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기 전, <그 남자네 집>을 단숨에 재미나게 읽어냈으니, 이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도 그래질 것 같았다. 멀리 사는 친척, 애어른 할 것 없이 왁짜하게 모여 득시글한 시댁에서 음식 준비하고 설거지해대는 짬짬이, 부엌데기가 잠시 일손 놓을 때의 소일거리로 하는 십자수 놓듯, 그리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골랐다. 이 판국에 다비드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나 베르나르의 <나는 걷는다2>를 읽는 것은 망쪼고 분명 산만한 읽기의 대마왕 사례를 보여 줄 것이기에.

이 책 꼬박 이틀 동안 명절의 전야와 이후 초절정의 시기에 읽었는데 역시 예상대로 느슨하고도 지릿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지루해지지 않을 책을 고르기 위해였다지만, 정말이지 어른들이 모인 명절 즈음에 이 책을 읽은 건 좀 아이러니 같다. 왜냐 하면,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오는 (주로 50~60대 아주머니 친척들이 나누는) ‘뉘집 이야기’ 그것 말이다. 뉘집 자식 돈 있는 집으로 시집 장가 갔으나, 있는 집에 간 탓에 시댁 눈치에 맘대로 외출도 못하고 매여 사는 이야기. 있는 집에 장가 든 탓에 처가 손에 쥐락펴락하는 청맹과니가 된 뉘집 아들이야기. 뉘집 땅 사둔 걸로 갑자가 돈벌었는데 하는 모양새가 무식한 졸부 못 벗어난다고 비꼬는 이야기, 어느메 집은 어떻게 땅을 사두었는데 요즘 한참 망해 먹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 누구네 집 아들이 의사가 되었다고 그 집 어머니 떵떵거린다는, 어머니의 지위가 아들을 통해 나타난다는 의식의 반영된 듯한 튀틀린 이야기들 말이다. 돈에 관한 헤프닝들이다. 비뚤어진 가부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책에도 나온다. 딸만 둘 나은 며느리에게 어머니는 은연중에 아들을 바라, 그 며느리는 남편 몰래 뱃속 아이를 낙태시키고 나이 마흔에 세 번째아이(사내 아이)를 임신한다.) 이 소설 속의 내용과 어른들의 이야기가 몽롱하게 섞여드니 당최 이야기가 책이야기같고, 그게 그것 같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경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돈에 의해 굴절되고 변형된 인간의 사랑과 애정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애정이라 했나,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난 의사가 주인공이기도 하니, 세상사 이야기는 다 하는 셈. 어른들 모인 자리에서도 조강지처 집나가고 딴 여자와 바람난 누구 이야기가 곧잘 등장하듯이. 


어른들의 이야기, 그 요점은 ‘돈이 제일이고, 세상을 호령한다’ 에만 있는 것이 아닐거다. 돈의 물신성이나 가부장적 이념이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를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하게 만드는가 하는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의 폐해 같은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 책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부러 자본주의의 썩어빠질 노름을 이야기하기 위해 인물들을 선별했다고 보여 진다.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이야기라고는 평생을 치킨 만드는 일로 직업을 삼아 어렵게 자신의 치킨 가게를 연 치킨 박의 죽음에 관한 것. 나머지 등장 인물들은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돈으로 위세를 떠는 직업군과 자칭 재벌 집안의 인물들이다.

   

작가는 ‘뭘 자본주의 씩이나,’ 라고 말했다지. 후기를 보니 재미와 뼈대가 함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희망은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소설 속, 죽어가는 아들을 치료하는 데도 돈과 권력의 과시가 앞서는 속물성, 돈에는 돈으로 갚음을 하는 영빈의 형의 처세 등등. 작가의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필력으로 그려낸 우리 생의 허위 의식은 글쎄,,,, 이것이 세태라면 어쩐지 너무너무 씁쓸해지는 것이다.


누구는 이러한 박완서의 글쓰기가 굳은 살 베어나가고 새살이 차오르는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새살 차오르는 느낌을 잘 챙기는 것은 독자가 알아서 잘 할 나름인지, 나에겐 담배잎을 타놓은 물을 마신 듯, 입안 그득 쓴 느낌이 먼저이다. 구두를 신은 채, 가려운 발등을 긁는 것 같은 답답함도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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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2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박완서 선생의 책은 단숨에 읽힌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거야말로 엄청난 파워거든요.
리뷰를 어쩜 이리 잘 쓰세요?^^

마냐 2005-02-11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정말 절묘하게 고르셨네요. 명절에 뉘집 며느리가 읽을 책으로는 딱 아닌가..싶은 생각이...저두 담 명절에 함 도전해볼까요? ^^;;;

줄리 2005-02-1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얼렁 등재해 놔야 겠습니다. 박완서님의 이야기들 너무 좋아하는데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좋은 글 더 많이 남기셨으면 좋겠어요.

icaru 2005-02-1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님... 맞숨다... 진짜 잘 읽히는거 하나만으로 그랑프리깜 입니다!!! 박완서 님의 소설요.. 그나저나..로드무비 님...또또...과찬이십니다...! ^^;;

마냐 님...담 명절까지 반년 남았네요 ^^ 준비 기간 한번 넉넉하죠?
님 덕분으로 그 남자네 집 스타트~!! 아주 오래된 농담의 골짜기를 턴하여 지금사... <도시의 흉년>을 읽기 시작했는데요.....<도시의 흉년>은 무슨 주말 드라마 보는 기분이네요^^ 설마...이 작품을 갖고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로 방영했었든가...몰라요...


dsx 님~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님... 정말 아무리 소소하고 하찮은 이야기도 박완서님을 통해서 이야기로 나갈 때는... 이야기가 그렇게 맛깔스러워질 수가 없는거 같아요.... 박완서 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충분히 찾아 읽을 이유가 생기지요~ 저도 그분이 오래오래 사시고 오래오래 글 쓰실 수 있었음 한답니다~

2005-02-11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2-11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2-12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 그렇구나.... <도시의 흉년>드라마로 했었군요...
저....정말 놀랐어요...<도시의 흉년>에서 딸 수연이가 뒤로 아버지의 여자를 찾아가 그 집갓난아이와 여자를 챙기는 장면에서... 박순애가 아버지의 여자에게 잘 하는 드라마 한 장면이 스치는 거예요... 다른 것은 암것도 생각 안 나고....그 장면이 매치되면서... 이거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처음 갖었네요....
옛날 그 드라마의 그 장면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 들었었거든요... 아버지의 여자라면 얼굴을 쥐어뜯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을까. 엄마를 비참하게 만드는 나쁜 존재인데... 너무 이해가 안 간다 함서요...

하지만 그 드라마가 이것을 원작으로 했으리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박순애의 순박한 이미지와 이 소설 속의 위악하고 영리한 수연이와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kleinsusun 2005-02-12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댁에서 책을 읽는 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정말 생생한 리뷰네요.
아줌마들이 모이면 다 그런 얘기를 하죠?
" 그집 딸 정말 시집 잘갔어. 인물이 있나, 학벌이 있나 , 그렇다고 집에 돈이 있나 어찌 그리 남자를 잘 잡았을까..."
" 그집 아들 사시 또 떨어졌어. 이제 공무원 시험 준비한데."
" 그집 며느리가 해온 밍크봤어?"
아...이런 대화 넘 싫어요. 이런 대화에 저도 소재로 끼어서
" 그집 딸은 왜 시집을 안간데?" 이런 말 들을까 두려워요.ㅋㅋ

icaru 2005-02-1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자요마자요...
저희 어머님은 친척분들 앞에서 아들 자식은 키울 때만 내아들이고, 결혼하면 며느리 아들 된다는 말을 참 많이 하시지요~ 전 그런 말 들으면 억울해서 혼자 꽁해져요... 내 말 잘 따라 주고 내 아들처럼 남편이 굴어 준 적이 있어야 말이죠...허참.....
그런데...저도 참...유난하지요... 그 속에 진탕 어울려 화기애애하게 있지 못하고... 책이나 짬짬이 보고 말이죠...ㅠ.ㅠ

2005-02-12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네르바 2005-02-13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어서 조금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금이라는 여자 애가 혀를 낼름거리는 모습을 능소화에 비유했던 글이지요. 그 때 처음으로 능소화를 알았다는...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 손을 책에서 놓지 못할만큼 흥미롭게 읽긴 했어도 뒷맛이 씁쓸했었지요.

잉크냄새 2005-02-14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 남자네 집 >과 더불어 설 연휴에 박완서님의 글을 읽으셨네요.^^ 연휴 첫날부터 연휴가 끝난후 휘몰아칠 리뷰 후폭풍을 예상했었죠. <- 이거 < 아주 썰렁한 농담 >이죠.^^

icaru 2005-02-1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 님도 그랬군요... 잘 읽힌 것 치곤...오래남는 감동같은게...미진했다는...그 자리를 씁쓸함이 대신했죠~

아하하...잉크냄새님도...참...아주 객쩍은 농담이셔...
리뷰후폭풍은 몰라도..오늘 연휴월요병 후폭풍은 이거 아주 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