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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평점 :
포르투갈에 한번 다녀온 후로 포르투갈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여행 서적이 아니어도 그렇다. 얀 마르텔의 책으로는 우리 나라에
더 많이 알려졌을 것 같은 그 유명한 <파이이야기>도 이직 읽기 전이지만 서가에서 이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골라 들었다.
고르고 나서 보니 얀 마르텔의 책이었다.
얀 마르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그가 <파이 이야기> 이후 15년 만에 완성한 책이다.
1963년 스페인 출생.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알래스카, 코스타리카, 멕시코,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옮겨 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된 이후로도 못 가본 나라들을 순례했다고 한다. 그의 특이한 상상력과
작가로서의 바탕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나 보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 결국 연관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공통점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아들을, 혹은 배우자를, 부모를 잃은 후 상실과 허무의 감정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덩그러니 놓여진 주인공이 나온다.
1부, 집을 잃다.
1904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배경이다. 고미술박물관 학예보조사 토마스는 아들에 이어 아내와 아버지까지 연달아 잃는다.
신에 대한 반항으로 그는 뒤돌아 거꾸로 걷는 방법을 택한다. 어느 날 우연히 율리시즈라는
신부가 아프리카에 지내면서 그곳의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는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을
다 읽은 토마스는 일기장에 나온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떠난다.
2부, 집으로
1938년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의 상 프란시스쿠 병원이 배경. 이 병원의 의사이자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 로조라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어느
날 죽은 아내의 방문을 받아 한참동안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눈다. 에우제비우가 좋아하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과 기독교 복음서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등 한참을 이야기하고 홀연 듯 아내는 사라진다. 그러고서
얼마 안 있다가 모르는 노부인의 방문은 받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들고 와 부검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3부, 집
1980년대 캐나다가 배경.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 토비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들도 먼 곳에 살며 누이동생과는 가끔 전화 통화만 하며 지낸다. 상실감과
공허함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중 미국의 영장류 연구소를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서 자기를 유심히 쳐다보는 침팬지 한 마리를 눈여겨보게 된다. 자기를 향한 침팬지의 눈길에 마음이 쏠린 피터는 침팬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기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막대한 돈을 주고 절차를 거쳐 침팬지를 사들인 그는 침팬지와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캐나다의 자기 집을
모두 정리하고 부모의 고향이자 그가 태어난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
세편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간 대에 일어난 일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이 세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부에서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잃은 토마스는 박물관에서의 일에서도 아무 의미를 못 찾고, 아프리카에 떨어져 외롭게 지내던 율리시스
신부의 생활과 다름이 없다고, 자신의 처지를 오래 전 살다 간 율리시스 신부의 처지에 동일시한다.
거기서 그는 하찮고 대체 가능한 부속품에 불과하다. 토마스와 수석
학예사, 수집 관리자, 박물관의 다른 학예사들의 관계는 율리시스
신부와 주교, 섬의 성직자들의 관계보다 나을 게 없다. 동료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않고 외로운 섬처럼 앉아 있는 일터가 행복하겠는가? 토마스는 이따금 율리시스 신부가
상투메에서 겪은 모든 불행과 그가 박물관에서 겪는 불행이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똑같은
권태로움, 똑같이 고독한 일의 본질, 그리고 그 고독이 타인과의
긴장된 만남으로 깨지곤 하는 것. 똑 같은 육체의 불편함. 토마스의
경우 퀴퀴한 지하 창고나 덥고 먼지 날리는 다락방에서 끝 모를 시간을 보낸다. 똑같이 숨이 막히는 괴로움. 똑같이 이해하려는 몸부림 (99)
아버지 대신 자기를 보살펴 주고 있는 숙부를 찾아가,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고 하자 숙부는 토마스에게 자동차를 가지고 가라고 내준다. 아직 마차와 수레가 주요 이동 수단이던 시대에 구경조차 처음 하는 첨단 기계인 자동차를 끌고 길을 떠나게 된 토마스. 숙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전혀 내키지 않는 자동차를 처음 운전하며 가는 긴 여정동안 그에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숙부가 안겨준 자동차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끌고 목적지까지 간다. 그 중엔 그의 인생에 또 한번 돌이키지 못할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누구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까지 이르러 그가 찾던 십자고상을 발견하고서 토마스는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흐느껴 우는 이유가 계속 나열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토마스는 외로움에
짓눌린다. (159)
그가 발견한 십자고상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기에.
2부에서 병리학자 에우제비우가 모르는 노부인으로 부탁을 받고 부검을
하는 과정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얀 마르텔은 언제 이런 경험을 살제로 해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은 3부에서 침팬지의 행동을 묘사한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부인이 죽은 남편의 시신을 부검해달라는 이유는, 생전에 남편이 살아온 생에 대해 부검을 통해 더 알고 싶다는 것이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구석 구석 다 해부하여 시신 속에서 발견해내는 것들은 기상천외한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부인은 에우제비우에게 자기를 그 안에 넣고 봉합해달라고 청한다. 남편의 시신이 곧 자기의 마지막 집이라는 의미이다.
3부의 침팬지와 사람의 교감은 앞의
1, 2부 못지 않게 경이로웠다. 오도 (침팬지의
이름)의 시선은 그가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문턱과도 같다고 피터는 침팬지의 시선을 묘사한다. 그리고 행동을 관찰하면서 침팬지의 동작이나 행동이 자기와 어디가 다른지 발견한다.
오도의 동작은 유연하고 정확하며 의도에 꼭 맞는 크기와 강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동작들은 전혀 이목을 꺼리지 않고 실행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오도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그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치에 맞는 걸까? 왜
생각-인간의 특징-은 우리를 어설프게 만드는 것일까? (351)
인간에게도 동작이 있고 행위가 있지만 그것은 침팬지만큼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인간이 습득했다는 동작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큰 효과를 발휘하게 하지만 그것은 '연기'이고 혹독한 '훈련의 결과'이며
인간이 고군분투하여 습득한 '기술'이다. 반면 침팬지는 쉽고 자연스럽게 한다. 침팬지는 그런 존재이다.
함께 지내면서 침팬지는 피터가 가르치면 인간의 많은 동작들을 배워 가기도 하지만, 침팬지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가 침팬지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워한다.
1, 2, 3부의 세 남자는 모두 상실과 고독, 애도의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떠난다. 상실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상실과 외로움을 그대로 껴안은 채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근원지를 향해 떠난다. 자동차라는 희귀한 기계를 편리함보다는 짐처럼 끌고 가기도 했고, 인간이 아닌 침팬지를 데리고 자기가 원하던 곳 보다 침팬지와 함께 지내기 좋은 곳으로서 선택하기도 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서사 속에 끌어들여 상징적으로 이용한 ‘마술적
리얼리즘’은 <백년동안의 고독>에서와 같이 이 소설의 큰 특징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아마도 오래 동안 기억에 남아 여러 번 되새길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