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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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부피에 비해 무척 가볍고, 종이질은 투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재생 종이인 모양이다. 이 책의 메시지를 반영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된 미래'에는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과연 뭘 배우게 되는 것일까. 글쎄, 특별히 뭘 배웠다기보다는 솔직히 이런 저런 씁쓸한 생각들이 들었다. 앞부분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라다크가 관광이다 뭐다 해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기 이전, 제 1부 '전통' 읽을 때는 마음 속에 따뜻한 느낌이 차올랐다.

저자는 라다크인들의 얼굴엔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토록 험악한 환경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안락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라다크 사람에게 웃음이 많고, 분노나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그들의 가치관과 종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점차로 그 사회를 형성하는 외부 구조, 규모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한 구조는 개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또 그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을 강화하며, 가족과 이웃에서부터 다른 마을 사람들과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라다크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까지가 행복이다. 그 다음은?

그런 라다크가 개발과 관광 개방 따위의 정책에 노출되면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문화를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그렇다. 또한 교육의 패턴이 바뀌었다. 라다크의 교육은 아이들을 서구화된 도시 환경 속에서 좁은 전문가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있었다. 결국 라다크인들은 점차로 그들의 문화와 자연으로부터 갈라지게 되었다. 현대 교육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주위 상황을 거의 보지 못하도록 하는 눈가리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원을 사용할 줄 모르고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학교를 마친다. 그들이 받는 교육은 뉴욕 사람들이 받아야 할 교육의 빈약한 변형이다.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는 부모 세대를 부끄럽게 여기고, 농사가 아닌 도시에 나가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불안정한 현금 수입을 위해 자신의 문화와 독립성을 버리게 된다. 이는 곧 삶의 질의 심각한 저하를 의미한다.

지구촌에서 떠받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다는 것은 자신의 문화와 뿌리를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거기에 따른 소외는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폭력이 잔재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으며, 그 모습의 뒤에는 바로 소외가 있다.

라다크보다는 조금 더 산업화된 사회에 사는 우리 또한 상투화된 대중 매체가 주는 이미지의 피해자가 되어 있지만, 현실과 서구적 이상과의 간격이 훨씬 더 넓은 제 3세계에서는 절망적인 느낌이 그만큼 더 강한 것이다.

물론 개발 도상 국가의 사람들 또한 이런 현대화가 종족 간의 적대 관계를 악화시킨다던지 하는 악재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진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이 부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17년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간계가 물질적인 부나 고급 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자연에 기초를 둔 전통적인 사회가 여러 가지 결함과 한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선진 사회보다 더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고도의 기술 문명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정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인 생명력과 그것의 다양성이며,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잘 알며, 서로 잘 어울려 사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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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만든 카를로스 곤의 파워리더십
아타가키 에켄 지음, 강선중 옮김 / 더난출판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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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최고위 의사 결저자들은 대부분은 본국인이다. 그러나 카를로스 곤은 예외다. 거는 레바논계 브라질인이다. 그래서 더 주목하게 되는 걸지도....

현재 직장 생활을 하면서 특별히 '성공한 최고 경영자'로서의 나의 모습을 꿈꿔 본 적은 없었다. 자질도 안 될뿐더러, 사명감과 책임감이 무지막지로 요구되는 최고 경영자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 것인지는 꼭 그 자리 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으니까. 그렇다. 억만금을 준대도, 못할 것 같다. 철저하게 비용을 삭감하여 자산 매각을 하거나 내부 구조 조정을 단행하는 따위의 성공했다는 경영자들이 행하는 일들을 과감히 벌릴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이 못되니까.

얼마 전에 내가 아는 사람이 다니는 모 회사에는 공문이 하나 돌았단다. '2003년부터는 회사의 양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에 심혈을 기울이겠다'는 요지의 공문이었다고... 여전히도 순진한 당사자는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주변에서의 해석은 달랐단다. 그 공문은 '더 이상은 신규 채용은 없을 것이며, 필요하면 감원이라도 불사하겠단' 뜻이란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게는 감원이 단행되더라도 그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지라는 생각보다는 잘리게 되면 잘림을 당하는 거지. 뭐. 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권고 사직 같은 거라면 적어도 실업 수당 내지 퇴직 위로금은 더 챙길 수 있어. 라는 생각과 함께.

이 친구 왜 이렇게 맥빠지게 직장 생활을 할까. 워낙에 열정 없는 천성이고, 시키는 대로 하고 공격하는 대로 당하는 성격이라 이 모양일까. 천성이 위와 같아서가 아니라면 이것은 잘못된 근무 환경이 위와 같이 친구를 만들어 놓은 것일 거다. 훌륭한 경영자는 회사를 사원이 재능과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는 데에 있을 거다. 이 친구가 어떤 경영자를 만났어야 지금보다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봄서 이 책을 읽는다.

이 책에 나오는 카를로스 곤은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해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닛산 자동차를 위기에서 구해 세계의 시장으로 거듭나게 만든 최고 경영자 카를로스 곤의 경영 전략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9년 6월 곤이 최고 경영자로 취임될 당시의 그의 의지를 제대로 피력하기에는 여러 가지 악재가 따랐다. 대기업병, 관료적인 체질, 파벌주의, 노사의 유착 관계 등이 그것인데, 지난 몇 십년 간 만연해온 닛산의 이런 폐해를 근절하고자 곤은 프랑스인 특유의 확고한 의지와 실행력으로 밀어 부친다. (올해 중반을 강타하던 히딩크 열풍이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맨 먼저, 하청업체를 바꾸고, 업체 수를 줄이고 하는 둥의 노력을 통해 비용을 삭감하고, 자산을 매각하여 현금화한다. 대량 인원을 감원하여 구조를 조정한다. 이 와중에 주변에서 일어나는 거센 저항이 없었다면 거짓말. 그러나 마치 냉혈한처럼 그에 이랑곳 않고, 의지대로 실행 해 나간다. 그리고 이전에는 그 어떤 임원들도 눈여겨 주지 않았던 닛산 내의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요소요소에 과감하게 간부급으로 기용한다. 이렇게 마련된 기반 내에서 최하 말단 사원과도 케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확고한 시스템을 구축한다.

원래 일반적인 경영자들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어 개혁을 실행하려 해도 너무 저항이 많아서 생각대로 전혀 되지 않는다는 한결 같은 목소리를 내곤 하는데, 카를로스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책의 제목, '리더쉽' 앞에 '파워'가 붙은 이유일 것이다.

후기에서 일본인인 필자는 '일본인들은 자기 개혁에 서툰 민족'이라고 시인한다. 외압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개혁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카를로스의 이런 단행이 잘 먹힌 걸 보면, 카를로스의 경영 철학이 너무나 특출나서라기보단 일본인들이 (한국인들 만큼이나) 외국인 특히 서구인에게 약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각설하고, 진정한 리더쉽이란 직원들에게 일할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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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줍는 아이들 1
로자문드 필처 지음, 구자명 옮김 / 김영사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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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딱 10년전에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나보다. 대학 1학년 때 선물 받은 책이었지만, 그간 내 손을 한번도 타지 않고 책장에서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 10년간 이 책을 읽지 않은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이 책이 재밌다'는 이렇다할 입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당시 나는 '외국 번역 소설을 읽히지 않더'라는 편협한 취향을 갖고 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재미를 아직 보장 받지 않은 두 권짜리 장편의 소설은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독서에 게으른 사람이었던 때문이다. 난 그냥 이 소설이,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어느 바닷가의 무명씨의 어린 딸들과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ㅡ.ㅡ;;

그러던 최근 어느날엔가 영풍 서점에 갔다가 스테디셀러 쪽에 여전히 떠억 하니 자리잡고 건재하고 있는 이 책을 발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책들은 쏟아지고 그래서 가판대에 오르는 책들도 늘상 바뀌게 마련이며, 또 너무나도 쉬이 절판이 되는 요즘 같은 때에, 10년전에 나온 책이 표지 디자인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나오고 있다는 반가움 때문이었을까.....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부랴부랴 이 책을 찾았는데, 1권은 어디로 갔나 보이지 않고, 2권만 있었다. 그래서 다시 1권을 구입하고는 밑져야 본전이니 읽어보기나 하자며 잡기 시작한 책이다.

정말 밑져야 본전인가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페넬로프 할머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전쟁의 와중에 그리 유복하지만은 않은 환경에서 살아간 인물로, 고집스럽지만 고루하지 않은, 사람내 물씬나는 주인공이다. 참 멋진 사람이다.

이 소설은 영국 특유의 시골 생활이 그려진다. (특히, 여기에서 그려진 2차 대전 당시 영국 시골은 궁핍하지만 마음 씀씀이들은 넉넉했다.) 그리고 주인공 페넬로프를 중심으로 각기 다른 세 남매와 페넬로프의 인생과 관련된 또다른 인물들 삶의 스타일을 그린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주인공 페넬로프가 화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림 '조개줍는 아이들'(훗날에 화가의 역량이 재조명되고, 큰 재산 가치를 갖게 되는)이 누구에게 돌아가느냐를 두고 스토리를 펼쳐가는 구도이다.

이 책을 통해 느낀 것.

부모의 무엇보다도 큰 역할은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알아서 살 수 있는 자립심을 어릴 적에 키워주는 것이 아닐까. 고기를 잡아다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 말이다.

페넬로프의 세 자식 중 두 자식은 어머니(페넬로프) 소유의 그림 '조개줍는 아이들'에 대한 처사에 전전긍긍한다. 어머니에게서 더 얻어낼 것이 무엇인지 집착하는 자식들이다. 페넬로프는 멋지고 훌륭한 어머니였지만 자식 농사의 산물은 부모의 심성과는 무관했던 듯 싶다. 어미의 생각과는 달라 늘 부딪치고마는 탐욕적인 낸시와 노엘이 안타까웠다.

이 책의 지은이 로자문트 피처는 영국의 박경리 쯤 되는 작가로 보인다. 장편을 풀어가는 역량이 대단하달까.

인상 깊은 구절....

....주사위는 던져졌다.
설명은 나중에 햇살도 나중에
모든 것은 나중에 답이 주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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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꼬네집에 놀러올래
이만교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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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읽고, 서평을 썼던 일을 떠올려 본다. 막상은 재미있게 읽고도, 서평으로는 별로라고 써지던, 정말 이중적인 모습을 연출했었다.

이번에는?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꿈꾸는 것은, 책을 덮고 났을 때 그 글의 작가가 친구처럼 느껴져 언제든지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소설을 쓰는 것입니다. 라고. 그렇다면 소설가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요. 다소나마 작가님 꿈에 근접하신 듯 보입니다.

이 소설... 앞부분은 진짜 재밌었다. 벽에 기대앉아 가볍게 만화책을 넘기는 거 보다 더 발랄하고 박진감 있게 책장이 넘어갔다. 주인공네 가족들이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중에 그것이 미국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모텔 켈리포니아로의 여행인 걸 알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된 이후부터 어쩜 저렇게 재밌게 쓰냐...감탄을 연발했지만, 서서히 끝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결국, 여자 친구 해연이가 주인공을 떠나는 장면에 가면 페이소스랄까. 웃음의 정체는 서글픔으로 둔갑해 버렸다. 내 느낌이 그랬다. 게다가 여자 친구의 결별 선언을 듣고, 여자 친구가 교통 사고를 당하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든지, 사실은 친구와 결혼한 여자 친구를, 멀리 유학 가서 가끔 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받
아들이는 주인공의 이러저러한 모습들.... 허허...

이런 소설은 읽을 땐 유쾌해서 좋지만, 다 읽고 나면, '왜, 나는 저 소설보다 나은 상황에
살면서도 항상 찌들어든 모양새로 살까' 하는 자책이 들곤 한다. 저 속의 세상은 넉넉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못한 형편이긴 하지만 '소설' 속의 세상이기에 유쾌한 건가. 아..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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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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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쓰는데 꼬박 6년이 걸렸다고 했다. 350권의 책과 1천여 편의 논문 등이 동원됐다하니 말이다. 그러니 독자 또한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기에는 양으로보나 질로보나 무리가 따를 법.

이 책은 리프킨이 펴낸 '미래 사회 가상 시나리오'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인데, 이 글이 본래의 시나리오라는 장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미래 사회를 내다 보는 그의 상상의 밑바탕에는 바로, 조목조목 경제 사회 문화적 측면의 현 상황을 들어 그의 가상을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들과 실천적 지식들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는 더 이상 소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온갖 물건을 빌려 쓰고 인간의 경험 세계까지 돈을 주고 사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리프킨의 말대로 '더 이상 일해서 번 돈을 재산의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두는 데서 얻었던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 거' 라는 생각을 하면 웬지 세상이 재미없어질 것 같기도 하다.

독자의 이런 볼멘소리가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 리프킨은 다음과 같이 또 말한다. '접속의 삶의 양식으로 변화하면서 재산을 축적하는 데는 별다른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다시 놀이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이다. 산업 경제에서 일이 중요했던 것처럼 문화 경제에서는 놀이가점점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인생을 미완의 예술품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접속의 사회에서는 이래저래 쇼가 횡행하게 되는 셈이다. 모든 기업들은 쇼비지니스를 하고, 각 개인은 연기자가 되어 인생의 매 상황을 연기로 구현하며 사는 삶을 즐기게 된다고 말이다.

얼마 전에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아는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베트남 여행에서 배낭 여행족들은 크게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양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그런데 두 부류 간에는 여행을 즐기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미국인들은 주로 이벤트적 성격이 강한, 몸으로 하는 리조트를 일테면 엿을 직접 고아 본다든지, 뗏목을 직접 몰아 본다든지 하는 것들에 열광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지방색이 두드러지는 기념품들을 구경하고 그것들을 사들이며 챙기는 것에 유독 흥미를 보인다고 했다.

리프킨의 말처럼 세계가 재산과 물질의 소유에 의미를 두는 사회에서 경험을 접속하는 사회로 나간다는 이론에 대입해 보았을 때, 일본인들이 더 세계화 되거나 문명화가 된다면 결국엔 미국인처럼 되게 된다는 공식이 나온다. 글쎄...'저자인 리프킨이야말로 미래 사회를 예언하는 저술가이기 이전에 전형적인 미국인이었군.'하는 본말이 전도된 생각부터 든다.

네트워크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질 인간의 행로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이다. 이 관문 앞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나가 접속할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여 모든 이가 컴맹을 면하게 만든다고 해서, 접속의 시대가 갖고 있는 거시적인 문제(네트워크의 관문 앞에서 접속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가 풀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접속을 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주체가 바로 누구냐는 문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리프킨은 이 주체를 '정치적, 상업적 영역'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접속 관계의 사회학적 정치적 의미를 정의하는 작업은 여전히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고 여운을 남기며 끝내 단정을 짓지는 않았지만....) 나는 리프킨이 암시한, 이 '접속의 여부를 결정하는 판단관(정치적 상업적 영역)' 때문에 그의 가상 시나리오에서 보여 지는 미래 세계가 어쩐지 디스토피아처럼 여겨진다.

나 독자는 앞으로 도래할 미래 사회에서 어떤 형태의 접속을 해야 할까. 리프킨 씨가 '깊은 심연'까지는 보여 주었는데, 나 독자에게는 그에 상응할 만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전망을 찾는 건 둘째치고, ... 이 책과 여러모로 닮은 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듯한 '노동의 종말'부터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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