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려서부터 유독 참지 못하던 말이 있다. “거짓말!” 혹은 “뻥치지마!”라는 말을 들으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냈다.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는 것에 대해 유난히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절대 그러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의혹을 제기하면 화를 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입을 통해 나온 말들 중에 조금의 거짓이나 과장이 없이 100% 진실이 과연 있을까?(왠지 ‘진실’이란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마도 조금씩 거짓과 과장이 담긴 말들을 해왔을 것이다.

 

한 달쯤 전이었던가? 몸담고 있는 단체에 1박2일 수련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는 내가 당연히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전화가 왔고, 나는 그날 이미 일정이 포화상태라 못 간다는 말을 전했다. 수련회 출발일인 토요일에 예정된 일정은 4개(수련회는 제외하고)였다. 그 중 2개는 어떻게든 참석이 가능했지만, 나머지 2개마저도 참석이 불투명했다. 아니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수련회 참석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화상으로 다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아서 그 단체 게시판에 댓글을 남겼다. 대략 어떤 일정들이 있고, 현재 일정을 조율해도 다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못 가서 아쉽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시라. 뭐 이런 말들을 두드려놓고 며칠 후에 들어가 보았더니, 전화를 걸었던 그 선배가 단 한마디를 답글로 달아놓았다. “뻥치지마!” 선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함께 참여하지 못한 건 미안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4개의 일정이 있었고, 그 중 겨우 2개만 간신히 참여하고 난 후에 읽었던 터라 순간 화가 났다. 선배의 성격을 미뤄보아 아마 반쯤 농담이나 장난이었을 테고, 조금은 섭섭함을 드러낸 것이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공개적인 게시판에 하필이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내게 던져놓은 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뻥’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허풍이나 거짓말 따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다. 최근 읽은 『북극 허풍담』이란 책은 이를테면 북극의 ‘뻥’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일단 깔끔하면서도 인상적인 표지가 맘에 들었다. ‘허풍’이란 단어는 아무래도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라는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생각나게 하는데, 저 독일 고전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건, 그린란드의 영하 30〬 한겨울을 상상하면서 잠시나마 서울의 35〬 폭염을 잊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끝없이 펼쳐진 얼음 평원과 삐죽삐죽 솟아난 얼음산들 그리고 아름다운 피요르 해안들을 상상하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을 방문하려면 며칠씩 걷거나, 썰매를 타거나, 배를 타야하는 그들의 생활을 상상하는 것은 무척 즐겁고도 행복한 일이었다.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무엇보다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 덕분인 것 같다. 바로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코를 골고 잠을 잘 것 같은 밸프레드, 혈기왕성한 젊은 안톤, 고독한 사색가 헤르베트, 묵언수행자와 수다쟁이의 극단을 오가는 로이빅, 귀족출신이자 북극의 유일한 농사꾼인 ‘백작’, 어마어마한 외상으로 불 뿜는 용문신을 구매한 비요르켄, 안경을 잃어버린 덕분에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퇴역 사냥꾼 ‘낯짝’, ‘엠마’의 창조자이자 타고난 뻥쟁이 매스 매슨,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를 연상시키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빌리암 등등 당장이라도 책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실감나는 인물들 덕분에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년에 한번 들어오는 수송선을 타고 방문하는 개성 넘치는 손님들까지 더해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들어있다.

 

책 뒷날개에 보면, <북극 허풍담 시리즈>는 총 10권이라고 되어 있다. 이번에 출간된 것은 3권까지이고, 4권 이후의 출간은 독자의 요청에 달려있다는 작은 글씨가 아래쪽에 적혀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출간압박용 이메일 주소를 적어놓았다. 즉 만약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다면 4권부터는 출간이 불투명하다는 얘기다. 일단 1권이 무척 재미있었으니, 2권, 3권도 재미있으리라 생각된다. 어서 읽고 출간압박용 이메일을 한번 이용해볼까 고민해봐야겠다.

 

하필 폭염이 며칠씩 이어지는 이상기후에 너나없이 모두 힘들어하는 시기에 이 책 덕분에 잠시 더위를 잊고 재미있는 이들의 일상에 흠뻑 빠져들게 되어 좋았는데, 검색을 하다가 무서운 소식을 들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약 40% 정도의 얼음이 녹고, 나머지 60%의 얼음은 전혀 녹지 않는 그린란드에 올해는 97%의 얼음이 녹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제공한 위성사진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서울만 유난히 더운 게 아니었구나.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 일이 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그린란드의 저 개성 넘치는 주인공들이 사냥하고 술 마시며 생활하는 일상의 터전이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는 책에 어울리지 않는 위기감을 느끼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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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무 2012-08-06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위에 건강 유의하시길^^

감은빛 2012-08-08 15:0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봄나무님께서도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8-0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울 정도로 덥네요.
에어컨을 꺼야 한다는 불안감과, 끄면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위기감 사이에서 고민을...
살다 살다 지구가 걱정되는 더위는 처음이네요.
건강 유의하세요.^^

감은빛 2012-08-08 15:09   좋아요 0 | URL
죽을 만큼 덥다고 생각되네요
회사에서는 사장님이 하루종일 에어컨을 켜 놓아서 오히려 추운데,
집에 오면 도저히 이 더위를 견딜 수가 없어요!

현맘님께서도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8-0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더운 여름에 읽기에는 딱 어울리는 책이네요. 출판사 열린책들 같은 경우에는
예전에 조르주 심농 시리즈 총 75권 출간을 야심차게 준비했다가 독자 반응이
그리 높지 않아서 몇 십 권만 발간하는 걸로 끝맺어버린 뼈아픈 일이 있었죠.
사실 열린책들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않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기로
유명한데 요번에 나온 시리즈의 출간압박용 문구에 나름 열린책들만의 고심이 묻어나 있네요. 저도 읽어보고 재미있으면 압박 메일 한 번 보내봐야겠습니다. ^^

감은빛 2012-08-08 15:11   좋아요 0 | URL
아, 조르주 심농 시리즈 처음 나올 때 한번 살펴봤었는데,
그게 중단되어버렸나봐요. 안타깝네요!
출간압박용 이메일을 기재해놓은 것이 좀 재밌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 서글프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출판사의 심정이 너무너무 이해가 되어서 말이죠.

시루스님께서도 동참해주시와요! ^^

굿바이 2012-08-07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읽고 있어요^^ 2권 읽고 있는데 점점 주인공들에게 빠져들어요 ^____^

감은빛 2012-08-08 15:12   좋아요 0 | URL
벌써 2권을!
저는 7월달에 질러놓은 책들 때문에 조금 여유를 두려구요.
굿바이님께서는 어떤 평을 남기실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