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
김미진 지음 / 민음사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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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이라는 소설을 찾아 읽게된 계기는 그랬던 것 같다. 1997경에 잠시 모 일간지에 일주일마다 한 주간의 미술 전시회 소식을 전하던 고정 칼럼니스트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미진이다. 칼럼 옆에는 항상 단아하고 지적인 외모의 이 여자가 밝게 미소짓고 있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미술계에 종사하고, 일찍부터 도미를 해 대학시절부터 유학 생활을 한 예쁘장한 외모의 그렇고 그런 사람인가보다 했지만, 그의 칼럼을 지켜보면서 그가 기존의 미술계라는 질서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저널리스트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기보다 3년 앞서 벌써 그가 장편 소설 하나를 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술가가 그리는 소설이란 어떤 방식일까하는 호기심 반으로 읽게 된 것이 바로 표지도 세련된 <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이다.

어느 정도는 글쓴이의 생활 주변을 소설 속에 반영하고 있기라도 하는 듯, 이 이야기는 미술학도들의 사랑과 열정과 예술의 문제를 간결한 문체로 이야기한다. 간결하다는 것이 지나쳐 약간은 작가가 우리말 구사 능력이 딸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1부의 쌍과 지니, 2부의 글라스와 지후, 3부의 윤과 쿠키, 4부의 지니와 류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갈등하는 내용을 통해 작가는 사람들의 관계 맺기 방식에 있어서, 상대방의 정작 중요한 부분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짧은 단문의 생동감 있는 문체로 그려낸다. 이러한 문체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 소설의 끝에 붙어 있는 평론가의 표현이 백미이다. (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은 이 평론가가 이 소설을 평하며 붙이 해설에 딱 들어맞는 속담이 아닐까 싶다.) 평론가 조성기는 이 소설의 관계 맺기 방식을 존 바스의 소설<성산 악극단> 제1장 ‘피아노를 조율하면서’를 인용하며 김미진의 이 글의 경향을 설명한다.

“배는 정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류에 따라 강 안을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며 관객은 양쪽 둑을 따라 앉아 있다. 그들은 배가 지나갈 때 그 연극의 한 장면이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다른 장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조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중략) 인생도 그런 것이라고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우리의 친구들은 흘러 지나가고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들이 흘러 지나가면 우리는 뜬 소문을 듣거나 아니면 그들의 행방도 모른다. 친구들은 다시 밀려 오고 우리는 서로의 우정을 새로이 하거나 혹은 서로가 남남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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