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23년의 어느 하루, 아침에 눈을 뜨면서 버지니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버지니아는 펜을 잡고, 델러웨이 부인에 대한 글을 시작한다.

1949년의 남편 생일날 아침, 로라는 읽던 버지니아 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의 책을 접어두면서 침대 맡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의 생일 준비나 하는 평범한 일상이 그녀를 기다린다.

1999년의 클라리사는 소설 속의 델러웨이 부인처럼,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한 다음, 한아름의 꽃을 안고 거리를 나선다. 클라리사는 세 인물 중, 가장 현실적으로 강하고(생활력이 있고, 경제적으로 독립한), 일견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소설 속, 세 인물은 서로서로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23년의 49년의, 20세기말의 각각 어느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이제 막 집약하여 보여 주려 한다.

1923년의 '버지니아'는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지극한 간병을 받고 있었다. 사랑하는 남편이고,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한다는 편집자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그 간병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일견 버지니아의 자유롭고 활기찬 도시 생활에의 갈망을 저지하고 있는 무엇처럼 보인다.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들은 그녀를 까탈스럽게만 여기며, 그녀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많이 의지하고 자랐던 버지니아의 언니마저도 버지니아를 심정적으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껴한다. 고로, 위대한 예술 작품을 쓰는 버지니아는, 사실 현실 속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완벽히 구하지 못하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1949년의 '로라'는 놓쳐버린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탐험되지 못한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도, 미련을 접고, 아들에게, 남편에게, 자신의 가정과 의무들에 헌신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기가 너무 힘들다.(그래서 그녀의 시선은 시종일관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는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하였다.)

1999년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 편집자인 클래리사. 그녀는 지금 옛 애인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한다. 그녀는 버지니아 쓴 소설 속의 델러웨이 부인처럼 '도시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삶의 평범한 즐거움을 계속 사랑하려 한다.

처음에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로 보고, 다시 마이클 커닝헴의 소설을 찾아 읽고, 다시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조각조각의 몽롱한 여운들이, 영화의 그것인지 책 속의 그것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하지만 이 감상의 근원지가 둘 중 어느 것인지 출처를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같은 작품을 두고 영화 쪽이 전달하려는 이미지가 좀더 강렬하고 선명했다면, 원작인 소설 쪽은 독자마다 다양한 해석과 느낌을 담을 자리를 넉넉히 마련해 두고 있었다는 차이일 것이다. 한 작품에 대해 한번 이상 읽을 줄을 모르는, 인내심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내가......왜 보고 또 읽고 또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 일어나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것이 하루하루 반복되어 일상이 되고 세월이 된다. 그런데 아주 간혹 우리의 삶이 전혀 뜻밖에도 활짝 피어나면서 우리가 상상해 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 주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 (물론 그 앞뒤에는 항상 더 암울하고 어려운 시간이 따르기도 하지만)

'세월'이라는 서사시를 통째로 읽는다는 건, 그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처럼'인생무상'한 행위가 아니라, '내일의 아침'을, '희망'을 품게 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보여 주려 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자살을 생각했던 로라는 결국엔 죽지 않고, 집을 나와 자기가 희망하던 도서관 사서로서의 삶을 살았고, 클라리사는 옛애인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또다른 내일을 희망하며 잠자리에 든다.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 스티브 달드리가 만든 동명의 영화. 삽입된 피아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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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8-0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님 서재에서 추천하는 글 보고 찾아 읽었는데 정말 멋진 리뷰군요. 잘 익은 듯한 맛있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 영화만 봤는데 정말 소설도 같이 읽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이 마구 드는군요. ^^

icaru 2004-08-04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후...넘치는 칭찬에 몸둘바를 몰라하고 있어요.... 님의 코멘트는 하니 케어 님...서재서도...많이 뵈었었는뎅...조만간 인사 올리러 가야겠네요~~!!!
요즘에...통...삶이..팍팍해서리...짬을 좀 못내구있네요...여유 생기면 후딱 가야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