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잣는 사냥꾼 거미
이영보 지음 / 자연과생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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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스파이더 맨? 가수 거미? 독거미? 나는 아주 오래전 혼자 자취하던 시절 한 장면이 생각난다.

 

오후 햇살이 한풀 꺾였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동네 후배가 누추한 자취방을 방문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지저분한 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코딱지만한 방 하나 치우는데 땀을 뻘뻘 흘린 생각을 하면 청소란 건 역시 자주 할 게 못 된다 싶었다. 못 보고 살았던 시간만큼 서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한참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말끔히 청소를 끝내놓은 방구석에서 작은 거미 한 마리가 나타났다. 나는 왠지 그 거미가 신경 쓰여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자꾸만 그쪽으로 눈이 갔다. 결국 녀석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나는 화장지를 한 칸 뜯은 뒤, 살짝 일어나서 거미를 향했다. 곧 이어 그 작은 거미는 화장지에 쌓인 채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그때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지나서 맥주를 한잔 마시다가 그 녀석이 갑자기 거미 얘길 꺼냈다. 그 후배에게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참 떠들어댔던 시기가 있었는데, 녀석은 실존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선배가 아무 생각 없이 거미를 잡았다는 사실이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난 집안을 돌아다니는 벌레를 모두 잡아버리는 지극히 평범한 도시인의 모습을 연출했지만, 그것이 내가 평소 떠들곤 했던 무슨 주의나 사상과는 배치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웬만한 벌레가 집안을 돌아다녀도 잡지 않는다. 살포시 집어서 집 밖으로 내보내줄 뿐이다.(물론 바퀴벌레 같은 건 사정없이 잡는다) 아내나 아이들이 집에서 작은 거미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무서워하면 저절로 그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럼 난 아이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한다. “괜찮아. 거미는 원래 착한 벌레야. 거미가 있으면 나쁜 모기나 파리도 잡아주고, 농사 지을때 피해를 주는 병해충들도 잡아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 그리고 거미는 절대 사람을 물지 않으니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거미를 무서워한다. 아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듯하다.

 

우리 아이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거미를 무서워하는 것은 혹시 독거미에 물릴까 걱정되어서 일까요? 이 책에 의하면 전 세계의 거미는 약 4만 여종에 이르는데, 그 중에 독거미는 20~30여종으로 대략 0.1%도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는 726종의 거미 중에 독거미는 없다고 한다. 거미는 성격이 온순하고 사람을 만나면 도망가기 때문에 일부러 괴롭히지 않으면 물릴 일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거미에 물려도 특별한 치료 없이 몇 시간 혹은 며칠 이내에 저절로 낫는다고 한다.

 

이 책에는 사람들이 거미를 무서워하는 이유를 유전자에서 찾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연구진에 의하면 먼 옛날 조상들이 천적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에 의해 생긴 공포가 그대로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후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여자는 남자에 비해 거미와 같은 벌레를 4배 더 무서워하는데, 여자는 낯선 동물을 더 무서워하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남자는 덜 무서워하는 쪽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란다.

 

이 책의 제목이 참 맘에 든다. ‘실 잣는 사냥꾼 거미’ 실을 자아 거미줄로 그물을 짓고, 걸리는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인 거미는 생태계에서 인간 외에 유일하게 도구(거미줄, 그물)를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먹이를 잡는다. 거미와 거미줄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는 1장의 제목은 ‘지구의 또 다른 주인, 거미’이다. 지금껏 지구의 또 다른 주인은 ‘개미’ 정도로 생각해왔는데, 거미도 그만큼 종이 많고 그 개체수가 많구나 싶었다.

 

또 흥미로운 점은 ‘거미’라는 이름의 어원과 개별 종명의 어원들도 자세하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생왕거미’의 ‘기생’이 흔히 말하는 다른 종에 빌붙어 산다는 뜻이 아니라 ‘황진이’와 같은 ‘기생’을 뜻한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거미 박사 김주필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불짜게거미’는 등에 한자인 ‘아니 불(不)’자처럼 보이는 검은 무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고 있다는 등 책에 소개된 많은 거미들의 독특한 이름을 설명해주고 있다.

 

아, 이 책에는 정말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은데, 시간이 없어 다 언급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하자면, 1장에서 ‘거미줄 연구’라는 부분이 정말 재밌다. 거미는 거미줄로 그물을 만들어 생활하는 정주성 거미와 깡충거미과, 늑대거미과처럼 주변을 배회하면서 먹이를 사냥하는 배회성 거미로 나뉜다. 이 중에서 정주성 거미가 치는 거미그물은 그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는데,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거미그물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특히 산왕거미의 정상원형그물 같은 경우는 예술작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가 아닌) 신비롭고 흥미진진한 거미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인 이 책을 들고 거미를 찾아다녀보자. 행위예술가 ‘꼬마호랑거미’, 멀리뛰기 선수 ‘털보깡충거미’, 흰 눈썹 휘날리는 산신령 같은 ‘흰눈썹깡충거미’, 해안가의 사냥꾼 ‘해안깡충거미’, 해충 잡아먹는 해적 ‘황산적늑대거미’, 알주머니를 입에 물고 다니는 ‘아기늪서성거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홍거미’ 등 개성 넘치는 57개의 거미 이야기를 즐기다보면 거미는 어느새 친숙한 지구별의 동반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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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무 2012-08-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글 읽으니 전 백석 시인의 '수라'라는 시가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