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좋은 날 - 제13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아오야마 나나에 지음, 정유리 옮김 / 이레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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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에 상경, 먼 친척 할머니 집에서 동거하며 살아가는 여자의 1년을 그린 소설이다. 이렇다할 사건도 없이 담담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소소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에 편입된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먼저 주전자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식빵을 굽고,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출근해서 일하는 바쁜 일상의 사회인이 되고 싶은 주인공 치즈. 그녀가 들어사는 집주인이자 동거녀인 일흔한 살의 깅코 할머니는 치즈를 묵묵히 응원하는 멋쟁이다. 가끔 치즈가 부리는 심술이나 어리광*히스테리에도 시미치 뚝떼고, 노인 대학에서 어떤 할아버지와 알콩달콩 연애를 하고 귀여운 부분이 있는 캐릭터다. 이들의 나이 차이는 저만치 나지만, 이들만큼 잘 어울리는 콤비도 없을 듯하다.

61쪽

나는 아직까지 뭔가를 가슴 깊이 슬퍼하거나 증오해본 일이 없다. 그래서 슬픔이나 증오가 어떤 추억으로 남는지도 잘 모른다. 막연히, 그런 것들에 직면할 날은 아직 먼 훗날의 일일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이대로 젊고 세파에 시달리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어느 정도의 고생은 각오하고 있다. 나는 어엿한 인간으로 어엿한 인생을 살고 싶다. 될 수 있는 한 피부를 두껍게 해서 무슨 일에도 견뎌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매달 주민세도 연금도 의료보험료도 꼬박꼬박 내는 제대로 된 사회인을 향해 조금씩 성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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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하나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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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은 친구가 올해로 삽십대가 되었다. 동료이고, 후배인 이 친구와 어떤 갭이 느껴질 때마다 ‘역시 20대와는 친구가 될 수 없어!’했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삼십대를 맞는 이 친구의 신산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나보다. 미래를 약속한 남자 친구가 없어서 더욱 초조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하며, 내 서른 시작의 감회는 어떠했냐고 묻는데, 30세가 어떤 터닝포인트가 되었었다는 기억은 없다. 당시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네마네 혹은, 감정적으로 틀어지고, 신경전을 벌이면서 연애 감정이란 참 소모적이구나 했던 기억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쓰다보니 드는 생각은 인생을 하나의 긴 여정이라고 놓고 보았을 때, 그 중 어느 부분이 소모적이었다, 낭비했다. 그런 표현이 과연 성립할까 싶기도 하다.

일찍 결혼을 했고 아이도 어느 정도 키웠다면, 이제 막 결혼을 해서 2세를 가지려는 사람의 막막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안정감을 구가하고 부모로서 노련미를 발휘하겠지만, 자기만의 일의 세계를 구축하지 않아 허전할 수 있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점점 초조해 질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부분에서 충분히 상쇄시킬 꺼리가 있을 수 있고, 아니 그보다 인생이란 것 자체가 대차대조표를 짜서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살아지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것일테니까.

책을 보면, 정말 다양한 나이 서른하나를 맞는 여자들의 혀를 내두를 만큼 저마다 다양한 삶의 군상들을 하고 살아간다. 몇몇 이들에게는 얼핏 내 모습을 보기도 하고, 그래 짠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또 몇몇 이들에겐 이해가 안 되는 구석도 있어서 충고가 하고 싶기도 한 그런 다양한 서른하나의 여자들.

작중 인물이 스스로에게 묻듯 나 또한 생각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143쪽 

조금 전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제는 방해꾼이 있었으니까 오늘 다시 만나자고. 다정하고 따뜻하며, 내가 늦게까지 일하거나 술을 먹어도 싫은 표정을 짓지 않는 남편. 이 사람을 선택한 것도 그(내연남)를 위해서였다. 그가 독신인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아서 서둘러 결혼한 것이다. 내가 결혼한다고 하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남편을 좋아하지 않지만 죄책감은 전혀 없다. 남편은 무섭지 않다. 무섭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206~207쪽

결혼은 지긋지긋하다는 마음과 전업주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는 “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힘과 각오가 생기면, 재혼은 그 다음에 생각해보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저처럼 자립하지 못한 사람은 몇 번을 결혼해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뿐일까요? (중략)

결혼한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아이나 가정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말로는 다들 나를 불쌍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정한 말투의 이면에서 그녀들의 우월감을 발견하는 것은 제 성격이 일그러졌기 때문일까요?




218~219쪽

어릴 때부터 아무런 대책없이 오기로 똘똘 뭉쳐 있던 나는 10대 후반과 20대 전부를 계급올리는 것에 투자했다. 불안해하거나 주저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서른한 살의 내가 있다. 아니, 있어야 했다. (중략)

나는 몇 년 전부터 여관과 호텔, 음식점을 경영하는 기업의 본사에서 일하고 있다. 현장에서 일하던 내가 본사의 기획부로 전격 발탁된 것이다. 중졸이란 학력으로 음식점 심부름부터 시작해 열일곱 살부터는 고급 클럽의 바니걸로 일했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에 토끼옷을 벗고 카운터에서 계산대를 맡았다. (중략) 매출을 관리하는 입장에 서자 바니걸로 일할 대는 몰랐던 클럽의 소홀한 부분이 보여서, 웨이터에게 한마디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주장은 놀랄 만큼 순수하게 받아들여져서, 불과 2년 만에 다른 지점과 한 자릿수 차이가 날 만큼 매출이 올랐다. 이를 본사에서 주목했고, 나는 결국 정장을 입고 회사에 다니는 지위에 오른 것이다.

아무리 정장을 입고 회사에 다녀도 출신이 출신인만큼 역시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온 사람과 천 미터짜리 산을 자기 발로 몇 번씩 올라온 사람은 근성이 다르기 때문에, 약간의 심술과 비아냥거림은 내게 스트레스조차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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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4 2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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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09: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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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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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그런 것들을 보게 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회복력과 힘과 상상력이 존재하는지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우울증의 끔찍함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력의 복잡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 받을 수 있다.  

우울증을 겪는 동안 꼭 명심해야 할 점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고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저자의 말을 경청하게 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점투성이의 사람이지만 우울증을 겪고 나서 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우울증을 겪지 않았더라면 이 책도 쓰지 않았을 것이며, 우울증을 통해 가난하고 짓밟힌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심없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간추리면 이렇다. 글쓴이가 스물다섯 살 나던 1989년 8월, 어머니가 난소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의 흠잡을 데 없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그 사건이 조금만 덜 비극적이었더라도 어쩌면 발병은 없이 우울증이 성향들만을 지니고 살거나 아니면 나중에 중년의 위기 때 발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는 실용주의를 당신의 통제 불가능한 슬픔을 막는 힘의 장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효과만 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엄격히 통제하는 방법을 통해 우울증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이제 생각하니 어머니가 질서에 그토록 맹렬하게 집착했던 것은 고통이 겉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내가 약물의 도움으로 쉽게 피할 수 있는 고통에 어머니가 평생 시달려 온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편으로는 동요성 우울증이 따분할 정도로 전형적인 증상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불안 증세는 끔찍해서 증오, 고뇌, 죄책감, 자기혐오로 가득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평생 그토록 덧없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적이 없었다. 잠도 못 잤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무섭게 화를 냈다. 그때 절교한 친구가 여섯 명이 넘는데 그 중 하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여자였다.  


167쪽

정신은 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실용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저긴 문제이다. 미시간 대학교의 신경 과학과 명예교수인 엘리엇 벨런스타인의 말이다. 경험적인 것이 물리적인 거에 영향을 미치도록 이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 제임스 밸린저는 이렇게 말했다.

“심리치료가 생물학을 변화시킨다. 행동치료가 (아마도 약물과 같은 방식으로) 뇌의 생물학을 변화시킨다. 불안증에 효과가 있는 특정 인지 치료들은 약물 치료와 마찬가지로 뇌의 대사 수치를 낮춘다.  

밤마다 잠이 안 오면 잡념을 잊기 위해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모기에 물리기라도 하면 피가 날 때가지 잡아뜯었고 딱지가 앉으면 기어이 뜯어냈다.

218쪽

수면은 생체 주기의 주요 결정 요소이며 수면 패턴이 변화하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분비에 혼한이 온다. 우리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상당 부분 밝혀냈고 수면이 우리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하강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의 직접적인 상관 관계는 알지 못한다. 수면 중에 갑상선 호르몬의 수치가 내려가는데 바로 그 때문에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일까?
나는 우울증 시기에 낮잠의 욕구에 시달리곤 했었는데 낮잠은 깨어 있는 동안에 나아진 것을 무효로 만드는 역효과를 낸다.

277쪽

어린이들의 경우, 우울증이 성격 발달을 저해한다. 우울증과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 사회적 발달이 지연되고 삶은 점점 더 우울해진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계에서 자신만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350 쪽

사실 난 술에 취한 밤에 글이 잘 써지고 코카인에 도취해 있을 때 멋진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물론 항상 그런 상태에 있는 건 원하지 않는다. 내 임의대로 나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쯤이 좋을까? 지금 상태보다는 몇 단계 높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나는 무한한 에너지와 빠른 정확성과 확실한 탄력성을 소망한다.

361~363쪽

자살은 힘겨운 삶의 정점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넘어서는 미지의 장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체험했던 유사 자살 시기를 돌아보면 당시엔 온당하다고 믿어 마지않았던 논리가 지금은 몇 해 전에 내게 폐렴을 안 겨 세균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강력한 세균이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점령했던 듯한 기분이다. 이상한 것에 공중납치라도 당했던 듯 하다.

죽음을 원하는 것과 죽고 싶은 거소가 자살하고 싶은 것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따금 죽음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슬픔을 넘어서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우울증에 빠지면 많은 이들이 죽고 싶어 한다. 현재 상태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하기를, 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하고 싶어 하는 것은 특별한 에너지와 특정한 방향성을 띤 폭력성을 요한다. 자살은 수동성의 결과가 아닌 행동의 결과이다. 자살을 하려면 현재의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최소한 약간의 충동에 덧붙여 엄청난 에너지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자살자는 네 부류로 나뉜다.

1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자살은 숨쉬는 것만큼 긴박하고 피할 수 없다. 이 부류는 가장 충동적이며 특정한 외부 사건에 의해 자살에 이르기가 가장 쉽고 이들의 자살은 갑작스럽다. 수필가 앨버레즈가 자살에 관한 빛나는 명상서인 <야만적인 신>에 듯이, 자살은 삶을 통해서는 점차적으로 무디어질 수밖에 없는 고통을 “귀신을 쫓아내듯 몰아내려는 시도”이다.

2. 안락한 죽음과 반쯤 사랑에 빠져 있으며, 자살이란 것이 철회 가능한 행도이기라도 하듯 복수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한다. 이 부류에 대해 앨버레즈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에 자살의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야망을 넘어서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야망에 찬 행위이다.” 이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때 삶에서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라 소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3. 죽음이 견딜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그릇된 논리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이들은 선택 가능한 방법들을 고려하고 자살 계획을 세우고 유서를 쓰고 외계로의 여행이라도 계획하는 것처럼 관련 실무자들과 접촉한다. 이들은 죽음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 줄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짐도 덜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은 대개 그 반대인데도 )

4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 이들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불안정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고 싶어 하지 않으며 삶의 기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현재의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예단은 정확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항우울제의 사용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사느냐 죽느냐 . 글의 주제로서 이것보다 더 많이 쓰인 것도 없지만, 이것처럼 사람들의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화자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 결정은 그곳에 들어서면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땅 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도, 이상한 체험의 영역으로 기꺼이 모험의 발을 내딛고자 하는 이들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두려운 것이 많으면서도 모든 것을 희망할 수 있는 상태로 가기 위해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뎌야 한ㄴ 이 세계를 그리 기쁘게 떠나지는 않는다. 햄릿의 말처럼 ’분별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며 결단은 창백한 사색으로 인해 본래의 색조를 잃고 흐릿해진다. 여기서 분별심은 의식을 의미하며 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존재하고 통제력을 갖고 행동하고자 하는 잠재적인 의지를 통해서도 소멸에 저항한다. 더욱이 스스로를 인정한 정신은 그것을 다시 부정할 수 없고 이것은 자기 성찰적인 삶이 파멸을 부른다는 견해와 반대된다.

“창백한 사색‘은 우리 안에서 자살을 막는 것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아마도 절망에 빠졌을 뿐 아니라 순간적으로 자의식을 잃은 것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자살이 목적이라면 진정으로 의식적인 자아는 옆으로 젖혀 놓아야만 한다. 존재하는 것과 무가 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존재는 체험의 부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주배 그 자체는 이해할 수 없다.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면 그건 존재하는 것이니까. 건강한 상태에서의 내 견해는 죽음 저편에는 영광이 있을 수도 평화가 있을 수도 공포가 있을 수도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알기 전에는 모험을 걸지 말고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을 바로 자살이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 문제에 대한 탐구에 생을 바쳤으며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과거에는 종교가 충분한 대답을 제공했던 질문들에 매달렸다.


606쪽

우울증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강한 것은 우울증이 유익한 기능들을 수행하는 메커니즘의 불발이라는 주장이다. 우울증은 대개 슬픔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변종이다. 멜랑콜리를 애도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울증의 원형은 슬픔 속에 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유익한 매커니즘인 슬픔이 장애를 일으킨 것일 수 있다. 심장은 우리가 다양한 환경과 기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온몸에 피를 공급한다. 우울증은 손가락과 발가락에 피를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처럼 더 이상 고유의 장점을 갖지 못한 극단 상태이다.

슬픔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슬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애착의 형성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상실감을 겪지 않는다면 강한 애정을 가질 수 없다. 사랑이 깊고 넓어지려면 슬픔이 개재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은 종의 보존에 기여한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의 고난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살아 있게 만들어 준다. 만일 우리가 자의식만 키우고 사랑은 키우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결과를 본 적은 없지만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사랑 받기도 쉬우리란 것이 나의 믿음이다. 케이 제미슨의 말을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문제가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무한한 강렬함과 다양성이 있는 곳으로 여긴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연속체의 극단을 제거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그것을 두 동강 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감정의 폭을 갖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만이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631쪽 

나는 이 책에서 내 친구들의 약혼자와 남편 같은 사람들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나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거나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 우울증 환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했다. 칭찬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대부분 강인하거나 똑똑하거나 끈질긴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표준적인 인간이란 것이 존재한다거나 소위 원이란 것이 모든 진실을 아우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우리는 할 얘기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진정한 생존자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 (중략) 어떤 이들은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질 남용에 대해 연구하는 데이빗 맥도웰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덜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절대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638~639 쪽

사실 실존주의는 우울처럼 진실하다. 인생은 헛되다. 우리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육체적인 개체성으로 인한 고립은 피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루든 우리는 결국 죽게 된다. 이런 현실들에 굴하지 않고 인생의 다른 면들을 보면서 계속 추구하고 모색하고 꿋꿋이 견디는 것이 진화에서의 선택적인 이점이다. 나는 르완다에서 학살당하는 투치 족과 방글라데시의 굶주린 무리들을 본다. 그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고 돈도, 먹을 것도 없으며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개선의 가망이라곤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상 때문일 수도 있고 존재를 위한 싸움을 지속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생명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만다. (중략)

우울증을 겪은 뒤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일상의 즐거움에 대한 감수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삶의 긍정적인 면들이 지닌 진가를 절실히 느끼고 그것들에 대해 쉽게 희열에 젖는다. 원래 너그러운 인물이었다면 우울증을 겪은 후에는 더욱 관대해진다. 물론 다른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말기 암에서 기적적으로 희생한 이라도 중증 우울증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쁨을 느끼고 주는 능력’은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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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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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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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 이야기 전개 및 사건과 복선 모두, 이렇게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면 정말 훌륭한 거라고 본다. 비단 작품의 완결성이랄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태 비판까지 더불어 하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명문 학교 입시’ 문제다.

여기서 잠깐 딴소리하자면, 이 책도 그랬지만, 갑자기 부모 노릇 한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냐 하는 생각이 엄습하는 일이 있었다. 퇴근길에 차를 얻어타곤 했던 차장님이 계시다. 50대 중반의 아줌마 차장님이시다. 차장님에 대해서 회사 사람들은 보통 ‘재력가’, 혹은 ‘재산가’라고 표현한다.

강남 도곡동에 타워팰리스 준하는 그런 아파트에 사신다. 훗날 우리집이 차장님의 퇴근하는 길목에 있다는 - 남부 순환로를 타고 가다가 낙성대 역에서 내려 주시고, 강남 방면으로 주욱 가시면 되니까, - 게 계기가 되어 차를 얻어 타고 퇴근을 하게 되면서 차장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재산가’라 명명되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차장님의 요지는 그런 거였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그 쪽에 마련했던 게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지금이야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재개발 재건축이 큰 시세 차익을 가져다주었고. 동네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교제하다 보니, 펀드라던지 주식으로 수익을 볼 수 있는 정보도 얻게 되었고, 본인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물어다 줬다는 거였다.

또, 돈이라는 게 모으고자 알뜰살뜰 저축해서 되는 게 아니고, 우연찮은 기회에 복이 굴러온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다. 종자돈 있는 상태에서 큰돈 번 사람들이 으레 하는 얘기라며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올초에 차장님에게 불운한 일이 생겼다. 부군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다. 심근경색인가 뇌졸중인가 고혈압?? 아무튼 이런 질환으로 급하게 입원을 하셔야 했다. 차장님은 회사일 때문에 간병인을 두어야 했고 차장님 여동생이 번갈아 환자를 돌보고 있다. 

차장님은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이가 올 수능시험을 본 고3이었다.

차장님은 그 전에도 항상 딸에 대한 걱정이 많으셨다.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두고, 얻은 딸. 결혼이 워낙 늦으셨고, 아이도 가질까 말까 하셨다고. 딸을 낳기 전에 한번 유산이 된터라, 아이를 꼭 낳아야겠다는 간절함도 없으셨단다. 아무튼 그렇게 생긴 외동딸이 이제 대학 가야 하는데, 공부를 안 해서(못해서가 아니고) 큰 걱정이라고 했다. 영어나 국어 같은 언어 계통은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수학이 형편없어서 고액 과외를 시킨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과목은 안 시키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언어 영역 과외도 중학교 때부터 동네 아이들과 팀을 짜서 하고 있는 거 계속 하고 있고, 영어도 물론이고 말이다.

대학이나 갈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늘 말씀하시고, 부군 님께서 쓰러지셨던 최근에는 아이가 어른들 경황이 없어 공부하라는 사람 없으니까, 아주 살판났다며 푸념하셨었다.

차장님이 딸의 진학 때문에 걱정하실 때마다 나는 “그래도 문과 계통을 잘 한다니, 수시나 특별 전형엔 유리하지 않을까요?”라며 늘 좋은 쪽으로 말했었는데, 넋두리하시는 차장님에게 딱 잘라 “아이의 실력을 인정하시고, 부담 주지 마시고, 현실을 받아들이셔야죠!”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데 정말 이렇게 얘기했더라면 큰일날 뻔했지 뭔가.

수시 1차 합격했다는 ( 수능에서 2과목만 2등급이상이라 최종합격 ) 결과가 나왔단다. 수시 합격? 이대 국어교육과 8명 뽑았다는데.

그 소식을 전해 준 친구에게 “ 차장님 딸 맞아?” 하고 확인했었다. 분명 대학을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하셨었는데, 그 대학이란 어디를 기준으로 해서 말씀하셨던 걸까?

아, 자식의 성적... 이 민감한 사항에 대해 남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한 자락 깐 다음에 말해야 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일까?

본 책 내용하고 관련이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쓸데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부모 노릇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만 절감절감이다. 


286쪽 

“누가 범인인지 우리는 몰라. 우리 스스로가 해온 짓을 생각하면 당연히 아이들이 나쁜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 에리코 씨가 우리 비밀을 눈치 채고 증거까지 모아두고 있었던 건 우리에게 치명적이었지. 만약 그녀가 살해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나도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길 바랐을 거야. 그래서 나는 쇼타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자신이 없는 거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없어서 아이들을 믿을 수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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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는 이의 십중팔구는 나와 책의 개인적인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도 리뷰가 될 수 있다면  쓰려고 했었는데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는 그만... 그녀가 대신 다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글

평범하지 않고 좀 이상해 보이는 연인이 있다면, 주위 사람들은 ‘저 사람들 좀 이상하네.’ 또는 ‘정말 좋아하나 봐.’ 그렇게 제멋대로 얘기하다가도 결국 ‘둘의 문제’로 이해해 버리곤 한다. 둘의 관계는 그들 둘 밖에 모른다. 이상하게 보여도, 분명히 그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연인이나 부부라는 게 어떤 건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연애라는 것은 사실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내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떤 순간도 그 기준은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나는 헤어진 애인과 대부분 친구가 된다. 현재 애인과도 만나게 하고 둘이 술을 마시게도 한다. 나는 그런 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졌으니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쪽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 다시 만나면 마음이 흔들릴까봐 못 만나는 게 아닐까? 나는 헤어진 사람에게는 눈곱만큼도 미련이 없고 만나도 상관할 게 없으니 그저 평범한 친구가 된다. 하지만 몇몇 친구는 그런 내 생각을 이상하다고 했다. 옛 애인과 만나야 하는 현재 애인이 아무렇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애인도, 전 애인을 만나는 일이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 전 애인과 친구가 되는 게 이상하다는 사람은 전 애인과 헤어지면 만나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경우 ‘당연’하다는 것은 커플인 두 당사자가 공통적으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쩌다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책과의 관계도 이와 똑같다고 얘기하고 싶다.

운동을 한다, 게임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온천에 간다. 그런 일들과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운동이나 게임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온천에 가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중에는 책 읽는 행위도 포함된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그런 행위 속에서 가장 특수한 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누군가와 일대일로 교환될 정도로.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는 그 작품 세계에 들어가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한번 책의 세계에 빠지는 흥분을 알 게 된 인간은 평생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가장 원시적인 기쁨을 이미 유치원에서 얻었던 것이다.




내가 사는 집 옆에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시골에 종종 있는, 책을 팔지 않는 서점이었다. 만화와 주간지, 여성잡지에 만화 잡지, 거기에 문방구, 계산대에는 향기가 나는 지우개 함이 있는.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가면 책을 파는 서점이 있었다. 아주 큰 서점. 옷은 필요 없으니 책을 사 달라고 졸랐을 때 어머니가 데려갔던 곳이었다. 책이 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도 도서관이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노란색 카펫,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던 수많은 책, 유리창과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살, 도서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와 웃는 얼굴.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시시하고 재미없는 책과 만났다. 그때 나는 입원해 있었는데, 이모가 그 책을 가져다 주었다. 책이라면 무엇이든 좋았기 때문에 받자마자 읽었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 재미없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크고 컬러로 된 책이었다. 마지막까지 읽고 재미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그 책을 놓아두고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책은 읽었다. 읽긴 읽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의 밀월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책의 세계보다 현실이 더 정신없었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 살았는데도 나이와 나 자신, 매일, 친구, 늘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더 쉽게 표현하면 책보다 새 옷이 필요했고, 대형 서점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장소가 곳곳에 출현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가 책 한 권을 주었다. 그림이 있는 작은 책이었다.

나는 그것을 단숨에 읽고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세계로 데려다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병원 침대에서 재미없다면 내던진 <어린 왕자>였다. 8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받게 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재미없는 책을 읽어도 ‘시시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게 됐다. 이것도 역시 사람과 같다. 100명이 있으면 그만큼의 개성이 존재하고, 또 그만큼의 얼굴이 존재한다. 시시한 사람이란 없다. 유감스럽게도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외모에 대한 취향도 다르지만, 그것은 상대가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쪽이 안아야 하는 문제이다. 시시한 책은 그 내용이 시시한 게 아니라 서로 맞지 않거나 이쪽의 편협한 취향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상대와 우연한 기회에 무척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고, 이쪽 취향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 시시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그것을 쓴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책에 실례를 범하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조금씩 책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맛보게 된다. 나는 문학부의 문예 전공이었다. 같은 문학 수업을 듣는 동기나 전공 동기 모두 나보다 50배나 많은 책을 읽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당연하게 입에 올리는 작가 이름을 전혀 몰랐다. 그들의 입에 오르는 책 제목도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책이 너무 좋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생각하며 그 대학의 그 과에 들어갔는데 내가 읽은 책이란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기로 했다. 상처만 받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나 연애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어울려 놀러 다녔다. 그리고 얻어들은 미상의 작가나 책을 남몰래 읽었다.

무식해서 좋았던 점은 이 시기,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책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는 동기들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작가의 소설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작가들의 품만 샅샅이 뒤져 읽었다.

이제까지 나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순수하게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은 경우는 없다. 15년에 걸쳐 깨달은 것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500배, 1000배나 많은 책을 읽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런 사람을 쫓아가려 해도 소용없다. 그런 일을 할 여력이 있다면 지식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는, 나를 부르는 책 한 권을 읽는 게 낫다.

그래, 책은 사람을 부른다.

아주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나는 읽으면서 자주 생각한다. 혹시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찌 되었을까?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 책이 없었다면,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확실히 내가 본 세상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있어서 좋았다. 다행이다. 친구가 없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 덜 떨어진 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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