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밝은 곳 쏜살 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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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알려진 가장 짧은 소설은 헤밍웨이가 쓴 여섯 단어 짜리 다음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단 한 번도 신지 않았음)


여섯 단어로도 읽는 순간 바로 뭔가 분명히 전달되는 것이 느껴지는 글이다.

그에게 노벨상과 풀리처 상을 안겨준 작품들은 모두 장편. 그가 쓴 단편은 나로선 이 책으로 처음 읽어보는 것 같다.

얇고 자그마한 책 속에 다섯 편의 짧은 소설이 들어 있다.


깨끗하고 밝은 곳 (A clean, well-lighted place)

다 읽고도 주제가 무엇인지 금방 감이 안 와서 두어번 다시 읽어도 시간이 별로 안 걸릴 정도로 짧다. 겨우 네 장.

늦은 밤까지 혼자 카페에 앉아 있는 노인, 그리고 어서 카페 문 닫고 집에 갈 시간을 기다리는 카페의 두 웨이터가 등장인물이다. 노인은 돈이 많지만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두 웨이터는 노인이 왜 자살을 하려했을까 추측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독과 절망에 빠져있는 노인에게 카페는 잠시나마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깨끗하고 밝은 곳'이다. 하지만 이 고독은 두 웨이터에게도 존재하며, 젊은 웨이터 보다는 나이가 많은 웨이터에게 깊어서, 카페를 나와 젊은 웨이터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나이 많은 웨이터는 다른 술집을 찾아 들어간다. 늦은 밤이 되어도 여전히 깨끗하고 밝은 곳으로 남아 있는 곳을 찾아가며 웨이터는 허무함을 잊고 싶어하는 노인을 이해하게 된다.


살인자들 (The killers)

조지는 카운터 일을 하고 있는 식당에 두 명의 살인청부업자 맥스와 알이 찾아와 스웨덴 출신의 과거 권투선수 올레 안드레슨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들은 식당 주인과 다른 손님인 닉 애덤스를 협박하며 기다리지만 결국 안드레슨이 나타나지 않자 식당을 떠난다. 이후 닉 애덤스는 이 사실을 전하러 가지만 안드레슨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듯 아무런 저항 없이 체념한 상태이다. 올레 안드레슨의 이런 태도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인간의 비관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살인자들은 단순히 임무를 수행할 뿐이고 폭력은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면, 그리고 도덕적 무력감을 상징한다.


병사의 집 (Soldier's home)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향인 오클라호마로 돌아온 해럴드 크레브스는 전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고향 사람들은 이미 전쟁을 잊고 일상으로 돌아갔고 크레브스의 전쟁 경험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에 피로감을 느낀 상태. 결국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거짓된 전쟁 이야기를 하게 된다. 집에선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감정 표현 하는 것이 힘들어져가서 다시 일을 하는 것, 여자를 사귀는 것 등, 새로운 관계를 맺는 어떤 일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 않다.

전쟁이 인간의 정신과 이후 삶의 방향에 끼친 영향을 헤밍웨이는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s of Kilimanjaro)

해리는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 근처의 사파리에서 감염된 상처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아내 헬렌과 함께 있지만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는 젊었을때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부유한 여성과 결혼해 안락한 삶에 안주하여 글쓰기에 열정을 쏟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한다. 킬리만자로 산 정상의 녹지 않는 하얀 눈은 도달할 수 없었던 예술적 열망을 상징한다. 삶의 허무감을 절감하면서 죽어가는 해리가 킬리만자로 산의 눈 덮인 정상으로 올라가는 환상을 보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라도 내면의 정화나 구원을 찾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

주인공 프랜시스 매코머와 아내 마거릿은 사냥 가이드 로버트 윌슨과 함께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사냥을 즐긴다. 매코머는 처음 사냥에 나섰을 때 사자와 마주하자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로 인해 자신이 비겁하다는 수치심과 아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남편의 나약함에 실망한 아내 마거릿은 그날 밤 사냥 가이드 윌슨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다음 날 매코머는 물소 사냥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를 발휘한다. 자신이 공포를 이겨냈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회복하여 마침내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이전과 다른 자존감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데, 그의 아내가 실수로 그를 쏘아 죽이게 된다. 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는 갑작스런 비극으로 끝나버리며 결말을 맺는다. 인간 본성과 두려움, 권력 관계를 극복하여 어렵게 행복을 느끼는 때가 오지만 곧 비극적으로 끝나고 마는,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젊어서 부터 세계 여기 저기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헤밍웨이의 작품의 스타일은 뚜렷하다.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으로 삶과 죽음, 허무와 절망, 고독을 담아낸다. 시종일관.

모든 작품 속 인물에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 읽힌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6000미터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서쪽 정상은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 즉 신(神)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는 바짝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의 첫 문단)



킬리만자로 산 봉우리까지 올라가서 바짝 말라 얼어 죽은 표범 역시,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니라 무엇을 찾아 올라갔다고 본 작가의 또다른 분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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