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오르기
1월 말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어서 너무 기분이 좋았었다. 운동 후 곧바로 느낄 수 있는 그 성취감. 샤워 후 느낄 수 있는 시원한 쾌감. 운동 후 이틀 뒤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뻐근함 등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월부터 일터에 다시 출근하면서부터 업무와 업무 스트레스를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단 출근을 시작했으니, 매일 일정 시간을 걷고, 계단을 오르면서 가볍게 하는 운동을 매일 지속하되, 일주일에 3번은 제대로 운동해야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볍게라도 운동하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제대로 운동하는 날은 더 심각하게 줄었다. 집에 오면 그냥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 잠들었고, 아침엔 며칠씩 연속으로 코피를 흘리며 힘들어했다. 주말에 푹 쉬면 조금 나아졌다가도 월요일이 되면 다시 피곤에 치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시 열심히 휘두르고 싶었던 불가리안 백에 다시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자주 원판을 갈아 끼우게 되리라 생각했던 바벨도 며칠째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심지어 며칠 전에 마무리 운동으로 사용하고 아무렇게나 놓아 둔 케틀벨은 홀로 엉뚱한 장소에 놓여 있다. 다른 케틀벨 옆에 가지런히 놓아줄 여유조차 없이 살고 있는 건가.
그나마 사무실이 9층이라 다행이다. 아침 출근길에 집에서 일터까지 걷는 것에 더해 9층을 오른느 것으로 최소한의 운동을 대신할 수 있어서다. 계단 오르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운동이다. 우리 집이 겨우 2층 밖에 되지 않는 것이 너무 아쉽다. 한 10층 정도 살면 매일 운동량으로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글에 대학 시절 알바로 쌀배달 일을 했던 일을 썼었는데, 계단 오르기 얘길 하다보니 당시 정말 힘들었던 주문 한 건이 기억난다. 그날은 아파트 단지에서 몇 개의 동 엘리베이터가 일제히 점검으로 멈춰 있었다. 보통 쌀을 주문하는 사람들은 20kg 짜리를 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간혹 40kg 짜리를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하필 그날 18층(시간이 많이 지나서 층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5층 보다는 높았고, 20층 보다는 낮았다.) 정도에 사는 분이 40kg 짜리 쌀 포대를 주문했다. 이미 다른 동에서 10층 내외의 집 몇 곳에 쌀을 배달하고 돌아온 탓에 조금 지쳐있긴 했지만, 가게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땀도 말렸고, 가볍게 간식과 음료수를 마셔서 체력도 보충했기 때문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쌀을 어깨에 메고 출발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무척 더운 여름 날이었다. 해당 동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반팔 티셔츠는 땀으로 젖었다. 그리고 계단을 마주했다. 엘리베이터를 흘끔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점검 중'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쌀을 내려놓고 한참을 쉬었다. 허리도 돌려보고, 제자리 뛰기도 해보고. 다시 쌀 포대를 메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헉헉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고, 허벅지와 장단지의 근육에서 감각이 잘 안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허리에도 부담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어깨는 이미 계단을 몇 발짝 올라선 순간부터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쌀 포대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올리는 것도 힘든 일이라 어깨를 바꿔 메면서 잠시 벽에 기대어 쉬다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죽을 것처럼 힘들다고 생각하며 몇 층인지를 봤는데, 아직 7층 정도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9층 정도에서 한참을 다시 쉬었다. 그리고 다시 출발. 15층에서 거의 쓰러지는 것처럼 앉으며, 털썩 쌀 포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제 고지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못 올라갈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을, 아주 오래 쉬다가 겨우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층마다 벽에 기대 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몇 시간은 계단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주문하신 분의 집에 도착했다. 30대 중후반의 여성이 땀에 흠뻑 젖은 내 몰골을 보시고 시원한 물 한 잔을 주셨다. 마치 사막에서 며칠을 헤마다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맨 몸으로 터덜터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어깨에서 40kg 이 없이지고 나니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음, 계단 오르기 덕분에 최소한의 운동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얘기를 하다가 잠시 먼 과거로 다녀와버렸다. 암튼 아침에 9층까지 계단을 올라 사무실에 들어서면 숨이 차고, 온 몸에 땀이 난다.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시 숨을 고르다보면 한참 후에 땀이 마른다. 집에서 운동할 때처럼 바로 씻을 수 없어서 아쉽다.
바쁠 때일수록 딴 짓
지난 번에 마감을 맞이한 주말에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글을 써서 보냈다는 글을 썼는데, 이번 주말과 삼일절을 포함한 연휴도 비슷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준비해야 할 일이 많은 상태로 토요일을 맞았다. 일단 계획은 이랬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푹 쉬면서 잘 놀고, 월요일에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해야지. 그런데 막상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밀려있는 일 생각에 마음 편히 잘 쉬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평소보다 잠을 많이 자기는 했다. 아침마다 계속 나오던 코피도 월요일 아침에는 멈췄다.
삼일절이자 월요일이었던 어제, 마침 큰아이가 학교에 제출할 과제를 출력해야 한다길래 아이들을 데리고 사무실에 나왔다. 아이들에게 잠시 놀라고 하고, 나는 최대한 빨리 급한 것만 처리하고 나가려고 했다. 나는 늘 시간에 쫓길수록 업무 효율은 극도로 좋아진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계속 마음에 걸렸던 급한 건들을 처리하고, 이제 내일 아침에 출근해서 처리해도 괜찮겠다 싶은 정도가 되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화요일인 오늘, 오전에 회의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무지 급한 일 두 개를 처리하느라 오후 늦게까지 정신이 없다가, 발등의 불을 끄고 나서 아직도 할 일이 쌓여있는데, 딴 짓을 시작했다. SNS를 확인하고, 알라딘 서재를 돌아다니고, 흥미로운 기사 몇 개를 읽고 그러는 와중에 또 몇 건의 일을 처리하고 또 딴 짓을 하기를 반복했다.
이번 주말에 토, 일 연속 무척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금요일 오후에 강의 요청을 받았다. 그것도 딱 강의 일주일을 남긴 지난 목요일에. 강의를 요청한 공무원은 "이렇게 촉박하게 부탁을 드리는 것이 예의가 아닌 줄을 알지만, 국장님 밖에 요청드릴 분이 안 계셔서" 라고 말을 시작하더니, "작년에 교육에 참여했던 강사님들 중 강의 평가 결과가 가장 좋게 나와서" 라고 나를 추켜세워줬다. 일단 이 바닥에서 해당 주제의 강의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거절하면 해당 공무원은 대안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강의 준비할 여유가 너무 없다고 불평하며 시간을 끌었다. 공무원은 다시 "작년 강의 자료를 보니 그냥 작년에 하셨던 그대로 하셔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그대로 해도 괜찮겠지. 그 사이에 판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작년에 했던 강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 문제다. 작년에도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했지만, 그래도 대면 강의를 강행했었는데, 올해는 온라인 강의로 해달라고 했다. 작년에 학교에 보낼 강의를 녹화하자고 제안을 받아, 100분짜리 강의를 50분으로 압축해 강의 영상 하나를 찍어보긴 했는데, 실시간 온라인 강의는 아직 해보지 못했다. 이번이 첫 경험이 될 것 같다. 하필 이 바쁜 시기에 강의를 맡아 준비를 할 여유가 별로 없다. 작년 강의 자료를 열어보니 보완해야 할 것들이 눈에 띄던데, 언제 다시 강의자료를 만들고, 강의 준비를 하나. 에휴 이번 주는 정말 죽을만큼 힘들겠구나.
아, 강의 요청을 했던 공무원에게 미리 지금 내 외모 상태에 대한 경고를 전했다. 아무래도 관공서에서 주최하는 강의이다보니 나 스스로 외모까지 먼저 검열하게 되는구나. 수염을 길렀고, 머리도 덮수룩하게 기른 상태라 상당히 지저분해 보일 수 있음을 미리 경고했다. 이번 교육생 중에 작년에 내 강의를 들었던 분들이 몇 분 계시다고 하던데, 분명히 나를 못 알아볼 것이다. 요즘 거울을 볼 때마다 강의하러 갈 때 머리를 묶을까? 모자를 써도 되려나? 온라인 강의라면 마스크는 쓰고 하나 벗고 하나 생각이 꼬리를 문다. 사고 이후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 것 같다.
오늘의 반응
직속상관: 머리는 계속 기를 건가? (마스크 위로 보이는 표정이 다소 좋지 않음)
나: 네, 이번이 아니면 앞으로 평생 머리를 길러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 (마스크 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는데, 상대가 볼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음)
직속상관: 수염도 계속 기를 건가? (아까보다 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나: 네, 당분간은요. (이번에도 생글생글 웃음)
직속상관: 그래도 마스크 덕분에 수염은 눈에 안 띄어 다행이군
공동사무실을 함께 쓰는 다른 단체 활동가
: 어머! 쌤. 머리가 엄청 길었네요. 멋있어요.
(아마 사고 후 처음 마주친 것일텐데, 다행히 내 사고 소식을 모르는 것 같음. 아마 알았다면 그 얘길 먼저 하고 머리 얘기는 뒤에 했을텐데. 이렇게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 주는 일이 지금은 너무 고마움.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이젠 사람 만나는 일이 겁이 남)
전화로 조언을 구한 선배 활동가
: 살아 있었네요? 죽을 뻔 했다고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이젠 좀 괜찮아요?
(전화 통화여서 다행이었음. 목소리에서 벌써 걱정하는 티가 역력함. 고맙고 또 죄송하다고 열심히 사과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야 궁금했던 용건을 물어볼 수 있었음)
전화로 고향 선배이자 대학 선배인 활동가
선배: 야, 니 @@학번 아니었어? 오늘 오랜만에 너거 과 선배 만나서 얘기하다가 전화했다.
나: 형, 나 @@학번이잖아. 여태까지 후배 나이도 몰랐어?
선배: 아, 그랬나? 알았다. 담에 밥 한끼 하자.
(아, 이건 오늘 아니고 일요일 저녁이었다. 아마 술자리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인데, 정작 누구를 만났던 건지는 말해주지 않고 끊었다. 과연 그가 만났던 우리 과 선배라는 사람이 누구였을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지는 않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