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흐린 하늘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냥 만사가 다 싫고 그 중에서 나 자신이 제일 싫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없어졌으면 싶었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까.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만, 내 기준에선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난 이미 없어졌으므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세나 윤회는 없다. 애초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일 뿐.
어제 평소보다 목을 더 많이 써서 오늘 하루종일 목이 아팠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로 내 원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아니 목소리 자체가 바뀐 것 같다. 톤이 더 낮아졌고 굵어졌다. 원래 목소리가 작고 목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스트레스를 이유로 담배는 또 줄창 피워댔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 뱉었다. 타들어가는 담배소리를 들으며 한숨 또 한숨, 후회 또 후회가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나는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을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그냥 내가 못난 사람임을 인정하면 되었을텐데, 왜 그에게 상처를 주며 허세를 부렸을까? 그는 또 왜 그날 따라 그렇게 신경질 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조금만 더 화를 덜 냈다면, 조금만 더 톤을 낮췄다면 그렇게 까지 되지 않았을텐데. 사실 계속 두려웠다. 이 관계가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깨져버릴까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한 사람을 잃게 될까 싶어 늘 두려웠다.
뭐라고 해야할까? 어떻게 연락해야 할까? 연락을 받아주긴 할까?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훌쩍 찾아가서 사과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내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 타버린 담배를 던져버리고, 발로 밟았다.
생활비를 다 써버려 라면 하나 사지 못하고 이틀째 굶고 있던 날, 그는 엄마 몰래 반찬과 밥을 잔뜩 싸서 가져왔다. 몰래 가져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하면서 그는 내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오빠를 위해 이렇게 애 썼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했다.
그는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지만, 주말마다 꼬박꼬박 나를 만났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싶었을테지만, 일찍 일어나 내 자취방에 와서 먹을 걸 챙겨주고, 피곤하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곤 했다. 난 그런 그에게 팔베게를 해주고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좋았다. 문득 잠이 들었다 깨면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 좋았다.
그는 화를 냈다. 집안 곳곳을 뒤져 겨우 찾아낸 동전 몇 개로 라면을 두어 개 살 지, 담배를 살지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를 사는 나를 보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왜 오빤 자기를 아끼지 않아? 왜 오빤 오빠를 함부로 굴려? 제발 그만해! 지긋지긋해!
글쎄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소설을 쓰겠다고 골방에 칩거하며 산 게 벌써 몇 달째였다. 집에서 보내주는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는 한 달을 버티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돈은 밥과 반찬이 아니라 담배와 술 값으로 대부분 나갔다. 수입 없이 더 버티기 어려워 결국 학원 강사를 선택한 날, 난 마음 속으로 소설을 포기했다.
어쩌면 그랬다.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하지만 찌질한 나는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지긋지긋하다는 그의 말이 그 구실이 되어 주었다. 나는 편하게 그를 원망하며 소설을 접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했다. 내가 부족해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고 나는 마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기억을 조작했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제일 싫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는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내가 싫다 했다. 나도 내가 싫다 그래서 나를 잘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싫은 사람을 누가 잘 돌보겠나.
나는 사실 신기했다. 나조차 싫어하는 나를 좋아해주는 그가 신기하고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불처럼 내게 빠져들었다. 허세에 가득 찬 교만하고 삐딱한 인간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 나조차 좋아하지 못하는 날 좋아하고 챙겨주는 그를 잃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싫다.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젠 느낄 수 있다. 이 관계가 이젠 더 이어지지 어려울 수 있겠다. 돌릴 수만있다면 뭐라도 하겠지만, 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안다.
슬픔을, 아픔을, 구차함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차라리 그만두면 안 될까? 이렇게 힘든 삶이라면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그만둘 용기조차 없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나는 오늘도 온갖 핑계로 자신을 정당화 시키며 살아간다. 그 옛날 그랬듯이.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