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대책이 없는 이가 아주 작은 책방을 운영한다. 갈 때마다 뭔가를 사야 될 것 같다. 네 개의 반음 올림표를 가진 C#minor(올림 다단조)에 끌리어 구입한 책이다. 

철학을 바탕으로 음악으로 지금의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하고 조율하는 글이다. 철학자들이 말한 삶의 자세와 이에 어울리는 음악들을 간간히 들으며 읽었다. 하지만, 음, 애매할 때 절로 나오는, 음---이 길어지면서 글에 집중이 안되면서 길을 잃었다. 

한 때 찬송가를 칠 때, 네 개의 반음 올림표는 까다롭다는 느낌이어서, 세개의 반음 내림표로 바꿔 쳤던 기억이 있다. 완전 다른 느낌의 곡으로 다가왔다. 좀 더 순하게, 다루기 쉽게 만든 느낌이랄까, 작곡가들이 들으면 벌떡 일어날 일이겠지만, ㅎ.  

인생에서 '유도리(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여유를 가지고 신축성 있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융통)'는 어느 정도일까, 나와 너에게 팍팍하게 지나 온 시간들이 기억나면서 후회, 아쉬움의 감정들까지 몰려든다.   

비가 억수같이 많이 내렸다.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어려움을 타개한 후에, 비난과 탓, 흠집을 내도 좋을 듯 한데, 정치는 누구를 위해 하는 건지, 비오면 사진찍기 좋다고, 답답할 뿐이다. 꾀와 꼼수, 개소리가 난무하는, 넘어가는 이가 바보일 뿐인가, 근본과 원래, 바름, 정확이 부유하고 있다. 

개인의 이익을 너머 공동의 선을 향하여, 개인의 보이지 않은 작은 일부터(예, 탄소중립공익광고 같이) 지금 여기에서 선한 일을 하는 거다. 너가 나라면, If I were in your shoes,,,   


되풀이 들은 곡이다. Bruckner Symphony No. 7 Adagio, Famous Blue Raincoat 를 레너드 코언의 목소리로 들어본다.       

기억나서 들은 곡이다. 모짜르트 클라리넷협주곡 A장조 2악장, 비발디 사계 겨울 2악장, 베에토벤 피아노소나타 14번 월광,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C장조 등등이다. 피아노는 한 때 즐겨 쳤던 곡이고, 클라리넷은 아들이 불러 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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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엄청 잘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소위 성공한 한 사람이 스스로 읊조리는 이야기. 나와 연관되지 않는 누군가의 일과 삶은 무관하고, 설령 들리더라도 지루할 뿐이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 볼 때 그가 살아온 삶을 한마디로 무시할 수는 없다. 

정작 내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면, 나의 머리 속이 누군가의 말로 가득찼다면, 불륜의 사랑을 말한다면, 모든 것에 의미가 있고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이 있을 뿐이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뜨개질을 하지만, 뜨개 또한 지루한 무늬의 반복이다. 지금 이 순간들이 모여 전체의 삶을 만들고 있지만, 정작 지금 이 순간들은 점점이 흩어져 아무 의미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르겠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은 경험치 안에서만 가능하니, 내가 너가 아닌 이상 어떻게 이해가 가능할까...

하지만 열심히 살아야, 죽기 전에 돌아 볼 뭔가가 있을 거 같다. 의미있는 코바늘과 대바늘이 되길.ㅎ


* 여름 가디건은 코바늘로 하루만에 떠서 입을 수 있기에 긴뜨기만 가득하여 지루하기 그지없다. 남은 실로 뜬 양말은 대바늘로 겉뜨기만 가득하다. 분명 실을 선택하고, 어떻게 한다는 의미있는 시작이었지만 무의미하게 끝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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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가서 읽으려고 집어 든 책 속에 동물당이 있다. SF시와 소설을 읽는 듯하다. 동물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야 인간의 질병, 작금의 코로나를 해결할 수 없다. 그 간의 증상 대응책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더 명확히 말해 인간이 동물과 그들의 서식지를 다루는 방식, 즉 동물의 거래/집단 사육 및 서식지 파괴 행위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요구(130쪽)'되어 병의 원인에 대해 진단하고 처방해야 한다고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 집단은 말한다. 

이동시 집단은 기후, 동물, 생태계 이슈를 다루는 창작 집단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은 대중의 시선을 바꾸고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각자가 동물이 되어 대변하여 외친 글들이 인상적이다. 지구의 동물 열 중 넷에 속하는 인간으로서 박쥐, 천산갑, 오리, 낙타, 곰, 닭, 뱀, 소, 순록, 사향고양이, 비둘기, 양, 개, 어류, 쥐, 밍크, 너구리 등등의 말을 들으니 부끄럽다.

여전히 실재와 가상 사이를 오간다. 오늘도 동물들은 옆에서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이 내게 들리기까지는 거리가 너무도 멀다.  

나는 동물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되겠어,라는 '안수정등(岸樹井藤)' 상황에서도 '이렇게 달다니'를 탐할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각각의 동물이라고 대입하면 대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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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뜨기를 마무리하면서(뭔가가 미진하여 그 후 이것 저것을 찾아봤다. 양말을 3종류로 떴는데, toe up/ top down 으로 정하고, 발끝 코늘리기와 코줄이기, 뒤꿈치의 다양한 방법, 발등의 무늬 등이 무수히 많아서 아쉬운 점이 마음 속에 가득했다), 우연히 최고의 뜨개인 '엘리자베스 짐머만' 글을 만났다. 특히 심리스라는 새로운 방식에 겨드랑이 잇기 방식은 많은 뜨개인들을 황홀하게 했다. 

*뜨개에는 개인의 '풍부한 기지', 즉 센스를 발휘할 기회가 무궁무진하다. 뜨개바늘을 손에 쥔 사람의 마음이 가는 대로 만들 수 있다(비교와 평가를 하는 순간은 다르다). 또한 모든 기다림을 대신할 수 있고, 몸과 마음에 위안을 주고 치료를 해 준다(양말을 뜨면서 내가 화가 많은 사람임을 새로이 알았고, 하나씩 풀어가는 기회가 되었다).  

*짐머만 방식으로 솔기가 없는 심리스 스웨터를 뜨고 싶다. 그리고 울실로 발꿈치가 직각이 되는 양말도 도전해 보고 싶다.   

*하지만 뜨개와 독서는 병행할 수는 없다. 오디오북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좋아하는 감정은 안개처럼 스며들지만, 헤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심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감정과 사고의 흐름을 박해일과 탕웨이를 통해 보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영원히 미해결과제로 남기로 결심하고, 각각의 결심은 다르니,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안개'도 다시 들어본다.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 뭔지 아직 마음에 한참 머무른다. 안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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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로 다음을 인용하고 있다.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칼빈은 [로마서 5장 2절 주석]에서 '현재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고, 미래에 대한 지속적이고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누가 감히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의 이야기에 맞게 재구성한다면 '현재를 사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분명한 인문학 지식이 없고,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속적이고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가 된다. 바르트의 '한 손에는 성서, 한 손에는 신문'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즉,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뿐 아니라 그 시대의 인문학에, 더 넓게는 그 시대의 모든 지적 사조와 경향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개개인의 이야기만 떠도는 작금의 세대에서, 즉 신과 그의 이름으로 추구되던 신본주의 가치와 그것들을 위한 인간의 헌신, 자기 비움,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이성과 주체, 사회적 진보와 혁명과 같은 인본주의 가치와 그것들을 위한 인간의 연대, 협동에 대해서도 입다물고 있으면서 오직 탈근대적 이야기들에만 관심이 있는 요즘에서, 신본주의적 가치를 토대로 인본주의적 가치를 복원하고, 다시 그것을 토대로 탈근대적 가치를 구축하여 '온전한 가치'를 정립해 나가야 하며, 기독교 신학이 시대마다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다가오는 시대의 인문학을 끌어안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온전함을 지향해야 한다. 즉 지금의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들을 수용해서 말씀에 합당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온전한 가치의 지향', '온전한 신학의 추구'는 지난 2천 년 동안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들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부단히 걸어온 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독교 신학은 매 시대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잇는 건실한 교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 책의 주된 독자는 그리스도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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