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비언 고닉 글에 빠져 있다. 

짝 없는 여자, 나와 게이, 레너드는 둘 다 뉴욕커다. 그들은 우정이 쌓이는 관계다.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는 깊어 만 갈 것이다. 관계는 어찌 될 지 모르겠지만.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짝 없는 여자는 삶을 느끼고, 그 느낌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부분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게 부럽다. 이럴 때 이런 기분을 정확히 알고 싶고 묘사하고 전달하고 싶은데, 도무지 제대로 끄집어 낼 수 없는데, 짝 없는 여자는 그걸 해 내고 있다. 

나에게는 마음을 뒤집어서 보여줘야만 되는 어려운 것들을 그녀의 글에서는 쉽게 발견되고 읽힌다.   

예순을 넘어서야 몽상이 아닌 현재의 삶이 보이는 걸까. 그녀가 살고 있고. 걷고 있는 '뉴욕'서만 가능할까. 그녀에게 영혼의 안식처 같은 뉴욕은 그녀와 뗄 수 없는 장소이다. 뉴욕에서 사는 사람의 삶은 사람들이 자기 표현력의 증거로 내는 목소리가 켜켜이 포개어 올려진 층층이 쌓인 무수한 목소리들을 다루는 고고학과 같은 삶이라 고백한다. 그래서 뉴욕과 일심동체인 그녀의 삶은 환상이 결코 아닌 온갖 갈등이었다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뉴욕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고. 그러고 보니, 영혼의 안식처나 대상이 있어야 한다.

1935년에 태어난 비비언 고닉은 구십이 가깝다.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더 많은 그녀의 글에서 나의 편견은 길을 잃는다. 이 글은 예순 쯤에 쓴 글 같다. 글을 참 잘 썼다. 

왼쪽 정렬로 편집 되어 있어, 그녀의 문장과 잘 어울린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든다.

비비언 고닉의 글을 읽을수록, 남은 삶은 우아하게 살아야겠다는, 연결되는 지점이 도무지 어딘지 모르지만, 그런 다짐을 했다. 이제는 왕자가 없다는 정도는 알았으니까. 그리고 처음부터 왕자가 아니라 완두콩을 찾았다는 것 정도는 알 때도 되었다. 나도 예순이 넘었으니.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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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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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와 나는 운명처럼 지워진 사회적 불평등 속에 내던져지듯 태어났다는 강렬한 감각이 우리 두 사람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른다. 우리의 화두는 살아보지 않은 삶이다. (중략)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중략)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란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6쪽~8쪽))

가면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이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주는 건 오직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뿐이었다. (20쪽)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걸 사과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판단하기 좋아하면 왜 안 되는데? 나는 판단하기 좋아하는 게 좋다고. 판단을 하면 안심이 된단 말야. 절대적인 것들. 확실한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그런 걸 되찾고 싶어. 되찾을 순 없는 걸까?" (중략) "예전엔 모든 사람이 참 어른 같았지. 근데 이제는 아무도 안 그래. (47쪽)

이십대의 마지막 날 나는 어느 과학자와 결혼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황폐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뭐랄까. 영문은 알 수 없었다. 바뀐 것도 전혀 없었다. 남편도 그대로고 나도 그대로였다. 몇 주 전만 해도 아침에 눈을 뜨면 마냥 들떠있었는데. (중략) 저 남자는 누구지? 나는 생각했다. 저이는 내 짝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또 생각했다. 1년 뒤 우린 이혼했다. (69-70쪽)

삶이 불능의 총합처럼 느껴지려 할 때면 나는 타임스스퀘어까지 산책을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오령넘치는 하층민들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면 금세 통찰이 회복된다. (73쪽)

실제로 삶을 빚어내는 바탕이 되었던 공감과 연민이 차츰 깎여나가면서 우리가 우정을 바친 그 마음과 영혼의 모험도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중략) 영원한 친구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84-85쪽)

세상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생각했다. 나는 내 울분을 제조해내려고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지만 왜? 하물며 소중한 인생에 내처 그걸 붙들고 있었다니. 대체 왜? (122쪽)

자기를 위해서도 못 하는 일을 상대방을 위해 해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134쪽)

나도 시모어 크림과 다를 바 없이 오랜 세월 걷고 또 걸었던 그 수많은 거리와 가로수 길을 터벅터벅 걸어다니며 지치지도 않고 꿈에 그리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될 줄이야. 그러다 예순이 되던 어느 날 어떤 낯선 시간이 아늑하게 짜여 있던 이 구성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162쪽)

예순이 된다는 건 앞으로 살날이 여섯 달 남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듣는 것과 비슷했다. 내일이라는 몽상 속 피난처로 숨어드는 것도 하룻밤 새 옛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오직 텅 비워진 방대한 현재뿐이었다. 이걸 채우는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겠다고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물론 말이 쉽지. 몽상을 끊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그 긴 세월 해본 적도 없는 현재를 점유하는 일을 대체 어떻게 해낸단 말인가? (중략)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존재의 순간들‘을 자주 생각한 날들이었다. (165쪽)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건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완결되지 않는다. (167쪽)

외로움이라는 습관은 질기다. 레너드 말로는 외로움을 쓸모 있는 고독으로 바꿔내지 않는 이상 난 영영 엄마의 딸일 거란다. 물론 그 말은 맞기는 하다. 사람은 이상화된 타자의 부재로 인해 외롭지만, 그 쓸모 있는 고독 속에 스스로를 상상의 동반자 삼아 침묵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각 있는 존재라는 증거를 방 안 가득 채워 넣는 ‘내‘가 있다. 이런 통찰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은 에드먼드 고스‘로부터 배웠다. (184쪽)

지금 여기, 또다시 여름날 저녁이 왔고, 나는 그 광장을 다시금 걷고 있다. 거리를 뒤로하고 얼굴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아로새긴 채 막에 가려진 그 오래된 추억을 똑바로 들여다보다, 추억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광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 검은 피부, 갈색 피부, 젊음, 떠돌이와 약쟁이와 엉성한 기타 연주자로 북적거리는 곳.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느낀다. 내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은 온갖 갈들이지 환상이 아니었으며, 뉴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하나다. (215쪽)

우리는(레너드와 나)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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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는 부모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번역도 참 잘했다. 아껴가며 읽은 글이다. 엄마와 나를 돌아본다. 엄마는 나에게 넘치는 애정으로, 난 조금의 애증으로 엄마를 대하고 있다. 엄마와 나 사이의 애정과 애증의 선분에서 직선으로 오가는 게 서로에게 교차되고 있다.   

40대 딸과 70대의 엄마는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맨해튼까지 걸으면서 주고 받은 이야기에서 과거의 시간 배열은 일정하지 않지만 쫀쫀한 기억과 표현이 잘 버무려진 논픽션이다. 엄마와 딸, 가족, 이웃, 딸의 남자들의 이야기가 엄마와 걷고 있는 이 거리에서,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딱 알맞게, 적절하게, 세밀하게, 상세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어 있다. 특히, 상황과 사건에 처한 개인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엄마와 딸은 애정과 애증을 오가면서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서로에게 딸이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즉 그 엄마의 그 딸이 있을 뿐이다.

엄마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말이 있지만 결국 그 엄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것에 간섭하고 개입하는 엄마가 딸의 삶의 기준이 된다. 하지만 글 속의 모녀처럼, 서로가 끈끈한 가족 관계를 넘어서서, 온전한 한 개인으로서 바라볼 수 있고, 서로의 삶을 인정하거나 더 이상의 '항상'이라는 패턴을 벗어날 수 있는 관계까지 와야 한다. 나도 세월이 가면 그럴 수 있을까. 나이가 더 들면 그럴까,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시간은 우리가 제대로 살기 전에 가버린다는 점이다. 

딸들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엄마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안 했다고, 왜냐하면 엄마의 시간과 인생은 딸들에게서는 늘 미래이니까... 곧 우리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으로 어떻게 보면 언제나 새로운 것만 있는 시간으로 그러다 과거로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서 돌아보면 왜 하지 않았을까, 왜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살아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니.  


*54쪽 부분 오타일까, 오빤 열여섯, 아빤 사순 후반이어서...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이 블로그를 자꾸 회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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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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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우리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낸다. 나는 마흔다섯. 엄마는 일흔일곱이다. (12쪽)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26쪽)

우리는 엄마와 딸이 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72쪽)

눈물은 바닥에 떨어지고 샘물처럼 솟아올라서 복도를 가득 메웠고 부엌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거실로 흘러들어 두 개의 침실 벽에 부딪쳤고 우리 모두를 떠내려가게 했다. (96-97쪽)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23쪽0

하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중략) 내가 엄마의 불안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함에 완패해버렸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엄마는 내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엄마한테 말할까. 그건 죽음과도 같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엄마가 모른다는 게. 절망과 혼란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른일곱 살 먹은 이 여자아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죽고 싶어진다고 말을 할까? 엄마는 또 언성을 높이겠지. "넌 날 이해 못해. 여지껏 한 번도 이해한 ㅈ거이 없어!" (161쪽)

한편 우리가 걷는 이 도시는 우리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격정의 드라마에 길바닥 버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190쪽)

나는 그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지점까지만 사랑했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내 안에서 무언가 불투명해졌고 그에게 줄 게 없어졌다. 나에겐 그 불투명한 막이 보였다. 입으로 맛볼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스테판을 향한 내 감정과 나 사이에, 아니 어떤 남자가 됐건 그와 나 사이에, 확신할 수 없는 일종의 투명막이 드리워져 있고 나는 그 막으로 ‘사랑해‘라고 속삭일 수도 그 말이 들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느껴지게 할 수는 없었다. (239-240쪽)

스테판, 데이비, 조. 그들은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사람들처럼 보였고 따로 보면 그렇기도 했지만 나는 이 남자들과의 애착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들과 잠시 잠깐 숨어 지냈을 뿐이었다. 그 남자들을 고른 이유는 그들이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즉 사람의 실패로 인해 마비돼버리고 침울해진 이 순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294쪽)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중략)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벼려." (중략)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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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기반으로 한 소설, [예수]는 기독교인이라면 픽션과 논픽션으로 오가는 글로 읽게 된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14회로 마치는 드라마 같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지금의 우리와 나의 모습으로 환원되고 대치 된다. 특히,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속마음이 인상적이다.

나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모태 신앙이지만 60년 이상 다닌 교회를 휴학 중이다. 교회라는 공간의 의미도(교회 예배만 드리고 오는 상황에서), 교회 출석과 신앙의 관계도, 성경 말씀과 현재의 삶에서, 예수가 나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저자가 마지막에 한 말,

'나는 세상 것들에 강하게 얽매여 있는 평범한 그리스도인, 평범한 평신도에게 그리스도의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 


*모리스 젱델이 처음에 한 말,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교리라기보다는 그분의 인격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그 의미와 생명을 한번에 잃지 않는 한, 그리스도와 떼어놓을 수 없다. 비평가들은 통찰력을 가지고 끈기 있고 충실하게 초대 교회의 신앙을 집약한 책들을 연구하는 데 탁월하게 기여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기여했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성경 본문에 담긴 삶의 비밀을 발견할 수 없다. 성경 본문의 영혼인 하느님의 현존이 발하는 빛 안에서 연속성과 움직임,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겨울이 되었다. 새벽 기도 뿐 아니라 교회 행사에 모두 참여하는 동생과 김장하러 간다. 네 자매가 처음으로 모여 김장하기로 했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하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닌 우리의 계획, 우아한 백조들만 엄마를 돕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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