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을 읽는 내내 속이 울렁거린다. 모두에게 적어도 발가락 하나 정도는 꼬투리가 될 만한 이야기라서 그럴까. 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나에게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로 전달된다. '할마이는 언니에게 지나간 사람이라고. 지나간 사람이 언니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298쪽)', 지나간 사람이 현재의 사람의 발목을 잡으면 안된다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하면서 모두들 부여 잡고 있다. 누군가에게 하는 말은 자신에게 하는 말로 반복된다.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부질없지 않고 의미가 있음을, 결국 나로 되돌아와서 나에게 집중해야 하는 거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큰글자책, 453쪽)

'고려거란전쟁' 마지막 회를 보았다. 적군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단단한 마음을 가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래전 그 상황을 떠올려보면 무너질 거 같은 마음이 먼저 드는데.. 그래서 귀주대첩이 아직까지 유효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야말로 '문체 연습'이다. 이야기 하나로 아흔아홉 가지 방식으로 변주 된 글을 읽을 수 있다. 첫 번째 요약한 이야기, '약기'에서 새로운 형식과 문체로, 무형식으로, 일상에서 사용되지 않는 문체, 외국인이 말하는 문체, 고문으로, 외국어가 침범한 문체 등으로 아흔아홉 개의 문체를 가진 아흔 아홉 개의 글이 있다. 그리고 원문과 해제까지 들어있다.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진다.  

레몽크노 글을 읽다 보면, 생각지 못한 문체의 글을 저절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수많은 작가들은 제각각 고유의 문체를 가지고 글을 쓴다. 하지만 이들은 독자가 수용할 수 있는 폭에 들어 있다. 

레몽크노 '문체 연습'은 가히 실험적이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글쓰기, 발상의 전환, 무한의 상상력, 실험 정신, 아주 다양한 문체로 독자에게 독서의 폭을 상상 너머까지 넓혀 준다.

하지만 나는 뻔한 문체로 글을 쓴다.  

날씨는 변덕이 심하지만 봄이 가깝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13-14쪽)  인생사에 좋기만 하나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법(49쪽)' 

여든 너머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노인, 노화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되는 노년, 쓸쓸함과 불편함도 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삶, 실제로 지은이 같은 노인은 많지 않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노인들도 있다. 개인의 성격, 자라온 환경, 다양한 부분이 노인의 삶을 좌우한다.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정작 늙어가는 노인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 기쁘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수십 번 수정하여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라면, 비록 사랑하는 여인은 잃었지만 지금까지 곁에서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늙는다면 암에 걸리더라도 늙는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당신이 마음대로 말한 살고 싶은 나이가 지나게 되면 안도하게 되는 거지. '노령이라는 세계는 미지의 우주이자 뜻밖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18쪽).' 오직 그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늙어가는 당사자만 알 수 있다. 여든 이후에 쓴 도널드 홀 에세이, 글이 참으로 맑고 담담하다. 관조하며, 진짜 현재를 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늙어가는 방식을 미리 맛 본, 모범 답(?)을 알았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매일이 똑같고, 이렇게 계속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내 몸 하나 잘 건사하여 주변의 도움을 최소로, 늦추게 하는 게 삶의 의미일까.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것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게 살아가는 의미가 될까.  

어느 순간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게 맞는 말이 된 나이가 되었다. 

건강 검진 결과로 몇 가지 더 검사를 받았고(결과 나오는 시간 동안 지금 죽기에는 아니다 싶은, 별별 생각이 들었다. 매일 눈뜨면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내는데도), 설날에는 해랑 열차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잘못된 선택으로 여기고 있는 결혼한 날이 코앞이다. 그때도 눈이 오고 추운 날씨에 모두가 얼었었다. 아들이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초대했다. 맞아, 결혼해서 제일 잘한 일, 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 "나", 어떻게,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내가 진짜로 나인가? 

조만간 현실에서 나올 법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상상을 더 보태자면, 지금도 철이와 같은 이들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간다움을 알 수 있을까. 

굳이 철이와 구별한다면, 잊는다는 것, 현재와 과거, 미래가 있고, 죽음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흘러 보내면서 결국에는 자신까지 잊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으로 구분되지 않을까.

첫 페이지에 '작별인사'를 대변하는 말이 나온다.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예전에 본 eagle eye 영화가 기억났다. 주변에 보이는 인공지능 로봇들까지... 그런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연초부터 바빴다. 어디서 한달살기 계획이 5월로 미뤄지면서 다시 수정했다. 

-Virginia Woolf 'Blue & Green'도 읽었다. 어려웠다. 하버드생이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하니..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비언 고닉이 길을 나서는 이유, 길 위에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주인공이 되었다가 배경이 되었다가 한다. 그래서 연결이 필요하다. 말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결에 필요한 말은 정보 전달에 많이 사용되는 말 뿐이다. 

7개의 소 제목을 가진 수필이다. 이제껏 보아 온 수필에 대한 관점은 건너뛰어야 한다. 이러한 글도 있다니, 주변의 누구의 공연을 보면서 더 관찰하고 접근하고 글을 쓰고, 고민하면서 자기 이해, 통찰까지, 친구, 결혼, 타인, 관계, 외로움, 삶,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나의 공연이 누구에게는 관찰과 통찰의 근간이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는데, 온전히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말들로 관계 맺기에 서툴다. 

저자는 집요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세상과 온전히 관계 맺기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뫼비우스의 띠 같다.         

기차를 타고 몇 군데를 다녔다. 오는 길에 눈이 내린다. 눈 오는 차창 밖은 괜찮은 볼 거리가 된다. 하지만 눈 온 거리를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에게는 불편일 뿐이다. 

거리에서 펼쳐지는 모두의 공연이 취사 선택되는 이유가 되겠다. 그 결과는 어마 무시하게 다를 수 있겠지.


*비비언 고닉 글 중, 이 책이 제일 마음에 든다. 

*잘 살았다. 양쪽 어깨를 토닥토닥.

Happy New Yea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