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차이
알리스 슈바르처 지음, 김재희 옮김 / 이프(if)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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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세상일에 허덕이느라 남자들의 수명이 짧아져서 혼자 남은 과부가 많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집과 직장 두 곳에서의 이중 노동에 시달리는 여자들이 수명을 다하지 못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홀아비가 많아지는 추세라고.'

좋은 책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누구나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한다. 젊을 때 읽고, 생각할 기회를 먼저 갖는다면, 그리고 생각의 변화에 따라 행동도 바뀐다면 더할나위 없고 말이다.

이 책은 특히 여성의 사례를 인터뷰 형식으로 보여 주고, 거기에 저자의 평이 붙는 방식이라 좋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식의 개론적인 설명보다는 구체적인 생활을 예를 보고 듣는 게 아무래도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의 공감대가 잘 형성이 되니까. 이 책이 많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현재 독자인 나 자신이 앞으로 당면할 현실에 비추어 생각할꺼리를 끄집어내게 된다. '(아내나 엄마로서의) 여성의 역할과 일'에 대한 것 말이다.

20대 초,중반까지는 그랬다. 많이 늙어서 운신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직업을 갖어야겠다고. 왜냐, 타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내가 직접 땀흘린 댓가로 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사람, 노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을 달려 30무렵이 되자,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적인 실체를 띠고, 여성으로서 직장 생활을 유지하는 데 제동을 거는 문제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경력이라는 게 붙을수록, 일에 대해서 여유만땅일 줄 알았는데, 되려 이런저런 압박감이 가중되는 거 같아 힘에 부친다. 전직을 할까, 그런데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육아 문제는 어떻게 할까. 직장일도 힘에 부치는데 여차하니, 들어앉아 아이 키우고 살림에나 공들일까? 하는 생각. 그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직장일을 그만두었다고 하자. 그 다음의 시나리오는?

그건 아마 이렇게 이어질 것이다.

아이가 자란다. 피아노학원도 보내야 하고, 영어 학원도 보내야 하고 하니 남편 월급으론 많이 쪼들릴 터. 그래, 푼돈이라도 살림에 보태야지 않겠어. 나름대로는 야무진 목표로 악착같이 일하러 다닌다. 직장에서건 집에서건 신통한 대접은 못 받을지라도.

가정을 돌보고, 아이를 돌보고, 여튼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 일로 굳어져 버렸다. 물론 가사 노동은 사회에서 대단히 가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사실은 이런 이들이 남자들 혹은 사회에서 보는 기준에 따르자면 저급한 일로 평가 절하되기 일수라는 데 문제가 있다. (정말 이런 평가는 부당하다. 부당한데 어쩌랴. 현실이 이런 걸...)

이 책을 읽고 그런 생각이 든다. 주부(아내가 엄마)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일은 갖는 것이 독자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아닐까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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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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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에 가미된 영국식 코메디와 수다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이 책에 대한, 이 곳에 올라와 있는 솔깃하게 만드는 추천 서평이 없었더라면, 이 두꺼운 책을 읽겠노라고 용감하게 덤벼들었겠는가...

이 책의 중반까지, 도중 패대기치거나 하는 돌출 행동 없이 이럭저럭하게 읽어 낸 나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낸다. 그나마 중간까지 꾸역꾸역 읽었기 때문에, 비로소 소소한 반전(특히...집사와 **가 엮어지는 결말이...아주 재밌었다...)이랄까 하는 것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재밌게 느껴지기 시작하였고,그리하여 나머지 절반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

역시 시작이 반인 것이다! 솔직히 아직도, 책 제목이 왜 <개는 말할 것도 없고>인지 잘 모르겠다. 책을 처음 잡고 읽을 때도 주인공과 모험을 같이 하는 또다른 등장 인물인 테렌스가 끔찍이 아끼며 데리고 다니는 불독 한 마리가 이 책의 줄거리에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되는 줄로만 짐작했다. 그러나...그야말로 개는 언급할 필요가 없는 줄거리였던 것이다.

역자 후기를 보면, 이 책의 제목 <개는 말할 것도 없고>는 이 책의 작가 코니 윌리스가 좋아하는 작품 <보트를 탄 세 남자,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보트를 ~> 과 이 책 <개는 ~>에 무슨 연관성이 있길래, 제목을 따왔다는 것일까.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두 작품 모두, 영국의 빅토리아를 시대 배경(개는 말할것도없고에서의 시간적 배경은 현재지만, 주교의 그루터기를 찾기 위해 빅토리아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으로 하고 있으며, 보트를 타고 템즈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기 형식을 갖추었다.

아무튼 이 책은 19세기 영국 사회에 대해 관심이 그리 많지 않더라도, SF는 웬만한 과학 지식이 있어야 읽어야 한다는 통념을 지키지 않고도 무람없이 읽어낼 수 있는 책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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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 - 언어철학
이규호 지음 / 제일출판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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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은 인생의 무거운 짐도 가볍게 하고, 어두운 괴로움과 슬픔을 꿰뚫고 밝은 희망을 가져 올 수 있다. 그야 말로 말이 갖는 힘의 위대함을 실감하게 하는 속담이다.

우리 생활의 주변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해도 정말 밉고 짜증나게 하는 사람 말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와 그 사람이 전달하는 말들을 항상 접하며 생활해야 하는 우리는 그나마의 불쾌함과 껄끄러운 감정을 조금이라도 덜며 생활하고저, 두 가지 중에 하나의 길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그 사람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거나, 간도 쓸개도 빼 놓고 허허실실 좋게좋게 들어 넘기거나.

그런데 전자의 방법은 조금 위험 부담이 따랐다. 그는 대개 사회 생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일 때 나는 '말의 힘'이라는 절대 노골적이지 않으며, 조금은 고급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조금은 초월한 위치에서 짜증나게 하는 상대방의 말을 낯색을 구기지 않고도 잘 받아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큰 범위로 분류하자면 '언어 철학' 관련 책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그렇게 딱딱하지않고, 말과 기호, 심리 현상, 생각, 얼, 논리, 삶, 사람됨, 교육, 철학 등등과의 관계를 주제로 쉽고 자세하며 적절한 예로 설명을 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단숨에 넘겨 읽는 책이 아니라 오래 두고, 다시 찾아가며 읽을 성질의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그야말로 사람됨을 이룩한다고. 인간은 미리 선천적으로 완성된 고정적인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언어를 발전시키면서 자신의 본질을 형성해 간다. 말이 가벼운 사람은 그의 사람됨이 가벼운 것이며, 말이 무거운 사람은 그의 사람됨이 무거운 것이다. 말에 조리가 있고, 분명한 사람은 그의 사람됨도 조리 있고, 분명한 것이며 말에 두서가 없고 애매한 사람은 그의 사람됨도 두서가 없고 애매하다.

이것은 말을 위한 말을 의식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수식하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꾸민 말은 알맹이 없는 빈말이며, 빈말은 빈 사람을 만든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들어맞는 알찬 말이 중요하다. 언어를 위한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실을 지향한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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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자의 노래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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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루야마 겐지가 좋다. 소설가로서 사는 삶의 방식이 멋지다는 생각에서다. 자연으로 돌아갔고, 소설쓰는 일 하나만을 지향하며, 일체의 잡다한 관계들을 과감히 끊을 줄 아는 방식이 멋지고, 자연에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원의 삶에 일체를 이룬 양, 굴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이 책은 1, 2권으로 되어 있는 줄을 모르고 책을 신청했는데, 받아보니 시리즈 도서를 1권만 주문한 것이 되었다. 1권을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2권은 사보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시작부분부터 내가 맘에 들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마루야마의 전신의 모습을 한 주인공이 나온다. 그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도시에서 궁핍하고, 황폐하며, 피로한 어느 폐가에서의 생활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접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것이 소설 초반의 설정이다.

주인공은 자아를 찾아 방황한다. 그는 그러니까 '육체를 갈아없앨 정도로 강렬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이기를 희망하고, 그것이 꼭 반영된 작품 <도망치는 자의 노래>를 완성하려 하지만, 젊은 나이임에도 그는 때때로 인생 따위는 어차피 심심풀이이거나 시간 죽이기의 연속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연한 일이 거듭 쌓인 것이 추억의 환영이 되고, 그것이 다시 쌓여 이 세상을 산 증거인 착각이 될 뿐이라고.... 그러다가 자신의 이상형이 투영된 듯 보이는 자형(누나의 남편)을 멀리서 보게 되고 그와 접촉을 시도하려 애쓴다.

마루야마는 이 작품에서도('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가 그랬듯이) '자유'를 소중히 다루려 했던 것 같다. 주인공은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바라마지 않았지만 쉽지가 않아, 그의 역할 모델처럼 '자형'이 등장한다. 자형은 일본이라는 전체주의 국가 체제를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일으킬 줄 아는 '큰(?)' 인물됨이며, 수도승처럼 수행하는 것처럼이라도 해서라도 자유를 그토록 구가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에게 자형은 사실 하나의 '심볼'이며, 역할 모델이고, 선의의 경쟁 상대이기도 하다. 자형의 정체가 드러나려 할 즈음 책은 2권으로 이어진다. 자형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다시 2권을 주문.

툭 까놓고 말해서, 2권부터는 1권에서의 서슬퍼런 독백들의 재탕이라는 느낌을 준다. 나온 주인공의 날선 각오와 내면의 독백, 그후 앞의 결심이 무색할 정도의 지리멸렬한 생활의 모습, 그런 자신에 대한 자책, 혐오의 말, 작품 도망치는 자의 노래를 완성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번민 등이 반복되고, 간간히 가뭄에 콩나듯 번쩍 하고 자형의 기행(奇行)을 목격하며 가슴 한 켠에 시심을 키우곤 하지만 곧 좌절감을 느끼는 둥 말이다. 마루야마가 다음 책에서는 자유 말고 다른 주제를 다뤄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도 한다. 굳이 또 '자유'를 노래하고 싶다면 직설적이고 방만한 독백투가 아닌 다른 방식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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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20세기 유럽, 야만의 기록
피터 마쓰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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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고 명쾌한 비유로 쓴 현장감을 담은 이 글.... 피터 마쓰라는 기자의 글은 정말 침이 꼴딱꼴딱 넘어갈 만큼 박진감 있게 읽혔다. 그리고 목구멍 저 밑에서 멍멍한 울림이 왔다. 뒷골은 딴딴하게 당겨 왔다. 피터 마스는 아침에 일어나 눈뜨고 눈감을 때까지 전개되는 살육과 야만의 현장에서 2년 동안을 종군 기자로 지냈다. 과연 얼마나 온전한 정신으로 기록을 할 수 있었을지, 사라예보의 호텔방에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내전의 살육 장면을 '생각하는 조각'처럼 턱을 괴고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기자 동료들의 모습에서 '전쟁포르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피터 마쓰에게(이 책에서 그도 밝힌 바 있지만), 보스니아 종군 기자 체험은 그의 생애와 정신에 많은 영향을 남겼고, 앞으로도 남기리라.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유고 연방.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인은 종교는 달라도 같은 슬라브 계통이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이웃집에서 오순도순 살았었다. 오랜 옛날부터 민족간의 분쟁이 종종 있었다지만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그것도 옛말이었다. 그렇게 민족간에 통혼도 하면 정 좋게 지내던 어제의 이웃이 오늘은 야수가 되어 문명과 야만은 한 끗 차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인공 청소와 강간 살인으로 흉폭한 광기를 부리다니, 이런 왕경우의 인과 관계가 퍼뜩 와 닿지 않는 듯도 하다.

그러나 '전쟁 전의 평화'와 '전쟁 후의 동물보다 못한 야만의 참상' 의 그 중간에는 이것이 있었다. 사회주의권 붕괴 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정치인들의 '민족주의' 악용이 있었다. 그리고 불난집에 부채질 하는 격으로 부시와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국제 연합의 수수방관이 겹쳐졌다. 미국인 기자인 필자 피터 마쓰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자국의 정치 대표에 대해 절망했다. 세르비아인들의 대다수가 야수가 되어 설쳐댄 것은 아니다. 극소수의 몇몇은 보스니아인들을 도왔고, 몇몇은 그러한 사태에 무력한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세르비아인들은 문명인이다. 우리도 문명인이다.'→ '그런데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인들에게 이보다 더 할 수 없을 듯한 야만적인 일들을 저질렀다.'→'따라서 '문명인들은 곧 야만인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체가 야수였다는 것도 간담이 서늘할 일이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존재는 정치적 지도자이고, 그 하수인들이다.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도덕은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라지만, 평범한 개개인의 차원에서는 지켜내기가 너무나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전장터라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내가 먼저 총부리를 겨누지 않으면 상대가 언제 나를 쏠지 모르니, 자기 목숨을 방관하고 있기는 쉽지 않을터다. 지금 여기서 세르비아인들을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그들을 잔인하고 흉폭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일을 몰아간 원흉을 찾자면 세르비아의 대통령 밀로세비치나, 외면하는 국제 연합 측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정치적 야심에 따라 국민들이 희생양이 되어, 우습고도 어처구니없게 농락을 당했을 뿐일다.
어느 지도자의 야심과 그 분탕질치고는 희생과 여파가 너무나도 크다는 데에 크나큰 슬픔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민족주의적 갈망들이 최고조에 이른 사건. 처음 불꽃을 일으킨 것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서로 대립한 독일 민족과 슬라브 민족주의적 충성심에 불을 지핌(이 전쟁들은 프랑스 혁명이 남긴 이데올로기의 잔재로 봐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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