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재미있다.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도 읽지 않았는데 말이다.  올리버 색스의 저서를 하나도 읽지 않고, 그의 자서전 온더무브를 재밌게 읽은 경험에 비추어, 그 어떤 과학자도 자서전에서는 논증적이고 논쟁적인 글뿐만이 아니라, 한껏 감상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단정한 말의 향연을 풀어놓으리라고 예상했고 그것이 적중한 듯...

 

우리가 아는 것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일까? 본성이냐 양육이냐? 문제로 정리가 되는 것 같은데, 부모가 되고 나서 나의 화두이기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리처드 도킨스 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고민한 문제일터이다.

 

이동진이 책에서인가 강연에서인가 자신은 저자 혹은 지은이의 얼굴이 표지로 나오는 책과 20대에 혹은 30, 40대에 해야 할 혹은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라는 제목의 책들은 읽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 책은 예외로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십대 중반 기숙학교 시절

174~175쪽

 

우리는 '자격증명A'라는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군대 지식을 달달 외우는 시험으로, 지능이나 진취성과 약간이라도 관계된 능력이라면 모조리 억압하려고 설계된 시험이 틀림없었다. 그런 능력은 보병대에서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우리 군대에는 나무가 몇 종류 있습니까?" 정답은 세 가지! 전나무, 포플러, 위가 삐죽삐죽한 나무(시인 헨리 리드는 이렇게 간파했건만, 우리 교관은 이런 풍자를 음미할 줄 몰랐을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또래집단의 압력이 극심하기로 악명 높다. 나를 포함해 많은 친구가 비참한 피해자였다. 우리가 어던 행동을 하는 동기는 주로 또래집단의 압력이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다. 특히 우리 중에 간간히 섞여 있는, 타고난 지도자 타입의 영향력 큰 친구들에게. 그리고 마지막 학년을 제외하고는 내 또래집단의 정서가 반(反)지성적이었다. 우리는 실제보다 덜 공부하는 척 해야 했다. 타고난 능력은 존중받았지만, 성실한 노력은 존중받지 못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였다. 경우를 불문하고 늘 공부벌레보다는 운동 잘하는 학생이 인기였지만, 그 운동 실력도 연습 없이 습득한 것이면 더더욱 좋았다. 대체 왜 타고난 능력을 근면한 노력보다 더 높이 살까? 거꾸로여야 하지 않나?

좌우간, 그 때문에 내가 놓친 기회가 얼마나 많았던가! 학교에는 가지각색의 재미난 클럽과 모임이 많았다. 어디든 가입하면 득이 되었을 것이다. 망원경이 갖춰진 천문대도 있었는데-졸업생의 선물이었으리라.-  나는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대체 왜? 지금이라면 스스로 설치하지 않아도 진짜 망원경을 학식 있는 천문학자의 지도에 따라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마지 않을 텐데. 학창 시절은 십대들에게 허비하기에는 너무 아까운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헌신적인 교사들은 돼지 목에 진주를 걸려고 애쓰는 대신 그 귀중함을 음미할 줄 아는 나이 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208~209

 

나는 옥스퍼드가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는데, 정확하게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만의 특징인 튜터(개인 지도) 제도라고 해야 한다. 옥스퍼드의 동물학 전공 과정도 당연히 강의와 실습을 제공했지만, 다른 대학에 비해 딱히 더 낫지는 않았다. 좋은 강의도 있고 나쁜 강의도 있었다. 어차피 내게는 상관없었다. 아직 강의를 듣는 목적을 깨닫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강의는 정보를 흡수하는 자리가 아니다. 따라서 내가 했던 행동(거의 모든 대학생이 하는 행동), 즉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노예처럼 공책에 받아적기 바쁜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복습할 때 필기를 참고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실제로는 공책을 다시 열어본 일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도 그랬을 것이다. 강의의 목적은 정보 전달이어서는 안 된다. ..강의는 생각을 고취시키고 자극해야 한다. 훌륭한 강사가 말로 생각을 펼치고, 반추하고, 숙지하고, 다른 표현으로 더 명료하게 만들고, 주저하고, 그러다가 덥석 붙잡고, 빨라졌다가 느려졌다 하고,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빠지는 모습. 우리는 이런 모습을 모델로 삼아서 어떤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법과 그 주제에 대한 열정을 남에게 전달하는 법을 배운다.

 

212~213

 

그의 지도는 어떤 교과과정의 어떤 수업과도 관계가 없었다. 그는 내게 역사책과 철학책만 읽혔고, 그런 책들과 동물학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은 온전히 내몫이었다. 나는 그러려고 노력했고, 그런 공부가 몹시 좋았다. ..우리가 그 사실들을 발견하도록 격려받았던 방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교과서만 파고들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서 옛날 책들과 새 책들을 살펴보았다. 연구자들의 논물으 추적했다. 그래서 결국 그 주제에 관해서는 일주일 만에 가능한 한 최대한의 수준으로 거의 세계적 권위자에 가깝게 통했다. (요즘이라면 이런 작업을 대부분 인터넷으로 할 것이다.) 주 단위로 진행된 개인 지도 덕분에, 우리는 불가사리의 수관계에 대해 그냥 읽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보고서 작성은 카타르시스였고, 튜터의 격려는 일주일의 노력에 대한 충분한 이유였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되면 새로운 주제가 왔다. 도서관에서 수집해야 할 새로운 이미지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우리는 정말로 교육받았다. 내가 조금이나마 갖고 있는지도 모르는 글솜씨는 대체로 그때의 일주일 단위 훈련을 통해서 얻었다고 믿는다.

 

225

내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자. 내가 졸업 후에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때로 돌아가자. 피터 브루넷은 생화학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나는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여 관련 문헌을 공부했지만, 그다지 열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니코 틴베르헌에게 동물 행동을 주제로 개인 지도를 받게 되었고, 그 순간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내가 정말로 씨름해볼 만한 주제가 여기에 있었다. (...) 니코는 지금까지 자신이 지도한 제자 중에 내가 최고라고 썼다. 니코가 대학생 튜터 역할은 많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평가를 조금은 무색하게 만들지만 말이다. (...) 덕분에 적어도 향후 3년 동안 내 미래는 보장되었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사실은 평생이 보장된 셈이다.

 

도킨스의 대학원 시절 동물학부의 고참이자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조언자였던 마이크 컬런에 대한 추도문

 

그가 스스로 발표한 논문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는 일이든 연구하는 일이든 엄청나게 열심히 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동물학부 전체에서 가장 인기 좋은 튜터였을 겁니다. 그는 늘 바빴고 거의 하루종일 일했는데, 개인지도 이외의 시간은 연구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연구인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누구나 똑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 당신이 연구를 하다가 문제에 봉착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도움을 구해야 할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곳에 가면, 언제나 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더없이 지적인 눈동자는 우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봉투 뒷면에 끼적끼적 적으면서 설명을 도왔고, 가끔은 더부룩한 머리카락 밑의 눈썹을 회의적인 듯이, 미심쩍은 듯이 추켜올렸습니다. 그 뒤에 그는 금세 가봐야 했습니다. 개인 지도라도 있었겠지요. (...)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이면, 당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 나는 공식적으로 니코의 학생이었지, 마이크의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이크는 내 연구가 니코가 다루기 버거울 만큼 수학적으로 진행되자 어떤 비용도 공식적 인가도 없이 나를 받아주었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시간은 언제 났을까요?(우리는 응당 이렇게 의문해보아야 했습니다.) 자기 연구를 할 시간은 언제 났을까요? 그가 논문을 거으이 발표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동물들의 소통에 관한 책을 오래 구상했지만 결국 쓰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베빙턴 로드 13번지의 황금기에 그곳에서 나온 수백 편의 논문은 모두 그의 이름을 공동 저자로 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거의 아무 데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말을 제외하고는....

세상은 과학자가 발표한 논문 수로 그의 승진이나 공로를 결정합니다. 그 지표에 따르면, 마이크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학생들의 논문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데 동의했다면, 사실 요즘 지도 교수들은 그보다 훨씬 적게 기여하고도 바득바득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습니까, 그는 통상적인 기준으로도 성공한 과학자가 되었을 테고 통상적인 명예도 누렸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 눈부시게 성공한 과학자였습니다. (...) 우리는 마이크 컬런만큼 똑똑한 과학자를 또 알지도 모릅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마이크만큼 너그럽게 남들을 지원하는 과학자도 알지 모릅니다. 쉽게 찾기 힘들만큼 적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마이크만큼 남에게 줄 것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토록 너그럽게 그것을 베푼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뜬금포 이동진 독서법 중에서 엮어 발췌

 

자연과학 쪽에 취미를 느끼게 된 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예요. 그런데 제가 문과 출신이 아무래도 자연 과학 관련 지식이 거의 없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니 초반에는 읽기가 어려웠어요. 과학 분야 같은 것도 중고등학교 때 기본적인 책을 재미있게 읽었더라면 나중에 책 읽기 훨씬 좋았을 텐데 싶어요. 지금 독서에서 넓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대적으로 한창 책에 깊이 빠져든  ...그게 좋기도 했지만 특히 십대에서 이십대는 책을 넓게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그때 내게 멘토나 누가 내게 지도를 해 주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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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8-01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icaru님, 자서전 좋아하는 것도 저랑 같습니다 ^^
그런데 DNA 이중나선 구조로 노벨상 받은 제임스 왓슨 자서전은 끝까지 못읽은 이력이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 이 책은 재미있을 것 같아요. 튜터제도는 옥스퍼드 아니라도 거의 모든 영국 대학들의 학부 과정의 특징으로 알고 있어요.

icaru 2017-08-01 20:25   좋아요 1 | URL
나인 님과의 접점은 항상 기분좋은 떨림을 줍니당 ㅋㅋ
아하 영국의 학부 체계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저는 도킨스가 그렇다길래 그렇구나 하는 ㅋㅋ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책은 확실히 다른 모든 장르의 책들이 갖는 장점을 집대성해서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게... 어떤 사안을 대할 때의 사고 체계와 안목을 키워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밌기도 하고용~
 
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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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리쿠의 신작이라고 해서 팬의 예의상 구입했는데, 웬걸, 일본에서는 서점대상과 나오키상을 최초로 동시에 수상했다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성진이 중학생 때 참가해서 우승을 했던 하마마쓰 국제 콩쿨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실제 조성진 리사이틀 때는 온다 리쿠가 잡지에 기고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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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을 권리 -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 동녘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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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애사적 계획이 우리 존재를 규정한다. 직업, 결혼, 여가 시간의 관심사, 자녀, 재산에 관한 계획이 우리를 앞질러 달린다. 그러나 때로 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길을 건너고 표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예측 가능한 여정과 너무 정확한 지도의 모습, 어제 지나온 길과 오늘 걸을 길이 상당히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걸음을 방해한다. 이게 정말 내 인생이 나갈 길일까? 어째서 매일의 여정이 지루함, 타성, 판에 박힌 느낌을 안겨 주는 걸까? -코헨, 테일러, <도피 시도>


대다수에게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선택이며, 적게 일하기는 언제든 실행 가능한 선택지는 아니다. 주기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부풀어 오르면, 다들 보다 익숙한 도피 전략에 의존한다. 그러나 일시적 도피를 보다 영구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 또다른 소비주의로의 도피는 지속적 소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불행을 유발하고 단절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이상과 현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격차였다. 해법을 찾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누구든 원하는 일을 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더 행복을 느낀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확실해 보이지만,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해법을 일상 속에서 실현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자기를 위해 꾸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사랑하는 이와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일출을 볼 기회가 얼마나 적은지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일과 여가의 혼합으로서의 자발적인 바다거북 보호 활동>


일에 대한 저항을 지켜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첫째, 소득 의존성을 기꺼이 줄일 수 있는 방법, 일 중심 사회에서 일에 대한 저항이 유발하는 낙인 및 고립감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데 사용할 만한 전략. 나는 그런 전략으로 틈틈히 육아의 세계로 도피를 택했다. 육아서를 읽는 일, 육아 일기를 쓰는 일. 물론 진정한 육아의 세계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현장에 있는 것이나,,, 나의 주업은 그게 못 되니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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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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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근은 그것이었다.

 

큰아이가 집에 있는 책들 중에서 철지난 어린이과학동아를 자주 들춰본다. --우리는 2월에 이사를 했는데, 그때 아이아빠가 이번 기회에( 이사)  애들 책들 좀 정리하자고, 잡지를 콕 찝은 것은 아니지만 에둘러 포함시켰던 것. 그러나 험하게 봐서 표지가 너덜한 것들만 버리고 절반 이상을 들고 왔다. ---  그래서 나는 아이아빠에게 저것 보라고, 버리라고 했던 책들인데 아이가 잘 보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씀인즉, 당연히 잡지는 잘 본다. 지난 것도 본다. 처음에 구독 받았을 때는 만화만 보지만, 두번 세번 다시 읽을 때는 기사도 본다. 라고. 그게 문제가 아니고, 백과사전류를 가리키며 저것들을 정리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정보를 찾고, 지식을 암기하는 산업화 시대는 지났는데, 나보고 트랜드를 못 읽는다고 한다. 남편은 나의 책 소유 방식이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나보다.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또 '흥, 알게 뭐야! '하고 같이 퉁을 놓거나 흘릴 수가 없으니 원!

물론 조금 더 넓은 데로 이사를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결심한 바가 있어 과거의 것들을 정리하고 왔다. 내가 고이고이 모아두었던 10년도 더 지난 문학계간지들, 첫직장에서 만들었던 문제집, 그것을 만들기 위해 참고했던 자료들 파지 모으는 업자분에게 열 박스도 더 넘게 넘기고 왔다. 정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판단이 안 되는 것은 이사가서 정리하자며 싸가지고 왔는데, 남편 눈에는 띄지 않게 할 요량으로 옛책들은 주방쪽 다용도실 수납장에다가 무쇠압력밥솥 같은 거랑 같이 차곡차곡 넣어두었다.(북쪽 서랍장 안에서 빛도 못 쪼이는 불쌍한 것들) 그걸 또 지적해 주신다. 낡은 사고방식이다, 의미없다, 라는 말잔치를 벌이면서....   

 

그래서 나는 최근에 산 책들은 회사에 두고 있다. 집에 잘 안 가져간다.(회사 그만두면 어디에 두어야 할까?ㅠ) 이 책도 재작년에 한참 알라딘 화제의 책으로 나왔을 때 사서 읽은 책인데, 리뷰는 못 썼고, 아무데나 펼쳐도 한 눈에 마음에 드는 구절이 등장하는 신기한 책이라고만 어디다 써놓은 거 같다.

 

일테면 지금 내가 펼쳐 놓은 부분은 "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그리고 또 펼쳐놓으니 나오는 부분은

"그해 여름에 그는 강의를 맡지 않았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병을 앓았다. 그는 원인이 불분명한 엄청난 고열에 시달렸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기운이 쭉 빠져서 수척해졌을 뿐만 아니라 후유증으로 청각마저 일부 잃어버렸다. 여름 내내 그는 너무나 쇠약해져서 겨우 몇 발짝만 걸어도 녹초가 되었다. 그래서 집 뒤편의 작고 사방이 막힌 일광욕실에서 소파 겸용 침대에 눕거나 지하실에서 직접 가져온 낡은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슬레이트로 된 천장이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서 요깃거리를 가져오곤 했다. "

 

나는 스토너의 상황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사는 모습은 달라도 그럼에도 나는 스토너다.”

 

조용하고 절망적인 생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면 생각한다.

"오늘 회사에 나가 잘 해낼(뭐 중뿔난 것을 하는 것도 아닌데...) 수 있을까, 온힘을 끌어모아도 의지가 부족하구나." 라고.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산뜻하게 눈이 떠지는 삶을 나는 죽을 때까지 살 수 없는 것일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절망의 순간에도 나 자신이 이 (직업, 엄마와 아내라는 타이틀) 세계를 싫어하지 않고 있으며, 아무리 시름이 깊다 해도 이 삶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스토너의 말년은 자네는 늙어봤나? 나는 젊어봤네. 까지는 아니어도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번듯한 생활에 대한 꿈이 깨어지면서 함꼐 망가져서 서서히 절망을 향해 스러져가는 것이 보였다. 

 

언제 읽어도 그냥 한줄한줄이 지금의 삶과 대입되는데,,,, 왜왜 남편님은 다 읽은 책은 치우라고 하는 것일까? 남편님은 이런 경지를 몰라...저런저런...  

 

 


199쪽 : 12째줄 그저 한밤중에 붉을 밝히고->불을 밝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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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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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하면 어떤 책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완독하기까지 1~2주가 흘러가고, 끝까지 읽지 못하는 책도 허다하지만, 삼분의 이가 넘어갔으면, 읽은 걸로 친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5월 연휴의 어느날 정오에 잡아서 2시에 덮었다. 보통 흡입력이 좋은 작품이 아니라서이기도 했을 것이고, 중편이어서 그랬던 것도 있을 것이다. 중편 분량에 하드커버라니, 고급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할 것까지야, 싶기도 했다.

장 도르메송의 서문을 보면 이 책은 전혀 무게감이 다른 두 이야기 즉 청소년기의 우정과 나치즘의 발흥에 대한 이야기를 똑같은 감정을 실어 결합하여 매혹적인 필치로 다루었으므로 기적에 가까운 위업을 달성했다고 했는데, 음 왜 아니겠냐마는 ㅎㅎ

이 리뷰는 세치의 혀에서 나오는 짧은 단상이기는 해도 온전히 나의 생각으로 말을 해도 되는 자리이니,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태생이 귀티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주인공 한스의 친구 호엔펠스(아 이름도 어려워.. 독일인은 다이럼?)의 곁에는 남다른 공기가 흘렀다. 아니 무엇보다도 한스는 그렇게 느낀 듯하다.

둘째 유대인과 나치라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읽히지만, 우정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 비단 청소년기의 우정만이 아니다. 한스에게 호엔펠스는 처음 열여섯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와서 세월이 많이 흘러도 떠나가지 않았다. 큰 행복과 큰 절망의 원천이었다.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 마흔이 지난 이 시점에서 더듬어보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다. 시간과 관심으로 공을 들여야 할 대상이다. 저절로 내 속마음을 알아준다는 지음이라는 성어가 있기도 하지만, 저절로 시간을 들이고 있고, 관심을 갖게 되는 그리하여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의 우정을 이어간 시기는 그 강렬함에 비하자면 짧다. 어른들에 의해 끝이 난 우정이지만, 끝이 난 것이 아닌 것. 한스와 호엔펠스가 아니어도 우리는(일반화할 게 아닌가? 다시 말하면 나는?) 갖고 있다. 예민한 청소년기에 강렬한 우정~ 그러나 지속되지 않았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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