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선택은 틀렸나보다. 평소 강변보다는 올림픽도로가 덜 막힌다는 생각에 올림픽을 탔는데, 차가 많이 막힌다. 그제서야 스마트폰 네비게이션을 켜본다. 과연 다시 강변으로 넘어가면 좀 덜 막히려나. 이렇게 차가 막혀서야 무조건 약속 시간에 늦을 수 밖에 없다. 뭐라 변명을 해야 하나. 솔직하게 차가 막혔다고 말해도 별로 이해받지 못할텐데.


네비게이션은 GPS를 수신한다고 한참을 기다리게 만들더니, 그냥 올림픽도로를 계속 가라고 말한다. 교통상황을 보려고 이래저래 만져보다가 그냥 네비를 종료시킨다. 라디오 볼륨을 올려놓고, 눈을 질끈 감는다. 어차피 늦은 거 마음 졸이지 말고 느긋하게 가자. 눈을 감고 있어도 크락션 울리는 소리가 없는 걸보아 여전히 꽉 막힌 차들은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듯하다. 한쪽 눈만 지그시 떠보니 앞 차가 멀어진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오른발을 엑셀로 옮긴다. 조금 멀어졌던 앞 차가 다시 멈춘다. 엑셀을 밟고 있던 발을 다시 브레이크로 옮긴다. 이 차가 수동식 기어였다면 왼발과 오른손도 바빴을 것이다.


라디오에선 냉장고에 전화기를 넣어두었다던가, 전자레인지에 리모컨을 넣어두었다는 시시콜콜한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곧바로 볼륨을 올렸다. 청아한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노래를 듣는 순간 누군가를 떠올렸다.  


어느날 문득 눈에 들어온 그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였다. 그저 가끔 얼굴을 마주치는 타인일 뿐. 유독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내 눈에 자꾸 들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제서야 그 깊은 눈매가, 웃을때 살짝 패이는 보조개가, 시원한 입매가 내 시선을 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모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가 일에 집중하는 모습 등이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옆 사람과 수다떠는 목소리,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목소리,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목소리.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고 그저 그 목소리가 내 감각을 휘젖고 있었다.


어느날 술자리에서였다. 저쪽 옆 테이블에서 그와 다른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내 옆에도 일행들이 무언가를 주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내 관심은 오직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물론 노골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비껴 뒤쪽 대형 티비를 보거나, 그 옆 창가를 보기도 하면서,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들리지도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누군가 건배를 권했고, 소주를 들이키고 내려놓는 순간 옆 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그였다. 살짝 취한 그가 내게 잔을 채워달라고 빈 잔을 내밀었고, 천천히 술을 따랐다. 살짝 풀린 눈, 평소보다 더 쾌활한 모습, 뭐라고 말을 하다가 내 어깨를 툭 친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그의 행동에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나에게 이만큼 편하게 대한다는 뜻이니 나쁠 건 없겠지.


그날 그는 내 옆에서 이런저런 많은 말을 했는데, 깜짝 놀랄 사실이 있었다. 우리가 훨씬 오래 전부터 만나왔다는 사실.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일 때문에 마주칠 일이 많았는데, 최근까지 내가 그를 본체 만체 했다는 것. 그러다가 최근에야 내가 그를 알아봐주기 시작했다고 불평했다. 자기가 얼마나 서운했는지를 강조하며 또 한번 어깨를 툭 친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원샷!'을 외친다. 그랬던가? 내가 그를 의식하기 훨씬 전부터 우린 가끔 만났던 사이였구나. 역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그에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살면서 많이 겪었던 익숙한 상황이라 마치 영화를 보듯 뻔히 내 모습이 그려진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후회가 막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인식 범위 밖에 있었던 걸 무슨 수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땐 몰랐다. 이 관심이, 이 감정이, 이 설렘이 불러올 아픔을, 고통을, 슬픔을 미처 몰랐다. 이 노래를 들으며 갑자기 울컥 감정이 복 받쳤다. 눈물이 날 것 처럼 눈 앞이 흐려졌다. 차가 흔들렸다. 눈물을 훔치고 핸들을 바로 잡았다. 노래는 점점 더 고조되어 고음으로 올라가고,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슬프고 아팠다. 도저히 운전을 할 기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출구로 무조건 차를 몰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도는 동안 여전히 노래가 흘렀다. 마침내 어느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 노래도 멈췄다. 나는 시동을 끄고 나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후우! 담배 연기가 한강을 향해 멀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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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창고 2014-12-17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좋다고해도 실례가 아니라면 잘읽었습니다
소설같은 글에 내 옛날 이야기인듯했습니다
감은빛님 친구허락 감사드리고요 오늘 추운하루 감기조심하세요

감은빛 2014-12-17 18:21   좋아요 0 | URL
아유~ 실례는요? 무척 감사하죠! 소금창고님 인연 맺게 되어 반갑습니다! 따뜻한 댓글도 고맙습니다! ^^

북극곰 2014-12-17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눈물이 왈칵하신거에요? ㅜㅜ 덕분에 저는 간만에 노래 잘 들었습니다만, ...

감은빛 2014-12-17 18:22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는 아니구요. 밤에 쓰다만 글을 손봐서 아침에 올린 거예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락방 2014-12-1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저도 어떤 기억이 떠오르네요, 감은빛님.
아침부터..

감은빛 2014-12-17 18:23   좋아요 0 | URL
아침부터 어떤 기억이 떠오른 날엔 일이 손에 안 잡힌다던가 하지 않던가요? ㅎㅎ
저는 영 일이 안 풀리는 날이던걸요

무해한모리군 2014-12-17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아침부터...
언제나 누르면 눈물이 날것 같은 곳이 마음속 어딘가에 누구나 있나봐요.

감은빛 2014-12-17 18:25   좋아요 0 | URL
모리님 앞에 붙은 수식어를 바꾸셨군요~ ^^

누구나 그런 아픈 멍울 하나씩 갖고 살겠죠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4-12-17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샷˝ 하는 그 분위기, 그 자리에 저도 있는 것 같네요.
그 느낌, 그 기분, 그 눈물...이 싸한 겨울에 저에게도 익숙한 느낌을 주네요.
글이 너무 좋아요..^^

감은빛 2014-12-17 18:26   좋아요 0 | URL
언젠가 현맘님과도 원샷! 한 번 해보고 싶은걸요

yamoo 2014-12-1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생한 일화네요..근데, 노래를 듣고 왜 그런 슬픔을 느꼈는지 막 궁금해 집니다. 그 노래를 부르는 분이 술자리 옆에서 어깨를 툭 쳤던 바로 그분인가요? 감은빛님은 왜 그런 슬픔에 빠졌을까요? 그분이 이 세상을 하직했나요?? 글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매우 궁금증을 유발하는 글입니다..^^

감은빛 2014-12-18 17:16   좋아요 0 | URL
야무님, 그러게요. 왜 그렇게 슬펐을까요?
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네요.
야무님 말씀처럼 노래를 부른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떠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노래를 듣는 순간 그가 떠올랐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와의 여러 추억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머리속에서 돌아가더라구요.
왜 슬펐는지를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과 글이 필요할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2015-07-03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이 꺽이네요.. 이 곡을 들으니..

감은빛 2015-07-06 17:21   좋아요 0 | URL
무릎이 꺾인다는 표현, 어떤 느낌일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