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그대로 오직, 미친, 완벽하게, '책'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책은 우리의 인생과 같다.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있다. 우리는 책의 텍스트를 물질인 책과 동일시 한다. 나 또한 책을 모으고 있다. 수 백 권의 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거나, 올려져 있지만 한 번씩 둘러보는 것 만으로, 이 공간에서 숨쉬는 것 만으로 만족한다. 수명이 조금씩 길어지는 거 같다. 나의 정신을 버무려 읽은 책들, 그래서 나의 삶의 일부가 된 글들은 오롯히 나만의 인생을 만들고 있으니. 저자가 말한 우리가 소장하는 책의 분량만큼, 딱 그만큼의 텍스트가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간다(60쪽). 그래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입고 있는 옷이라 생각하면, '알맞은' 책을 고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빽빽하게 꽂힌 책을 배경으로 한 모습은 또 다른 나의 삶을 드러내 준다... 그리 중요하게 탔던 말들이 자동차로 대체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함부로 읽을 수 없고 무겁고 큰 책들이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손에 알맞게 들어오게 될 줄은, 종이책은 전자책과 더불어 나 보다는 오래 살아 남을거라 믿고 싶다. 이유는 책에 중독된 자들은 점점 더 많은 책을 필요로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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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시편을 사용한다. 이때껏, 모범 답안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그러니까 삶과 괴리된 모습으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의 과정보다는 결론을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도록,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결정된 모습으로 기도한 모양새다. 특히, 지금의 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기도하기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이나, 어떤 상황에서 상처받은 부분을 포장하여 그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그 사건의 상처를 봉합해 달라고. 그게 아니라, 우선 그 상황과 상태나 사건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출발점 같다. 

시편을 도구 삼아 기도해 본다.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고 존재가 되어가도록 기도한다. 

햇살이 따뜻한 봄이 왔다.  

추신) 이 책을 기도하시는 분들에게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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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라의 순간들이 모여서 우리의 인생이 된다. 그 순간들로 하여금 기쁘기도 하고 곤란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그것을 들여다보고, 포착하는 사람, 사울의 사진은 몰랐던 부분을 알게 해주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이나 장소, 그, 그녀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방법에 따라 주관적으로 달라진다. 눈으로 들어 온 피사체는 보는 방식에 따라 각자의 삶의 형태를 달리 만든다. 희미하고 모호한 사진도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끔 다음 생애에 꼭 하리라,하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것들, 잊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 당장 할 것도 미루면서... ㅎ


*'사울레이터 :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사진을 3월 27일이 지나기 전에 피크닉으로 보러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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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잊은 듯하다. 동네 한바퀴라는 이름으로 적어도 몇 번은 등등으로 혼자서 다짐했건만, 걷기 위해 문 밖으로 나서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새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다. 기껏 2주에 한 번 도서관을 걸어 가려고 애쓰고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특히, 도시의 덜 안전한 지역을, 지름길을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걷기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성장과 성숙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삶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면서 유색 인종이라면 좀 더 달라지겠지라고...  그녀가 걷고 있는 세상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니다. 

요즘, 걷다 보면,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말말말들이 넘쳐난다.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나 하는지, 그러니까 수 많은 말들은 그게 아니다, 모른다, 기억 안 난다로 잡아떼기도 전에 정작 잊혀지는 말이니까. 

누구나 어디라도 어느 때라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어야, 즐길 수 있어야...  맹자의 말이 떠오른다.

樂民之樂者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民亦憂其憂

樂以天下憂以天下然而不王者未之有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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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아무도 아닌', 각각의 소설의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주인공들의 이름(오제, 제희)도 합리적이다는 생각까지 드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생생하게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충분히 일어나고 일어났을 법한 일들이, 지금도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면, 한꺼번에 단번에 읽기가 힘들다. 나의 경험이었고, 부모가 당한 일이었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들이고, 너가 처한 어려운 상황도 되는데도...... 계급이 다르면 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밝힌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는 말처럼, 나에게 발생한 힘듦과 어려움, 고통, 분노, 상실 등을 아무것도 아닌으로 치환하여야만, 살 수 있기에, 그러지 않을까, 나는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도 아닌' 은 바로 '나' 라고. 그리고 내가 겪었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라고. 그렇다고 삶이 모두 그런거다라고 일갈할 수는 없다. 아픔도, 분노도, 욕구도, 모두가 상이할 거고,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취향을 절로 알고 싶지는 않다. 이름과 계급이라는 말, 곰곰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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