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가득 차 있는 내가 좋아하는 최영미. 그래서 그녀와 관련된 글은 무조건, 되도록, 많이 읽는다. 가을이니 시라도 읽어볼까, 마침 그녀가 엮었다니, 인터넷으로 구매한 내게 많이 실망이다. 눈까지 비비고 있다. 시에 대해 쓴 글은 해설일까, 수필일까, 넋두리일까, 경험일까, 추억일까? 라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국적 불명 같다. 많이 많이 아쉬웠다. 그러면서 화가 난다. 왜 이렇게 책을 만들었는지, 본인의 출판사라면서... 번역한 시는 원문이 있기도 하고 없는 것도 있고, 보를레르 '여행'에서 가운데 (중략)은 무엇인지, 허영자 '행복'에서는 오타까지 있다. 본인의 말을 지우고 시들로 가득 채웠다면 이 가을이 얼마나 풍성했을까 싶다. 시작하는 나의 가을을 되돌리고 싶다. 아무튼, 아직도 화가 난다, 책은 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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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안녕 내 사랑 - 시인이 해설하는 세계의 명시 50편 이미 6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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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쉽게 살라고 그녀는 말했지
그러나 나, 젊고 어리석었고
그래서 지금 눈물로 가득하네

-예이츠, 버드나무 정원 아래 중(10쪽)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윤동주, 새로운 길 중(44쪽)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르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최승자, 기억하는가 (54쪽)

내가 멍하니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왜 그리 멍하니 있느냐고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황인숙, 알 수 없어요(92쪽)

아이들이
보물 찾기 놀이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무 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거야

-허영자, 행복 중(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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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독서와 글쓰기는 런던 거리를 걷기부터 시작된다. [런던 유령]은 그녀가 소설들을 쓴 방식과 맞물려 있다. 특히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에서 그녀의 글 쓰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어휘 속에서 시간과 기억에 맞는 단어를 골라 적합하고 적절하게 정확하게 쓴 글들이다. 거의 자서전적인 글이라 볼 수 있다. 그녀의 글은 경계가 있으면서도 경계가 사뭇 다른 서로 침범할 수 있는 선과 악, 미와 추, 흑과 백, 육체와 정신, 내면과 외면이 있다. 우리가 집중하여 온전히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책을 읽는 방법은 각각의 책은 여러 면에서 사람과 같다는 그녀는 "사람을 두고 '기묘한 일이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 또는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잘 지낼 수 없다고 확신해. 나는 결코 당신을 견딜 수가 없어'와 같은 직관적인 말을 한다. 이것이 독서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187-188쪽)." 고 말한다. 그러므로 독서는 사람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자신과 공통된 경험과 유사성을 찾아내어 타인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하는 방법이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런던 배회는 '그녀의 독서와 그녀의 자아들, 그녀의 사회를 여는 키' 자체였다(2240쪽)." 그녀가 다니는 것을 소위 걷기나 산책보다는 배회라고 명하니 [런던 유령]이라는 제목과 부합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집 밖을 나와 다닌다는 것, 그 뿐 아니라 규범과 제약이 많이 따랐던 학교까지 벗어난 그녀는 배회를 통해 글을 썼다. 그녀의 글쓰기의 근간이 되는 배회에서 주축이 되는 세 권의 책을 천천히 읽고 싶다. "[댈러웨이 부인]은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과거를 머금고 있고, [등대로]는 오늘 하루에, 그리고 미래의 오늘 하루에 같은 사람들이 머물고, [ 파도]는 성장, 노쇠의 과정을 전부 보여주지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겪어낸 뒤의 내면을 보여준다(222쪽)." 세 소설은 우리의 삶의 과정을 보여주는 '세월' 자체라 할 수 있다. 

요즘 걷는 것에 대한 말이 많다. 심지어 광고에도 나온다. "쓰기와 걷기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서 동격을 이루는 지극히 비슷한 행위이다(252쪽)." 그러고 보면 수많은 작가들이 걷기를 통한 사유 활동으로 창작을 했다.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롤]도 산책으로 탄생했다나.. 

드문드문 읽은 글에서도 "왜 여자는 아무 부담 없이 자신이 태어난 세상을 혼자 걸어서 탐험하면서 생각을 할 수 없는 걸까?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데 말이다. 훤한 대낮에 밖에 나가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게 지나친 요구인가?([자기만의 산책] 중에서)"


-배회 : 아무 목적도 없이 어떤 곳을 중심으로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님.

-산책 :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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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유령 - 버지니아 울프의 거리산책과 픽션들
최은주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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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는 기억을 채우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들은 기억의 밀도에 따라 길게도 짧게도 채워갈 수 있다. 기억은 시간을 제 마음대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완전함에 가까운 기억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긴 시간처럼 조작될 것이다. 기억이 현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진실만을 담고 있지 않은 이유이다. 그만큼 기억은 교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 (10-11쪽)

읽는다는 것은 서술된 사건과 그 의미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빛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 있는 길들에 대해서, 궁극에는 어쩌면 모든 진실에 대해서, 벼린 언어들의 반짝임에 대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에 멈칫하고 술렁거리므로 독서는 수동적이거나 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운동적 반응을 일으킨다. ‘여러 번‘을 헌신적으로 읽을 때, 그때마다 보지 못했던 문장과 이야기가 드러날 것이다. ‘도대체 앞서 읽을 때 뭘 한 거야?‘라고 묻게 된다. (중략) 늘 거기 있었으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상의 부분들, 사물이든, 사람이든, 나를 막아서지 않고 존재했으므로 무심했던 것들이 어느 날 불쑥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내밀 것이다. 그렇게 결여를 통감하는 것에서 삶의 성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9-20쪽)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독서의 목적을 생각했을 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나, 배신, 복수, 사고, 죽음 같은 사건의 전개, 클라이맥스, 결말이 없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서는 끝에 다다라서도 끝나지 않은, 충족되지 않음. 충족될 수 없음이 있다. 대신 그녀의 소설은 독자를 경험하도록 한다. (72쪽)

소설은 사물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연관짓고 그들의 깊은 심연 속에 보편성을 이어 놓는다. (103쪽)

그러나 원래부터 의미 있는 일은 없다. 누가 봐도 별 의미없는 일에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때만 의미가 생겨난다. (122쪽)

버지니아 울프 자신도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보다 더 동질적이었던 그 시대의 독자들과는 다르다. 따라서 잘못 읽는 것이 당연하다. (중략) 중요하다고 여기는 탄생, 성장, 결혼, 출산, 노화, 죽음과 같은 사건들을 사소하다고 여기는 단상들의 우위에 놓지 않고 동시적으로 써나가고 있으므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건들이 전경이 아닌 단상들과 동등하게 뒤섞여 혼재할 뿐이다. 분명 인생 전반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지만, 변하는 것들, 그리고 변하기 때문에 순간에 대해 거대한 눈으로 바라볼 것에 온 집중을 다하고 있다. (186-187쪽)

[댈러웨이 부인]에서 [등대로]로, 그리고 [파도]롤 갈수록 외부의 사건들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외부의 사건과 충돌하며 생겨나는 개인의 느낌, 슬픔, 시선이 우선한다. 이런 읽기 어려운 책을 어째서 읽어야 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어째서 우리는 외부적인 사건에 충격받은 개인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면서도 개인의 느낌, 슬픔, 시선이 어렵다는 것인가? 소설은 해답을 주는 대신 느낌, 슬픔을 직시하게 하므로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직시하게 하며, 다시금 사유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렇게 침묵에 닿아 있는 내면에 침잠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므로 직시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200-201쪽)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관찰능력, 그리고 공통감각을 찾아내는 것,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느낄 수 있는 오버랩되는 삶의 유사성, 연륜에서 오는 경험 같은 것들로 타인을 읽어낸다는 것이라라.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제대로 일해할 수 있을까?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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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났다]는 조르주 페렉의 자전적인 글과 자전적 글 쓰기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기록한 글들의 모음집이다(129쪽)"

우리는 페렉이 글 속에서 말한 것처럼 누구든 [나는 기억한다]같은 글을 쓸 수 있다. 

페렉이 글 쓰는 방식의 일부를 옮겨 본다. 

페렉은 파리의 거리, 광장, 교차로 등 열 두 곳을 선정하여 자신이 간직한 추억들과 일어난 사건들, 혹은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과 연결되는 장소들을 묘사한다. 첫 번째는 바로 그 장소에서(카페 혹은 바로 그 거리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가능한 한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서 묘사한다. 상점들, 건물의 세부 사항들, 아주 소소한 사건들(지나가는 소방차, 돼지고기 가공 상점에 들어가기 전에 개를 묶고 있는 부인, 이사, 광고물, 사람들, 기타 등등...)을 열거한다. 두 번째는 장소에 상관없이(집, 카페, 사무실), 어느 곳이든 기억 속 장소를 묘사한다. 그 장소와 관련된 추억들을,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다른 기억들을 떠올려 묘사한다.

그가 기록한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추억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합 속에서 하나의 형상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기억들 사이의 간격을 채우는 묘사가 된다. 그리고 기억 속에 들어있는 망각을 대체하여 무한한 픽션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쓰인 글은 '연대'의 일부이다. 페렉 개인에서 출발하여 우리와 같은 이들에게 이동하는 움직임이다. 페렉은 이것을 공감이라 부른다. 

저자의 기억과 허구가 뒤섞인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자전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껏해야 일기 정도, 하지만, 나의 글을 누가 관심이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어른들 중에 자서전을 쓴 이도 있던데 냄비 받침으로 맞춤이다... 굳이 그 좋은 나무를 베어 나까지 보탤 필요야 있을까..   

환갑이 지나면 병원과 가까워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오른쪽 무릎이 아파서 보니 아주 작은 혹이 생겼더라.. 거금 들여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보니 아직은 착한 놈(?)이라나, 나는 혹이라 말하고 싶은데, 의사는 종양이라 한다. 이래저래 슬픔만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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