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정문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10월
구판절판


나는 그 처녀들 죽음 앞에서 흔들렸다. 냉정함은 사치였다. 그 국경 산악이 얼마나 거친지, 그 혁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같은 국경 하늘 아래서 그이들과 함께 배웠던 탓이다.

나는 전선에서 사라져 가는 그 숱한 죽음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평화'라든지 '비폭력'이라는 말들이 지닌 속뜻을 깨달았다. 평화는 힘센 놈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비폭력은 그놈들이 뱉어낸 거짓말에 쳐준 맞장구였다. 그 둘이 함께 먹고사는 공생관계 속에서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 왔다. '평화주의' 무저항, 비폭력주의' 같은 말들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반시민적인 것들인지를 나는 버마전선에서 체험했다.

국경을 알지 못하는 랑군 정치가들은 비폭력과 평화의 본질도 결코 알 수가 없다. 내 아들 딸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총 맞아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랑군의 평화주의였고, 학살군사독재자들 앞에 무릎꿇고 강요하는 것이 랑군의 평화주의였고, 학살군사독재자들 앞에 무릎꿇고 돌아오라는 게 랑군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였다.
-83~84쪽

'기자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런 식의 말들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 기독교, 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그이들은 그 단지 밑에 숨어 자본을 증식해 왔을 뿐이다. 그런 국제 주류언론들 입장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어김없이 '중립성' 논란이 일었고 그 당사자는 몰매를 맞았다.
(...)
전선기자로서 내가 따를 '중립'은 내 발에 차이는 '사실'뿐이다.
-172~173쪽

난민들에게도 마땅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난민들 먹고 입는 걸 보며 배아파할일도 없고, 화장지나 온수 따위로 질투할 일도 없다. 문제는 '왜 코소보 난민에게만?"이라는 의문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넘쳐나는 난민들은 왜 코소보 난민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평소에 코소보가 유엔에 세금을 많이 낸 적도 없다. 인류를 위해 아시아나 아프리카 시민들보다 각별히 이바지했던 일도 없다.
전쟁을 피해 온 난민에게도 인종과 계급과 신분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급수가 다른 구호품을 제공하는 이 세상이 참으로 살맛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왜 아시아, 아프리카 난민은 굶주린 채 뒷갓을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하는가?' 이 의문에서부터 인도주의도, 인권도, 그 흔해빠진 국제 정치학도 출발하자는 뜻이다. -288쪽

내 경험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어린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아체에서 정부군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모조리 '반군'이 되었다. 말하자면, 반군이기 때문에 총 맞아 죽은 게 아니라 총 맞아 죽었기 때문에 반군이 되는 식이었다.
-227쪽

'아프가니스탄통'으로 불리는 파키스탄 가지 라히물라 유숩자이 말마따나, 미국은 어떤 종류의 '불편함'도 국제전략으로 선택한 적이 없다. 미국은 그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으로 국제사회를 주물러 왔다. 그리고 미국은 그걸 국제평화라 고집했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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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7-30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좀 무력해지네요,,,

세상의 한쪽은 아직도 여전히 저렇게 비열하고...잔혹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나는 또 이 구석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가 고만고만한 고민에 복닦이며...살고 있고..


2005-07-30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7-30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7-31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생각 없이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지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저 멍하니 읽고 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는.. 리뷰 쓴다는 것이 책과 사람에게 미안했지요.

2005-07-31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3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그러게요...그럴 거 같은 예감이 들어서...기왕이면 안전빵으로 갈려고 발악중인 겁니다~ ㅋㅋ 휴우~ 전사의 휴식이로군요...단잠 주무셨기를... 그나저나 (소곤소곤인데요...님 옆지기님도 잠이 많으신가요~ 아니 왜냐면요..제가 잠귀신 붙은 사람하고 같이 살아서...혹시 님도 그런가..ㅋ)
ㅎㅎ 임신 중에 읽으심 안 됩니다.. 맞아요! 맞아!
저 기자가 대단해 뵈는 것은 저 모두(아시아 내의 전쟁들)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큰 전쟁이 아니라 국가 내에 세력 분쟁이다보니, 미국과 같은 강한 나라가 내지르는 보도나 언론에 편승하여 보도하기 십상이겠더라고요.. 저이는 그런 기자를 따로, '종군기자'라고 표현을 하더라구요... 군대에 딸린 기자라는 의미로 주류의 대변인이라는 뜻이죠... 하지만 이이는 강하게 자신은 전선기자라고 말하죠.... 언론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감시기능을 다하는 기자라는 의미로다가...

비숍 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이 책은 아시아의 지명과 인명 같은 숱한 고유 명사들이 압박을 해오던 통에,.... 하지만.. .한 꼭지 한 꼭지 피를 말리는 전선을 생각하며 썼을 글쓴이를 생각하면 또 허투로 읽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비로그인 2005-08-01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전에 밀려 있었던 책인데 먼저 읽으셨군요. 음..저도 대충 목차와 내용을 훑으면서 생각했던 것인데 사람이 하도 기가 차면 말이 안 나온다, 라는 말이 있쟎습니까. 그 어떤 정의로운 단어와 문장일지라도 너무나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실 앞에서는 그저 얍삽하고 통속적인 그 무엇으로 추락하고 만다는 생각들. 덜덜~ 떨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