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처녀들 죽음 앞에서 흔들렸다. 냉정함은 사치였다. 그 국경 산악이 얼마나 거친지, 그 혁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같은 국경 하늘 아래서 그이들과 함께 배웠던 탓이다.
나는 전선에서 사라져 가는 그 숱한 죽음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평화'라든지 '비폭력'이라는 말들이 지닌 속뜻을 깨달았다. 평화는 힘센 놈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었다. 비폭력은 그놈들이 뱉어낸 거짓말에 쳐준 맞장구였다. 그 둘이 함께 먹고사는 공생관계 속에서 세상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져 왔다. '평화주의' 무저항, 비폭력주의' 같은 말들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반시민적인 것들인지를 나는 버마전선에서 체험했다.
국경을 알지 못하는 랑군 정치가들은 비폭력과 평화의 본질도 결코 알 수가 없다. 내 아들 딸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총 맞아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랑군의 평화주의였고, 학살군사독재자들 앞에 무릎꿇고 강요하는 것이 랑군의 평화주의였고, 학살군사독재자들 앞에 무릎꿇고 돌아오라는 게 랑군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였다. -83~84쪽
'기자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런 식의 말들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 기독교, 자본주의, 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그이들은 그 단지 밑에 숨어 자본을 증식해 왔을 뿐이다. 그런 국제 주류언론들 입장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어김없이 '중립성' 논란이 일었고 그 당사자는 몰매를 맞았다. (...) 전선기자로서 내가 따를 '중립'은 내 발에 차이는 '사실'뿐이다. -172~173쪽
난민들에게도 마땅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난민들 먹고 입는 걸 보며 배아파할일도 없고, 화장지나 온수 따위로 질투할 일도 없다. 문제는 '왜 코소보 난민에게만?"이라는 의문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넘쳐나는 난민들은 왜 코소보 난민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평소에 코소보가 유엔에 세금을 많이 낸 적도 없다. 인류를 위해 아시아나 아프리카 시민들보다 각별히 이바지했던 일도 없다. 전쟁을 피해 온 난민에게도 인종과 계급과 신분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급수가 다른 구호품을 제공하는 이 세상이 참으로 살맛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 '왜 아시아, 아프리카 난민은 굶주린 채 뒷갓을 찾아 헤매고 다녀야 하는가?' 이 의문에서부터 인도주의도, 인권도, 그 흔해빠진 국제 정치학도 출발하자는 뜻이다. -288쪽
내 경험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어린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아체에서 정부군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은 모조리 '반군'이 되었다. 말하자면, 반군이기 때문에 총 맞아 죽은 게 아니라 총 맞아 죽었기 때문에 반군이 되는 식이었다. -227쪽
'아프가니스탄통'으로 불리는 파키스탄 가지 라히물라 유숩자이 말마따나, 미국은 어떤 종류의 '불편함'도 국제전략으로 선택한 적이 없다. 미국은 그 '불편함'을 제거하는 것으로 국제사회를 주물러 왔다. 그리고 미국은 그걸 국제평화라 고집했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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