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복사꽃
김단비 지음 / 팩토리나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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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도, 책 내용에 대해서도, 전혀 사전 지식 없이 읽게 된 책이다.

예전과 달리 정석대로 등단해야만 작가가 되고 책을 내는 시대가 아니라고들 하니, 그렇지 않은 경로로 출판된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K-스토리 공모전 수상작'이라는 소개글이 있기에 골라보았다. K-스토리 공모전은 아이디어와 스토리가 뛰어난 작품과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하여 쌤앤파커스, 리디북스, 쇼박스, 아크미디어가 함께 개최하는 공모전이라고 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1957년. 지금 세대들은 물론이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분류하자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한 역사 로맨스라고 할까. 정치적 격변 속에서 만난 두 청춘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주인공인 백도야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친일파인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아 집에서 나와버렸고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국숫집 종업원으로 일하며 학생 운동 모임에 참여한다. 또다른 주인공 이한이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정치 깡패가 되지만 우연히 백도야를 만나고부터 단순한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도야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빨갱이를 탄압하는 일에 가담하지만 도야와의  관계는 오히려 어긋나기만 한다. 이들의 엇갈림과 복잡한 감정은 복사꽃 언덕에서의 재회를 상징적인 목표로 삼으며 시대의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암시한다.

어떻게 보면 줄거리가 다소 익숙한 전형적인 서사로 느껴질 수 있다. 1950년대 혼란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정치적 신념이 다른 두 인물이 사랑하지만 결국 비극적으로 엇갈리는 이야기는 역사 로맨스 장르에서 자주 사용되는 플롯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가진 장점이라면 1950년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소외된 이면을 잘 조명하고 있다는 점,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나 설정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으나, 문장이 서정적이고 매끄러워서 읽어나가는데 부자연스럽거나 어려움이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확실한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K-스토리 공모전 취지에 부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른 작품을 통해 다시 만나보는 수 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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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때 어쩌다가 월간 샘터를 정기 구독 했던 시절이 있었다. 왜 하필 샘터였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학생이던 때 내 용돈으로 정기구독할 수 있는 범위의 가격대이기도 하고, 거기 실리는 정채봉 시인, 최인호 작가의 연재, 이해인 수녀의 글, 법정 스님의 글을 매월 읽을 수 있는 것이 좋았고, 화려하지 않아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었던 것 같다.

얄팍한 책의 처음 부터 끝까지, 광고, 목차, 맨 뒤의 기자, 편집자의 한마디까지, 거의 빼놓지 않고 다 읽는 것은 버릇이었다.

내가 '한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샘터지의 맨 마지막 페이지, 편집 후기 에서였다. 한강이라는 이름이 특이해서 더 기억에 남을 수 있는데, 다른 기자들의 몇 줄 소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의 글들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한달에 한번씩 읽던 한강 기자의 편집 후기를 어느 호부터인가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다른 기자 이름이 올라오고 한강 기자의 이름은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출판사를 그만 두었나보다 했다. 

나의 샘터 구독은 계속 되어 책꽂이의 한 줄을 다 차지하기에 이르렀는데 친구 중 하나가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집에 있느라 너무 심심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있는 샘터를 다 싸다가 친구에게 가져다 주었다. 부담없이 읽기에 좋을 거라면서. 

"다 읽고 나서도 버리지는 말아줘. 내가 한권도 안 빼놓고 모아놓고 있거든."

친구에게 당부했다.

그런데, 나중에 친구에게 돌려받은 샘터 꾸러미에는 듬성듬성 빠진 호가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하고, 그 후부터는 열심히 모으기를 그만 두었던 것 같다.


몇 년 후 한강이라는 이름을 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보게 되었다. 

'아, 예전의 그 기자! 작가로 데뷔했구나.'

알고 보니 나의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작가 한승원 소설가의 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의 책 꽂이에 있던 한승원 작가의 책이 '앞산도 첩첩하고'였던가.


Youtube도 없던 시절, 팟캐스트로 열심히 듣던 <문장의 소리>라는 방송이 있었고 (지금은 Youtube로 들을 수 있다), 한강이 사회자로 진행했던 때가 있었다. 나즈막하고 톤이 없는 목소리로 그날 초대받은 작가와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를 듣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몇년 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사회자로 진행하던 때에는 한강이 초대작가로 나온 적이 있었는데 신형철이 한강 작가를 얼마나 좋아하고 높이 보는지 들으면서도 여실히 느껴졌었다.


적어도,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으로 한강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니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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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10-1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샘터하면 오래전 집에 있던 조그만 잡지로만 기억하는데 최인호 작가님의 가족이란 연재소설이 기억나네요^^

hnine 2024-10-16 1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 조그만 잡지로 나오던 시절 이야기랍니다. 지금은 전자책으로도 나오고 판형도 커졌더라고요.
최인호 작가님의 ‘가족‘ 저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딸 아들 이름이 다혜와 도단이라는 것은 지금도 기억나요.
법정 스님도 샘터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지요.
 
깨끗하고 밝은 곳 쏜살 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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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알려진 가장 짧은 소설은 헤밍웨이가 쓴 여섯 단어 짜리 다음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단 한 번도 신지 않았음)


여섯 단어로도 읽는 순간 바로 뭔가 분명히 전달되는 것이 느껴지는 글이다.

그에게 노벨상과 풀리처 상을 안겨준 작품들은 모두 장편. 그가 쓴 단편은 나로선 이 책으로 처음 읽어보는 것 같다.

얇고 자그마한 책 속에 다섯 편의 짧은 소설이 들어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 (A clean, well-lighted place)

다 읽고도 주제가 무엇인지 금방 감이 안 와서 두어번 다시 읽어도 시간이 별로 안 걸릴 정도로 짧다. 겨우 네 장.

늦은 밤까지 혼자 카페에 앉아 있는 노인, 그리고 어서 카페 문 닫고 집에 갈 시간을 기다리는 카페의 두 웨이터가 등장인물이다. 노인은 돈이 많지만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 웨이터는 노인이 왜 자살을 하려했을까 추측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독과 절망에 빠져있는 노인에게 카페는 잠시나마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깨끗하고 밝은 곳'이다. 하지만 이 고독은 두 웨이터에게도 존재하며, 젊은 웨이터 보다는 나이가 많은 웨이터에게 깊어서, 카페를 나와 젊은 웨이터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나이 많은 웨이터는 다른 술집을 찾아 들어간다. 늦은 밤이 되어도 여전히 깨끗하고 밝은 곳으로 남아 있는 곳을 찾아가며 웨이터는 허무함을 잊고 싶어하는 노인을 이해하게 된다.


살인자들 (The killers)

조지는 카운터 일을 하고 있는 식당에 두 명의 살인청부업자 맥스와 알이 찾아와 스웨덴 출신의 과거 권투선수 올레 안드레슨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들은 식당 주인과 다른 손님인 닉 애덤스를 협박하며 기다리지만 결국 안드레슨이 나타나지 않자 식당을 떠난다. 이후 닉 애덤스는 이 사실을 전하러 가지만 안드레슨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듯 아무런 저항 없이 체념한 상태이다. 올레 안드레슨의 이런 태도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인간의 비관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살인자들은 단순히 임무를 수행할 뿐이고 폭력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면, 그리고 도덕적 무력감을 상징한다.


병사의 집 (Soldier's home)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향인 오클라호마로 돌아온 해럴드 크레브스는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고향 사람들은 이미 전쟁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갔고 크레브스의 전쟁 경험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에 피로감을 느낀 상태. 결국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된 전쟁 이야기를 하게 된다. 집에선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감정 표현 하는 것이 힘들어져가서 다시 일을 하는 것, 여자를 사귀는 것 등, 새로운 관계를 맺는 어떤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 않다.

전쟁이 인간의 정신과 이후 삶의 방향에 끼친 영향을 헤밍웨이는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해리는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 근처의 사파리에서 감염된 상처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아내 헬렌과 함께 있지만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는 젊었을때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부유한 여성과 결혼해 안락한 삶에 안주하여 글쓰기에 열정을 쏟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한다. 킬리만자로 산 정상의 녹지 않는 하얀 눈은 도달할 수 없었던 예술적 열망을 상징한다. 삶의 허무감을 절감하면서 죽어가는 해리가 킬리만자로 산의 눈 덮인 정상으로 올라가는 환상을 보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내면의 정화나 구원을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

주인공 프랜시스 매코머와 아내 마거릿은 사냥 가이드 로버트 윌슨과 함께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사냥을 즐긴다. 매코머는 처음 사냥에 나섰을 때 사자와 마주하자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로 인해 자신이 비겁하다는 수치심과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남편의 나약함에 실망한 아내 마거릿은 그날 밤 사냥 가이드 윌슨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다음 날 매코머는 물소 사냥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발휘한다. 자신이 공포를 이겨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마침내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이전과 다른 자존감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데, 그의 아내가 실수로 그를 쏘아 죽이게 된다. 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는 갑작스런 비극으로 끝나버리며 결말을 맺는다. 인간 본성과 두려움, 권력 관계를 극복하여 어렵게 행복을 느끼는 때가 오지만 곧 비극적으로 끝나고 마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젊어서 부터 세계 여기 저기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헤밍웨이의 작품의 스타일은 뚜렷하다.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으로 삶과 죽음, 허무와 절망, 고독을 담아낸다. 시종일관.

모든 작품 속 인물에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 읽힌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6000미터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서쪽 정상은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 즉 신(神)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는 바짝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의 첫 문단)



킬리만자로 산 봉우리까지 올라가서 바짝 말라 얼어 죽은 표범 역시,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찾아 올라갔다고 본 작가의 또다른 분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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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찰리 맥커시 지음,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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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loved.'

'너는 사랑받고 있다'라는 말로 해석하지만 어쩐지 우리 말로서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아 더 좋은 표현이 없을까 한참 생각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책의 메인캐릭터는 넷.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다.

소년이 케이크를 사랑하는 두더지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년은 두더지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걷는다.

걷던 길에 덫에 걸려 곤궁에 처한 여우를 발견하고, 두더지는 덫을 갉아 여우를 덫에서 풀어준다.

이제 소년은 두더지, 여우와 함께 걷는다. 그리고 말을 만난다.  

넷은 서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기도 하며 걷고 또 걷는다.




찰리 맥커시. 1962년 영국 출생,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개인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올려놓는 일을 하고 있던 중 올려놓은 그림 아래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댓글에 찰리는 친절하게 다시 댓글을 달면서 '대화 (conversation)'로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출판사로부터 책으로 만ㅁ들어보자는 제의를 받게 된다. 그렇게 그는 그림 그리는 화가에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그림은 '용기'에 대한 것.





"네가 했던 말 중 가장 용감했던 말은 뭐니?" 소년이 묻자 말이 대답한다.

" '도와줘'라는 말."






















Life is difficult.

But you are loved.


삶은 힘겹지만 넌 사랑받고 있어.




삶이 힘겨울때 우리를 일으켜세우는 것은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속에 생겨났고 사랑으로 키워졌고 사랑으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사랑으로 계속 갈 수 있다는 것.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고 그런 상대가 되어주는 것, 나는 그것을 덧붙이고 싶다.

찰리가 자기의 인스타그램에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답장을 달아주었듯이, 책에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이 그러했듯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가능할 것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선 채로 그 자리에서 다 봐버렸다. 멈출 수가 없어서 빨려 들어가 한장 한장 넘기다 보니 마지막 장.

그런데 놓고 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대출해서 다시 읽고, 사진도 찍고,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서 한참을 끼고 있었다.

찰리 맥커시는 "The Spectator"의 만화가로 시작하여 Oxford University Press의 북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하였다. 모노톤의 단순화된 선으로 사랑과 우정, 친절, 연약함 같은 섬세한 감정을 그려내는 그의 그림은, 전통적 일러스트레이션과 현대적 스케치를 융합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간단하지만 지혜로운 충고 (simple but saged advice).

아래 동영상에서 인터뷰어가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그렸냐고 묻자, 누구든지 (anyone)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답한다.

이 책은 12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BBC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찰리의 목소리로 오디오북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따뜻한 목소리로 정신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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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24-10-08 0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많이 좋아하는 책이예요. 두번째, 일곱번째 그림은 다시 봐도 울컥합니다.

hnine 2024-10-08 03:25   좋아요 1 | URL
예, 잘잘라님 서재에서 봤어요 ^^
이런 책 한권 남길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는 동안 이런 것 직접 깨우치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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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 한번 다녀온 후로 포르투갈이 제목에 들어간 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여행 서적이 아니어도 그렇다. 얀 마르텔의 책으로는 우리 나라에 더 많이 알려졌을 것 같은 그 유명한 <파이이야기>도 이직 읽기 전이지만 서가에서 이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골라 들었다. 고르고 나서 보니 얀 마르텔의 책이었다.

얀 마르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그가 <파이 이야기> 이후 15년 만에 완성한 책이다.

1963년 스페인 출생.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알래스카, 코스타리카, 멕시코,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옮겨 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른이 된 이후로도 못 가본 나라들을 순례했다고 한다. 그의 특이한 상상력과 작가로서의 바탕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나 보다.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 결국 연관된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공통점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아들을, 혹은 배우자를, 부모를 잃은 후 상실과 허무의 감정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 덩그러니 놓여진 주인공이 나온다.


1, 집을 잃다.


1904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배경이다. 고미술박물관 학예보조사 토마스는 아들에 이어 아내와 아버지까지 연달아 잃는다. 신에 대한 반항으로 그는 뒤돌아 거꾸로 걷는 방법을 택한다. 어느 날 우연히 율리시즈라는 신부가 아프리카에 지내면서 그곳의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는 생활을 하면서 남긴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을 다 읽은 토마스는 일기장에 나온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떠난다.


2, 집으로


1938년 포르투갈의 브라간사의 상 프란시스쿠 병원이 배경. 이 병원의 의사이자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 로조라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어느 날 죽은 아내의 방문을 받아 한참동안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눈다. 에우제비우가 좋아하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과 기독교 복음서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등 한참을 이야기하고 홀연 듯 아내는 사라진다. 그러고서 얼마 안 있다가 모르는 노부인의 방문은 받고, 죽은 남편의 시신을 들고 와 부검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3,


1980년대 캐나다가 배경.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 토비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들도 먼 곳에 살며 누이동생과는 가끔 전화 통화만 하며 지낸다. 상실감과 공허함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중 미국의 영장류 연구소를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서 자기를 유심히 쳐다보는 침팬지 한 마리를 눈여겨보게 된다. 자기를 향한 침팬지의 눈길에 마음이 쏠린 피터는 침팬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기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막대한 돈을 주고 절차를 거쳐 침팬지를 사들인 그는 침팬지와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캐나다의 자기 집을 모두 정리하고 부모의 고향이자 그가 태어난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

세편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간 대에 일어난 일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이 세 사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부에서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잃은 토마스는 박물관에서의 일에서도 아무 의미를 못 찾고, 아프리카에 떨어져 외롭게 지내던 율리시스 신부의 생활과 다름이 없다고, 자신의 처지를 오래 전 살다 간 율리시스 신부의 처지에 동일시한다.

거기서 그는 하찮고 대체 가능한 부속품에 불과하다. 토마스와 수석 학예사, 수집 관리자, 박물관의 다른 학예사들의 관계는 율리시스 신부와 주교, 섬의 성직자들의 관계보다 나을 게 없다. 동료들과 식사도 함께 하지 않고 외로운 섬처럼 앉아 있는 일터가 행복하겠는가? 토마스는 이따금 율리시스 신부가 상투메에서 겪은 모든 불행과 그가 박물관에서 겪는 불행이 똑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똑같은 권태로움, 똑같이 고독한 일의 본질, 그리고 그 고독이 타인과의 긴장된 만남으로 깨지곤 하는 것. 똑 같은 육체의 불편함. 토마스의 경우 퀴퀴한 지하 창고나 덥고 먼지 날리는 다락방에서 끝 모를 시간을 보낸다. 똑같이 숨이 막히는 괴로움. 똑같이 이해하려는 몸부림 (99)

아버지 대신 자기를 보살펴 주고 있는 숙부를 찾아가,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난다고 하자 숙부는 토마스에게 자동차를 가지고 가라고 내준다. 아직 마차와 수레가 주요 이동 수단이던 시대에 구경조차 처음 하는 첨단 기계인 자동차를 끌고 길을 떠나게 된 토마스. 숙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전혀 내키지 않는 자동차를 처음 운전하며 가는 긴 여정동안 그에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숙부가 안겨준 자동차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끌고 목적지까지 간다. 그 중엔 그의 인생에 또 한번 돌이키지 못할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누구도 모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까지 이르러 그가 찾던 십자고상을 발견하고서 토마스는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흐느껴 우는 이유가 계속 나열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토마스는 외로움에 짓눌린다. (159)

그가 발견한 십자고상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기에.


2부에서 병리학자 에우제비우가 모르는 노부인으로 부탁을 받고 부검을 하는 과정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얀 마르텔은 언제 이런 경험을 살제로 해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은 3부에서 침팬지의 행동을 묘사한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부인이 죽은 남편의 시신을 부검해달라는 이유는, 생전에 남편이 살아온 생에 대해 부검을 통해 더 알고 싶다는 것이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구석 구석 다 해부하여 시신 속에서 발견해내는 것들은 기상천외한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부인은 에우제비우에게 자기를 그 안에 넣고 봉합해달라고 청한다. 남편의 시신이 곧 자기의 마지막 집이라는 의미이다.


3부의 침팬지와 사람의 교감은 앞의 1, 2부 못지 않게 경이로웠다. 오도 (침팬지의 이름)의 시선은 그가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문턱과도 같다고 피터는 침팬지의 시선을 묘사한다. 그리고 행동을 관찰하면서 침팬지의 동작이나 행동이 자기와 어디가 다른지 발견한다.

오도의 동작은 유연하고 정확하며 의도에 꼭 맞는 크기와 강도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동작들은 전혀 이목을 꺼리지 않고 실행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오도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그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치에 맞는 걸까? 왜 생각-인간의 특징-은 우리를 어설프게 만드는 것일까? (351)

인간에게도 동작이 있고 행위가 있지만 그것은 침팬지만큼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지 않을 때가 많다. 인간이 습득했다는 동작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큰 효과를 발휘하게 하지만 그것은 '연기'이고 혹독한 '훈련의 결과'이며 인간이 고군분투하여 습득한 '기술'이다. 반면 침팬지는 쉽고 자연스럽게 한다. 침팬지는 그런 존재이다.

함께 지내면서 침팬지는 피터가 가르치면 인간의 많은 동작들을 배워 가기도 하지만, 침팬지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가 침팬지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놀라워한다.


1, 2, 3부의 세 남자는 모두 상실과 고독, 애도의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고, 그 경험 속에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떠난다. 상실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상실과 외로움을 그대로 껴안은 채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근원지를 향해 떠난다. 자동차라는 희귀한 기계를 편리함보다는 짐처럼 끌고 가기도 했고, 인간이 아닌 침팬지를 데리고 자기가 원하던 곳 보다 침팬지와 함께 지내기 좋은 곳으로서 선택하기도 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서사 속에 끌어들여 상징적으로 이용한 마술적 리얼리즘<백년동안의 고독>에서와 같이 이 소설의 큰 특징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아마도 오래 동안 기억에 남아 여러 번 되새길 작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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