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기록적이었던 여름, 못잊을 그 여름
추위를 덜 타고 더위엔 취약한 나 같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기록적으로 더웠던 여름이었다. 아무리 땀을 줄줄 흘리고 있을지라도 선풍기도 잘 안 켜는, 곰 같은 내 버릇에도 이건 선풍기 가지고도 감당키 어려웠으니, 그래도 곰 같이 에어컨 안 사고 버틴건, 에어컨 바람이 가져다 주는 시원함 대신 치뤄야할지도 모르는 호흡기 계통 감염 같은 걸 걱정하는 건강 염려증, 기계 불신증 때문이었다.

2. 서양고전 100선
추석 끝나고 바로 시작하여 11월말까지, 일주일에 하루 2시간. 대학의 평생교육원에 개설된 서양고전 100선 강의를 신청하여 들었다. 어쩌다 보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흘쯤 보내기가 다반사인 내 일상에, 일주일에 하루 서울 나들이 하는 것부터가 정신 건강에 많이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분명 문학 작품에 대한 강의인데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가 불쑥 불쑥 귀에 들어오는 한 구절이,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그 많은 물음들, 내 머리로는 혼돈만 길어질뿐 답을 못찾고 있던 그 물음들에 대해, 이게 답이라고 툭 던져지는 것 같음을 느꼈던 그 순간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이미 정년 퇴직하시고 도시를 벗어나 강원도로 사모님과 함께 들어가셔서, 책 읽고, 쓰고, 밭일 하고, 닭 키우며, 더 할 수 없이 만족한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전직 영문과 교수님. 머리 희끗한, 자그마한 체구의 교수님이시지만 강의 있는 날 늘 정장 차림에 머리 손질도 단정하게 하시고 강원도 인제에서 서울까지, 5분도 늦는 일 없이 강의실에 도착하셨다. 난 그저 평생 책이나 읽으며 산 사람이라고 본인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나중에 뭐라고 내 삶을 한줄 요약하여 말할 수 있을까.

3. 열 여섯살 아들과 지내는 방법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하고, "너는 네 컴퓨터가 무슨 인공장기냐?" 하고 내가 놀릴만큼 컴퓨터를 몸에서 떼지 않는 아들. 화장실 갈 때는 물론이고 이 닦으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는 신통한 재주를 가진 아들을 견디느라고 많이 노력했다.
옆집 아들 처럼 대해야 한다고, 흔히 사춘기 아들을 둔 집 부모들이 그러더라만, 내가 겪어보니 옆집 아들 처럼 대해야하는게 아니라 정말 내 아이는 옆집 아들, 나는 옆집 아줌마여야 한다. "처럼"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하더라는 말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뭐가 힘들겠냐고 대답하겠다. 잘못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몇번 싫은 소리를 하긴 했지만, 적어도 노래처럼 반복하진 않으려고 노력 많이 했다.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라면 잔소리 한다고 해서 고쳐지진 않는다. 남편에게든 자식에게든, 이 세상에 잔소리처럼 영혼을 갉아먹는게 또 있으랴. 차라리 내가 옆집 아줌마가 되고 말지.
그러면서 나는 생각만 더 많아졌다.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시무룩...).
잔소리를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자식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감정 풀이 효과. 내공과 덕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입으로 터져 나오는 말을 참고 안하려니, 그것들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고대로 마음 한켠에 집을 짓고 있나보다. 갈수록 뭔가 딱딱한 응어리가 느껴지고 있으니.
별일도 아닌 것 같은 이것을 2016년을 정리해보면서 세번째 항목으로 쓰고 있다. 내게는 별일이 아니지 않은 것이다.

4. 세가지 쓰고 더 생각 안 날 정도로 심심하고, 동시에 무탈했다
억지로 더 꼽아보자면 없지도 않겠으나, 억지로 꼽는다는건 그저 소소한 일이었다는 의미일테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출장 명분으로 몇 차례, 아들 아이도 봉사 활동으로 필리핀 여행을, 럭비 친선 경기차 상하이 여행을 다녀왔는데, 나는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 여행 한번 다녀오지 않았다. 누가 가지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요즘은 가끔 혼자 억울해하는 어리석은 마음짓을 하고 있다. 내 여권이 만기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갱신을 해야했는데, 그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이 가는 여행 수속에 부모 여권이 필요해서였다. 깨끗하고 빳빳한 채, 쓸모 없이 처박혀 있다가 갱신되고 있는 내 여권을 보는 내 심정.

그래, 심심했어. 아무 할 일이 없어 심심했던게 아니라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느라고 말이다.
하지만 무탈했잖은가. 그렇게 생각을 뒤집느라 또 애쓴다. 갈수록 생각 뒤집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말 안듣는 아들을 보며, 그래도 자식때문에 부모가 속상한게 낫지, 부모때문에 자식이 맘 아픈것보다는
시험 전날도 저녁까지 운동만 하다가 늦게 들어오는 아들을 보면, 저 나이에 시험 스트레스 안 받고 운동으로 해소해는 것만 해도 어디야.
아침에 밥을 차려줘도 굳이 시리얼을 먹겠다고 우기는 아들을 보면, 한참 성장기에 시리얼이 밥보다 좋을게 없지만 그래도 시리얼 먹으면서 우유를 매일 먹을 수 있으니 오히려 키 크는데는 더 좋을지 알아?
옷 사는데 관심이 많아서 책 보다 옷 사는게 더 좋은 아이를 보며, 그 나이때 책이 더 좋다는 것도 문제일수 있어. 적어도 나 처럼 패션감각 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네.
매일 업데이트 되고 있는 나의 이 생각 바꾸기 (억지로). 아들만 예로 들어도 할 얘기만 해도 수두룩 한데 남편을 대상으로 해서까지 보태면 더 길어진다.

내년엔 좀 더 신나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니, 내가 그런 일들을 만들어야겠지만, 올해처럼 심심해도 뭐, 욕심내지 않으리라. 무탈한 댓가일테니까.








오늘 아침. 깨워도 안 일어나는 아들을 보고 또 옆집 아줌마가 된 나는 카메라 들고 집을 나서 오랜만에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늦게 일어나는 대신 푹 자고 일어나면 기분은 좋겠지. 더 자고 싶은데 옆에서 흔들어 깨워 일어나는 것처럼 스트레스 받는 일이 어디있겠어.'
나의 생각바꾸기는 이렇게 매일 업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