0 | URL
휴교령에 대한 그 의견은 저도 공감합니다.
애들만 쉬게하여 보호하면 뭐합니까?
정작 맞벌이하는 부모들은 모두 일하러 나가고 없으니,
애들이 그 시간에 어딜 싸돌아다닐지 알 수 없지요.

말씀들으니, 그 방송이 무척 궁금해지네요.
'다시듣기' 같은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4-10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그러하듯이 '걱정하지 말라'가 모든 해결의 열쇠처럼 말을 하는 국가와 거기서 일하는 놈팽이들을 보며 헐하며 혀를 찹니다. 나라를 구성하는 것은 국민인 우리가 확실한데 나라라는 추상적 개념에 개인이라는 현실적 개념이 자꾸 먹혀버리는 현실이 참 안타깝고 열 받기도 합니다. 방사능에 대한 것도 아무런 지식이 없다가 이번 사태와 더불어 하나씩 알게 되는데 무섭기는 참으로 한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일이 발생되면 그때서야 조금 정신을 차리는데 정치가라든가 이 놈의 국가에서 일하는 놈들은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니 참 한심해요. 아! 열 받아 뭐 방법이 없을지...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눈물까지 나실려고 하는 감은빛님의 마음은 참 멋있습니다. 저도 완전 공감해요.

감은빛 2011-04-11 13:19   좋아요 0 | URL
공감의 말씀! 고맙습니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루쉰님의 의견에 백번 공감합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특히 요즘은 이나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고 부끄럽습니다.
 

소를 웃긴 꽃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윤희상 / 소를 웃긴 꽃 / 문학동네



2008년 어느날 그를 처음 만났다. 광우병 수입쇠고기를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한창 열기를 더해가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살면서 가장 많은 시인들과 함께한 날이었다. 그 날은 <삶과 문학> 출판기념식이 동대문 어느 식당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대부분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가인 <삶과 문학> 동인들이 이십여명 모여서 식사를 하고 책의 출간을 축하했다. 그리고 다같이 촛불집회 장소인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작가회의 소속의 다른 작가들과 합류했다. 행진대오가 행진을 마칠 즈음 작가들과 함께 동아일보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소설가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시인이었다.

그 날 윤희상 시인을 처음 만났다. 무척 겸손하고 점잖은 모습의 그는 몇몇 작가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디론가 갔다가 나중에 다시 와서 내 옆에 자리잡고 앉았다. 처음부터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별로 말을 나누지 않고 옆에 있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에게 조심스레 건네는 몇 마디 말들로 나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노점상연합회에서 나눠주는 순두부가 맛있다고 꼭 먹으라고 내 손을 잡아 끌고 가기도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매일 밤 촛불집회에 나와서 밤을 새고 아침 해장국을 먹고 출근하는 걸로 유명했다. 그 보다 한참 선배뻘되보이는 어느 시인이 그에게 이제 그만 밤새고 집에서 가족들도 좀 돌봐야하지 않느냐는 말을 했다. 그 유명한 명박산성이 쌓아지던 순간에도 그가 최초로 신문 기자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렇게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어떤 시를 썼는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렇게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윤희상이라는 이름을 내 머리속에 집어넣었다. 시간이 늦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 그와 나는 둘이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계속 나에게 시를 써보라고 했다. 나는 뭐라 대답을 못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성명서는 좀 써봤고 이런저런 잡다한 글들을 조금 써봤지만 과연 내가 시를 쓸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글쎄 나는 시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시가 의외로 쉽다고 계속 나에게 시를 권했다. 왜 그랬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하는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그를 잊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느 저녁 촛불집회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었고,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우린 눈이 마주쳤고, 잠시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나에게 뭔가 말을 건넸던 것 같은데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인삿말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쳤다.

그제서야 그의 시를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시집을 구입했다. 그의 시는 내가 그에대해 느꼈던 첫인상만큼이나 좋았다.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세상만물을 향한 그의 따뜻한 시선이 부러워졌다! 이런 멋진 사람과 잠시나마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몹시 기뻤다. 시를 써보라는 그의 제안은 워낙 시에 대해 문외한이고, 또 시적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생각때문에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다른 글들을 꾸준히 써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주었다. 지금도 가끔 글이 안써질때마다 그가 내게 들려준 말들이 생각난다. 한번 쓴 시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하루에도 여러번씩 고쳐쓴다고. 그렇게 수십번을 고쳐쓴 다음에야 시를 완성한다고. 하나의 시를 쓰는데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문득 소를 웃겨버린 그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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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29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으니, 얼마전 뵜던 '소와 함께 여행하는법'이 생각나네요.

저도 님이 시랑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언어를 고르는 센스도 그렇고, 언어를 극도로 응축시키는 힘도 그렇고 말이죠~
'가장best'인건 의도하지 않은 감동인데 말이죠~

윤희상님이 낯설어서...그만 주제 넘었습니다~^^

감은빛 2011-03-30 12:46   좋아요 0 | URL
아유! 주제넘다뇨? 무슨 말씀을!

윤희상 시인이 워낙 강하게 권하길래, 이후로 시를 좀 찾아 읽었는데,
저는 시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만 꾸준히 관심을 갖고 읽으려는 생각중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2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곱네요. 담백하구요.
저두 소랑 함께 웃어버린 그런 시네요.
그런 분을 아시게 된 감은빛님이 부러워요. 진짜루
감은빛님이나 윤희상님 같은 분들과 막걸리 진하게 먹으며 하루 거나하게 떠드는
그런 저녁이 소원이었거든요. ^^ 저야 항상 전산 하는 친구들과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들만 해대서, 걸죽한 자리가 그립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감은빛님의 시도 볼 수 있는건가요? 그럼 전 시인을 알게되는거네요? 와!

감은빛 2011-03-30 12:49   좋아요 0 | URL
저도 마녀고양이님과 함께 막걸리 진하게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 나누고 싶네요! ^^

저는 시랑은 인연이 안되는 것 같아요.
시보다는 산문 쪽이 좀더 잘어울리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꿈꾸는섬 2011-03-2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희상님의 시를 저도 찾아봐야겠어요.^^
소를 웃긴 꽃, 너무 좋으네요.

감은빛 2011-03-30 12:50   좋아요 0 | URL
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반딧불이 2011-03-30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시인을 함께 얻으셨군요. 흔치 않은 일인데 말이에요. 감은빛님의 글도 시처럼 따듯해요.

감은빛 2011-03-30 12:51   좋아요 0 | URL
흔치않은 일이죠.
무척 소중한 만남이고, 감사한 인연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03-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쓰신 글이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굳이 나눌것은 아니겠지만 시를 쓰시는 분들은 조용하고, 겸손한 분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는데요. 한편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속은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단단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렇게 시인도 만나 얘기를 나누시는 감은빛님. 좀 부러워지려고 하네요 ^^

감은빛 2011-03-31 13:48   좋아요 0 | URL
문학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주변에 시쓰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등단한 사람들, 등단 준비중인 사람들, 그냥 취미로 쓰는 사람들.
시를 쓰는 사람들은 뭔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은,
나중에 워낙 다양한 시인들을 만나면서 조금씩 희석되었습니다.
그들도 일상생활에서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겠다 싶은 생각.

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바람결님 말씀처럼, 나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루쉰P 2011-04-0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쓴 시를 수 없이 고쳐쓰고 내보내기 까지 노고하는 것은 소의 되새김질처럼 느껴지네요. 씹으면 씹을수록 좋은 시가 나오나 봐요. 소도 여물을 자꾸 씹어 먹으면 건강에 좋듯이 말이죠. 리뷰를 쓸 때 급하게 나오는데로 써 버리는 경우가 전 많아요. 감은빛님의 글을 잃으면 저도 좀 되새김질을 하면서 써야하지 않을까란 사색을 해요. 후훗 원래 못 쓴다고 하는 분들이 더 잘 쓰던데..예전에 나 공부 안했어라고 시험날 말하던 친구가 시험 잘 보듯이 말이죠. ㅋㅋㅋ 시가 아니더라도 많이 많이 써주세요. 전 재밌게 읽고 있으니까요.

감은빛 2011-04-04 14:33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많이 생각하고, 되새김질 해본 글이 좋은 글이 되더라구요.
하지만 저도 늘 급하게 나오는대로 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유가 없고,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밑천이 별로 없어서, 더 생각해보고 싶어도 나올게 없기도 하구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루쉰님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루쉰P 2011-04-04 23:13   좋아요 0 | URL
흠...그렇게 급하게 쓰시는데도 이런 좋은 글이 ㅋㅋㅋ 좀 만 생각하시면 시 쓸 수 있으실 듯 화이팅!!

따라쟁이 2011-04-0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저를 미소짓게 하는 감은빛님.. 이라는 시를 써볼까요?
고운글입니다. ^^

감은빛 2011-04-05 13:13   좋아요 0 | URL
따라쟁이님이야말로 늘 저에게 웃음을 주시는 분입니다! ^^
고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5-09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소를 웃긴 꽃을 만나는군요. 윤희상 시인 님 참... 좋죠. 마침 저도 이 시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리뷰를찾다가 여기 잠시 앉아서 읽습니다.. 후후..

감은빛 2013-05-10 17:1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한참 옛날 글에 댓글을 주셨네요.
덕분에 저도 잠시 옛글을 읽어봤습니다.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