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 -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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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부터 한비야의 책을 읽었다. 이번 편은 중동과 아프리카 편이다. 보통 여행기 에세이는 장소만 달리하고 그 밥에 그 나물 타령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특히 한비야 님이 쓴 여행기의 경우는 '오지로 갈수록 사람들의 인정은 더 훈훈하고 소박한 것에 기뻐한다.' 라는 명제가 항상 깔린다. 그럼에도, 읽고 또 읽고,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주기적으로 한비야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왜 일까.... 그의 여행기에는 항상 자신감이 뭍어나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정말 별의 별일이 다 벌어지게 마련일터이다. 그렇게 수많은 어려움과 특이한 상황을 겪어내면서, 비야님은 이제는 어떤 일이 닥쳐도 어렵긴 하지만 할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단단히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행기도 여행기지만...사실...저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항상 주먹을 그러쥐게 된다. (물론 일면의 한비야는 너무너무 비위가 좋고, 지나치게 낙천적이며, 겁날 만큼 화끈해 보여서 약간의 거부감도 생기게 하지만 말이다.)

한비야라는 사람의 프리즘을 통과해 그려진 중동과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대체로 소박하고 따뜻하게 보였다. 워낙에 한비야는 인간의 정을 포착해 내는데 기민한 사람 같기도 하다. 뭐, 모스크바에서는 그 곳 사람들의 무표정과 무관심 무반응에 당황하기도하고, 각 나라를 거칠 때마다 시시종종 불친절한 세관들과 무섭게 싸우고 서로 을러대며 국경을 간신히 넘어다니곤 했지만 대체로 이 지역 구비구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비야에게 제2의 엄마, 아빠, 동생들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좀 유명하다 싶은 관광지엘 가면 한비야가 항상 듣는 인사말이 곤니찌와란다. 지금이야 덜하지 싶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배낭 여행객들이 흔치 않아 있었던 일일 것으로, 앞으로는 경험을 자산으로 여기는 피끓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많이많이 세계에 여러 곳을 두루 보고 견문을 넓힐 기회를 가졌으면,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경제 사정에 차별을 두지 않고, 여행을 떠나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7박8일 모스크바에서 시작해서 동으로 동으로 블라디보스톡까지 만여 킬로미터를 가는 여정에 관한 것이었다. 아, 그런데 한비야는 이 기차 여행의 마지막날, 기차 멀미와 여러 가지 여독 증세가 겹쳐져 앓아 눕게 되고, 한국 땅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기운을 차리려 애를 쓴다. 역시 사람이란 여행을 떠남과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과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 대해 안도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한비야는 서른 일곱에 이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가로질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이 것이 그렇게 먼 이야기도 아닌 것이, 북한을 관통해서 연해주까지 올라가면 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톡이 코 앞이다. 게다가 북한과 손잡은 철도 산업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요즘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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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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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중세 수도원이다. 주인공 수도사 '나'가 또다른 주인공(?)인 어느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를 만나면서 사건(어쩜 사건이라고 붙일 수 있는 이 소설의 줄거리 자체보다 '나'의 의문들과 호기심의 흔적들을 따라가 보는 것이, 이 작품에서 더 건질만한 무엇인지도 모르겠다.)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나'는 먼저 연금술사의 강인하고 총명한 모습에 반한다. 그에게서 정신의 위대함을 통찰한다. 그러면서 연금술에 수행되는 이교 철학에 호기심을 느끼는데 이 과정에서는 속속 빨려들듯 읽힌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 연금술사 피에르가 숲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어느 동굴로 향하는 그의 뒤를 밟게 되는데.....

스티븐 킹의 원작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면 일식 때에 생기는 잠깐의 어둠을 틈타 아내(클레이본의 엄마)는 시시종종 자식(클레이본)을 성희롱하던 주정뱅이 폭력 남편이 구덩이에 빠져 죽게 만든다. 일식 때에서야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죄의 대가를 치루게 되었다는 설정으로 보여 진다.
이 소설에서의 '일식',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빛에 의해서 생기는 달의 그림자가 지구에 생겨 태양이 보이지 않고 깜깜해지는 이 때는 어떠했던지....
수도자이면서 동시에 이단자인 '나'. 상반된 두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는 '나'처럼, 남자인 동시에 여자인 안드로규스의 어마어마한 실체가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것은 영(靈)인 동시에 육(肉)이며, 태양과 달 그 둘의 결합이기도 했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주제다. 상반된 것들의 결합과 관한 것이라니, 그래서 이 소설의 문체가 현학적인 포즈를 취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혹 이제 막,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을 접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의 작품 <일식>을 읽은 다음에, 이후 작품인 <달>을 읽는 것이, 작가의 행보를 관찰하기 좋을 것이라고...... 바꾸어 말하면 <달>이 <일식>보다는 좀더 다듬어진 수작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일식>은 <달>에 비해 작품의 뒷부분이 주제의 무거움(영혼과 육체, 남자인 동시에 여자, 금단의 지식 등등)에 깔려서 엉성함을 면치 못했다는 혐의를 남긴다. 그럼에도 <일식>이 아쿠다카와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또 이 작가의 첫 작품이었기 그런지 뒷부분에 심사평과 작가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염불 보다 잿밥에 더 구미가 당겼던지, 본 작품보다도 이 글을 쓴 어린 작가가 어디서 튀어나왔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무엇무엇을 준비한 끝에 이 소설을 썼으며, 종합하여 어떻게 생겨먹은 작가인지를 말하는 그 부분이 더 읽는 재미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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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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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각종 리뷰를 훑어보았다. 어디에고 똑같이 쓰여 있던 말은 이 이야기에 대한 결말을 듣지 말라는 것(옮긴이 또한 후기에서 줄거리만큼은 절대로 소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해 그런 평도 있었다. 이 소설의 저자는 말재간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 소설을 아주 지능적으로 썼다는 얘기였다. 일단 읽고 나니 작가가 보통 똑똑이가 아니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쌍수를 들고 공감하는 바이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에 보았던 니콜 키드만 주연의 영화 디아더스가 생각난다. 이런 류의 영화는 그 결말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임에도 언급을 하자면 (벌써 개봉 한지 1년도 넘었으니, 볼 사람은 다 봤고, 그래 알 사람은 다 안다고 생각되어....)그 영화에서의 마지막 반전은 '네가 귀신이 아니라, 내가 귀신이란 말이더냐'였다. 귀신에게 그토록 시달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생지옥을 조성하고 있는 장본인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기만시켰다는 류의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늘상 팔에 솟은 소름을 쓸어내게 된다.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촘촘한 대화의 그물망으로 엮어 내었다. 재밌다. 그리고 읽으면서 생각한다. 나 자신은? 또 다른 나 자신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지옥불을 선사(?)받고 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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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링
쭝청 지음, 김미란 옮김 / 다섯수레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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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링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았던 것은 <천안문>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 여든 하나의 삶을 산 그녀의 인생은 독자가 보기엔 너무나 곡절이 많았다. 한 사람에게 인생의 희비의 순간이 그토록 천차만별로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노릇일 정도였다. 그렇다. 딩링에게 자꾸만 마음이 갔던 것은 그녀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존경스러워서라기 보다는 그녀의 전설과도 같은 일생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딩링은 1904년 망해가는 청제국 말기에 태어났다. 상하이와 베이징을 전전하며 무정부주의 사상도 접해 보고, 스물에 만난 남편과의 신혼 시절(달콤한 신혼이라고 표현하기 뭣한 것이 이들은 공산주의 사상과 생활의 실천을 위해 서로 떨어져 생활을 하는 둥 그립고 애틋한 시기 또한 보내게 된다.)에는 낭만적 감상주의 풍의 소설 < 소피의 일기>를 써서 세간을 집중시킨다.

그러던 중 1931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결렬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남편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녀는 점차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바꾸어간다. 원래 혼자 있기 좋아하고 남과 어울려 움직이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작가 딩링이었지만 점차 단체의 임원으로, 주임으로 직책을 맡게 되면서 상황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선전 집회에서 강연도 하고 통솔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어제의 문학 소녀가 오늘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그녀에게는 어린 두 남매가 있었지만, 아이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그녀는 이제 투사가 된 것이다. 그렇게 대중 사업의 탁월한 간부로써, 바쁘게 시간은 흐르다가 1960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녀는 알량한 엘리트 작가주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갑자기 가혹하게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시골의 농장에 보내지게 되고, 예닐곱살짜리 소녀들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히고, 외양간에서 자는 둥 모진 고문과 탄압 감시의 나날을 십오여 년간 보내게 된다.

왜 이렇게 갑자기 그녀가 우파로 몰리어 수모를 당하게 되었나. 그것은 그녀가 젊은이들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발을 만드는 일이라면 백 켤레를 만들어도 똑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 오직 한 켤러만 잘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창작은 다르다. 오직 한 작품이 좋은 것은 괜찮으나, 백 개의 작품이 모두 비슷해서는 안 된다.'

1976년 드디어 문화 대혁명의 기간은 끝나고 새로운 중국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면서, 딩링에게 입혀진 혐의도 벗겨져 다시 옛날의 주목받던 작가 딩링으로 돌아간다. 그녀의 나이 이제 황혼, 70살에 말이다. 전국 각지에서, 서방에서 그녀에게 인터뷰가 쇄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수난받았던 작가 딩링은 공산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리고는 대부분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지탱하게 해 주었던 신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딩링은 온갖 풍상을 겪은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이란 차라리 무명유실(無名有實)한 것이 낫지 절대 유명무실(有名無實)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명실상부(名實相副)한 것조차도 좋지 않다. 당시 나의 명성은 너무 눈부셨고, 그로 인해 재난이 뒤따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김진애의 에세이에서 보았던 구절이 생각나는 건 뭘까. 여자가 일을 일로써 하려면 넘어야 되는 몇 가지 고개들. 중에 이런 게 있다. 일단 일을 좀 한다 싶고 눈에 띌 만하면 '너무 크게 조명을 해서 더 크게 자랄 제목을 지레 말려 버린다.' 라는 구절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는 딩링이 겪은 그 모든 파란의 세월이 단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에 겪었다고 보여지지는 않지만, 웬지 내 눈엔 다소간의 의심의 소지는 있어 보인다. 문혁을 계기로 기다렸다는 듯이 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여성 작가에게 내려진 비난과 죄목들이라니.

그러나 그녀는 이 모진 순간(느닷없이 우파로 몰리는)에, 난리를 당하고도 의연하게 대처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가 힘들 때 정녕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모성'이라는 것을 또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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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즐거움 (양장)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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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대학 2학년 때이다. 사회학 개론 수업에서 레포트로 주어진 책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억지춘향으로 읽었었다. 그 땐 학문이 도저히 즐거워질 리가 없던 시절이었다.(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그래서 약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나마 얻을 수 있을까' 하는 흑심(?)을 품었다. 그래서일까 최근에 다시 꺼내 펼쳐든 이 책엔 다음과 같은 부분에 밑줄이 팍팍 그어져 있다. '인간은 1백 40억개나 되는 뇌세포 중에서 보통 10퍼센트만 사용한다......' 같은. 당시엔 기억하고 외우는 학문의 방법적인 측면에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던 이즈음의 어느 늦은 밤에,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수학 <정석>의 저자 홍성대가 가요무대의 명엠씨 김동건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와 이야기하는 걸 보게 된다. 홍성대 님의 수학 정석의 인기는, 막말로 지금까지 팔린 <정석> 쌓아 놓으면 에베레스트산을 120번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가난했던 홍성대는 대학 재학 시절 등록금과 용돈 마련을 위해 수학 과외 지도를 했었고, 지금의 <정석>은 그때 당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만든 과외 지도 교본이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언젠가 읽었던 일본의 어느 수학자가 학문을 하는 기쁨에 대해 써 놓은 책을 읽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학문을 하는 기쁨이 어떠했다고 했는지 다시 한번 그 수학자의 겸손한 일담을 회상하고자 학문의 즐거움을 찾아 읽었다.

다시 읽어보니, 이제는 지난 시절에 읽던 내용과는 또다른 측면에서 행간이 읽히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아 그냥 가만히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즈음 나는 밤에 잠을 자다가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까지 수만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 대다수가 회사 일 생각이다. 뭐 엄청난 업무를 한다고 이러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한다.언제부터인지 나는 이렇게 회사일 때문에 조바심 쳐대는 버릇이 생겼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끈기를 발휘하는 일,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리는 일과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일상을 뒤돌아본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심각하리만큼 중심을 읽어버리게 되는 날이 몇 번인가 또 찾아올 것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때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씨의 이 책을 펼쳐 들게 된다면 .....?

그러나 딱 한가지 이 책에서 거슬렸던 것 4장 <자기 발견> 부분을 보면, 하버드에서 공부한 그가 미국의 학풍이 다양성을 중요시한 다고 목소리 높여 칭찬하는 부분이 있다. 다양성까지는 좋은데......... 미국과 일본의 학풍을 비교하고, 자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견지를 취다하보니, 조금은 친미론적인 글이 되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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