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가 없어야 나라가 산다 - 학벌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김동훈 지음 / 더북(The Book)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114~115쪽
하기는 그 이전에 역시 존경받는다던 전 대법원장도 물러나자마자 모 법률회사에 '취직'하지 않았던가. 어느 판사는 이러한 현상을 비꼬아 초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하신 교장선생님이 그 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구멍가게를 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정곡을 찌르는 비유다.

 

120~121쪽
조선의 양반가에는 자식이 태어나면 다섯 살부터 과거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 이에 대해 성호 이익 선생은 '아이들이 머리털이 마르기도 전에 과거 공부를 하려 한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당시 부모들의 교육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권학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한창 놀고 싶은 아이들을 종일 공부방에 처박아두면서 그들에게 지금의 고통을 참고 이기라는 격려의 노래였다.

부자가 되기 위해 좋은 토지를 사들일 필요가 없나니/책 속에 그냥 천 석의 쌀이 높여 있도다/ 편안히 살려 함에 있어 호사한 집을 지을 필요가 없나니/책 속에 그냥 황금의 가옥이 지어 있도다/문을 남섬에 시중들어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지 말라/ 책 속에 여인이 있으되 얼굴이 옥과 같도다/남아로 태어나 평생의 뜻을 이루고 싶거든/육경을 창 앞에 두고 부지런히 읽으라. (송대에 편집된 명시문집인<<고문진보>>의 첫머리에 실려 있다.)

 

200~201쪽

중등 및 고등 교육의 수요를 억제하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진학 경쟁을 질서 있게 처리하기 위하여 입시의 국가 관리를 도입했으나 입시 경쟁의 격화가 점차 사회적 압박으로 다가오자 1968년에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정책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국비로 학교를 신설하는 대신 사립의 설립을 장려하여 재정 부담을 덜고자 하였다.

중학교는 금방 포화 상태가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고등학교 진학 경쟁을 격화하자 1974년에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고교 평준화 정책을 도입하여 6년 전과 똑같은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는 다시 고등학교의 포화 상태를 가져오고 다시 대입 경쟁을 격화시켰다.

1980년 광주 대학살 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대입 경쟁의 격화에 따른 과외 부담을 덜어 민심을 얻으려 했다. 과외 적발자는 삼졸을 벌한다는 과외 금지령과 함께 대학 졸업정원제라는 것을 도입했고, 사립대학의 설립 인가를 남발하여 대학 정원을 대폭적으로 늘렸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전국민의 학사화'라는 초유의 학력 인플레를 가져오는 결과만 낳았다.

그리고 중학교 및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통해 무시험 입학은 달성했지만 공사립을 아울러 학군으로 묶어 학생을 배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사립학교는 완전히 공교육에 편입되었고, 이는 결국 사립학교의 재정 문제까지 국가가 떠안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립은 사립대로 독자성을 잃어버리고 재정 부담을 국가에 떠넘기는 누워서 떡 먹기 식 장사를 하게 되어 이것이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국가는 국가대로 예산을 공교육에 집중하지 못해 겨우 초등학교 6학년밖에, 그것도 불완전하게 무상 교육을 실시하는 열악한 공교육 현실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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