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잘 쓰는 말이 아닌데 예전엔 "숙직"이라는게 있었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집에 안가고 잠을 자며 직장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도 한달에 한번씩 숙직인 날이 있었고 그 날은 내가 엄마 옆에서 잘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새달이 시작하면 할머니에게 묻곤 했다.
"이번 달엔 아빠 숙직날이 언제예요?"

"그건 왜 묻냐?"

"......"

단순히 엄마 옆에서 잘 수 있다는 것 뿐 아니었다. 새벽에 일찍 출근하시고 밤 늦게나 집에 돌아오시는 아버지는 늘 피곤해보였고 웃으시는 법이 없어, 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집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긴장, 말도 소근소근, 발도 까치발로 걸어다니며 괜히 앞에 얼쩡거리다가 야단맞는 일이 없도록 조심 조심해야했다.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일이란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하루쯤 집에 안계신다는 것 자체가 어딘가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이다.

 

커서도 아버지를 어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몸을 사리거나, 무슨 일이든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아버지 맘에 드는 자식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삼남매의 맏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역할이 더해졌다. 네가 제대로 못하면 동생들도 다 그렇게 되고 만다는. 그 말씀이 어찌나 부담이었던지 지금도 나는 누가 아무 사심없이 "언니~"라고 불러도 움찔한다. 언니 역할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해서. 그때부터 나는 결심했다. 나는 나중에 절대 저렇게 무서운 부모가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 막상 내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조금씩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려받은 재산 한 푼 없이, 내 힘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가장의 부담과 책임감이 어떠했을거라는 걸, 마찬가지로 거의 바닥부터 시작한 나의 결혼 생활을 해나가며 알게 된 것이다. 이해가 되기 시작한 정도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 것들이 하나씩 둘씩 생각나 아버지를 조금씩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자가용이라는게 있기도 전이고 통금 시간이 다 되어 들어오시면서도 그때 막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에 재미 붙인 나를 위해 그때 배우고 있는 피아노곡이 뭔지 물어보시고는 그 곡이 들어있는 레코드를 사러 시내 대한음악사까지 일부러 다녀오시기도 했고,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때 내게 미리 한문 공부를 시키시기 위해 중학교 국어 책에 나오는 한자를 손수 펜글씨로 다 적어서 한권의 교재를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파는 것 사도 되는데 굳이 손수 만드셔서 그 교재로 나중에 동생들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부모에게 자식은 다섯살이든 오십이든 그냥 똑같은 자식일뿐.

세달전 아버지께서 처음 병원에 입원하신 날 내가 찾아갔을때, 아버지는 옆에 계신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이봐, 내려가서 OO이 맛있는것좀 사줘. 멀리서 왔는데."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서 당신은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면서 병문안이랍시고 들른 나이 오십된 딸에게 맛있는 것좀 사주라고.

그 말씀이 아버지로부터 내가 들은 마지막 말씀이 될 줄이야.

인공호흡기, 투석, 삽관, 수혈, 패혈증, 다제내성균 (수퍼박테리아라고 흔히 말하는) 감염, 심폐소생술...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고생 다 하신지 95일만에, 가족들 모두 임종을 지키라는 연락을 받았다. 투석기를 빼고 나자 심박동수 (Heart rate)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40에서 39, 38, 37...

중환자실에서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담당해주시던 주치의 선생님. 나이가 아직 많아 보이지 않은 젊은 선생님이 일부러 아버지에게로 와서 엄마와 가족들을 위로해주고 인사를 하고 갔다.

"이 수치가 20이하로 떨어지면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그걸 기다리고 있는 동안 참 참담했다. 하지만 아버지만큼 참담했으랴. 아버지의 몸은 이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고, 90여일 동안 의식이 없으셨지만 설마 마지막까지 아무 눈길도 안주시고, 인사도 안받으시고 가실까 했는데, 결국 그렇게 가셨다.

음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께서 평소에 나 죽을때 이 음악 틀어달라고 했던 것이 문득 생각나서 그 음악 (이 앞 페이퍼에 올린 음악,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을 틀어드리니 일시적으로 호흡수가 60으로 뛰는 것을 보았다. 불러도 흔들어도 아무 반응 없으신 아버지께서 음악을 알아들으신걸까?

 

다린이네 집 (우리집)에 한번 가고 싶다고 몇번을 말씀하시는걸, 제대로 치우지도 못하고 사는 집안 꼴 보여드리면 아버지 성격에 마음에 안드실까봐, 아니 그것보다도 내가 책 잡히기 싫어서 미루기만 했는데 결국 우리집에 와보지 못하셨다.

 

이제 아버지는 매일이 숙직이네. 매일 매일 집에 안계시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음악을 틀어놓고 자꾸만 운다.

영정 사진 속의 아버지는 마치 청년같은데.

그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는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자꾸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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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8-0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합니다. 이 글을 이제야 봐서 늦게 인사 드립니다.
2년 전 9월에 저의 친정아버지가 운명하셨다고 글을 올렸을 때 나인 님이 제게 위로의 첫 댓글을 주셨는데
저는 맨 마지막의 댓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년이 되었건만 아직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지금은 슬프시겠지만 그래도 저는 님이 이렇게 글로 풀어 내어서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글로 풀어 내어 한결 마음이 나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hnine 2015-08-08 06:08   좋아요 0 | URL
무슨 그런 말씀을요. 이렇게 위로해주시니 고마운 마음일뿐입니다. pek님 아버님 가신지 벌써 두해가 흘렀군요. 저는 이제 겨우 2주 되었으니, 여기 저기 아버지를 떠올리는 물건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진을 볼땐 눈물이 왈칵 솟는게 당연하겠지요. 돌아가시기 전에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게 제일 마음이 아프네요. 의식없이 90여일을 병원에서 지내시다가 마지막 말씀도, 마지막 인사도 못나누고 보내드렸다는게요. 한 사람의 인생의 마지막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허무한 마음이 들게 해요.
저보다 이제 혼자 집에 계신 엄마가 더 걱정인데, 저도 아직 마음이 푹 젖어있다가 이렇게 아는 분들의 따뜻한 마음에 잠시 기운 나다가, 반복의 일상입니다.
위로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은 이 기운으로 잘 버텨보렵니다 ^^

Joule 2015-08-08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 앞에서는 말문이 막혀요. 할 말이 없죠.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음이 두려워 말문이 막혀버리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은 지금 여기 알라딘에 있는 우리는 hnine 님 옆에서 침묵 속으로 위안과 위로와 상실을 같이 나눌 수 없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이 말들은 실은 말들이 아니겠네요.

고운 분이셨군요, hnine님의 아버지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으셨어요.

hnine 2015-08-08 22:42   좋아요 0 | URL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잠시동안은 가능할지 모르지요. 여러분들이 정말 고마운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어요. 글 속에 담긴 마음을 제가 충분히,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저는 많은 힘이 되네요. 누구가 가는 길이고 나 또한 가야할 길인데, 그래서 허무하고 또 두려운가봐요.
저도 아버지와 좋은 기억보다 그렇지 않은 기억이 더 많답니다. 위에 썼지만 꼬마때부터 아버지의 부재를 기다리던 아이였고, 집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숨막혀 했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돌아가실때 되니까 그런 기억들 말고 좋았던 일들만 떠올려지더라고요. 저도 제가 그러리라고 예상 못했어요.
Joule님,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고마와요. 유산 관리를 앞으로 잘 하면서 살아야겠어요 ^^

하양물감 2015-08-0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들어와서 느긋하게 글을 읽을 여유 없이 지내다보니...저도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친정아버지와는 대면대면했던 사이라서 장례식때는 눈물 한 방울 안흘리는 나쁜 딸이기도 했지요.
아버지가 떠날때까지도, 그리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어요.
나의 가장 큰 걱정은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였어요.
엄마에게 더 잘해야겠다 마음 먹으면서도 늘 생활에 쫓긴다는 이유로 마음만큼 못하는게 가장 아쉬워요.

hnine 2015-08-08 22:50   좋아요 1 | URL
하양물감님 아버님 먼저 보내드린건 언젠가 글에서 읽고 알고 있었어요. 벌써 10년 전이라니 너무 일찍 떠나셨네요. 저에게도 지금 가장 큰 숙제는 혼자 되신 엄마랍니다. 아버지께서 워낙 애처가이시고 집안 일을 엄마보다 더 많이 하시며 엄마를 끔찍히 위하셨었기 때문에 엄마가 상실감이 무척 크시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시대요. 잠이 안와서 며칠 째 새벽에 일어나신다는 말씀 듣고 오늘도 아침 부터 전화드려서 한시간은 얘기를 나누었나봐요. 말상대가 제일 그리우실 것 같아서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은 여기 저기 부고를 알리기 바쁜데 저는 아무에게도, 단 한 사람에게도, 연락을 안했어요. 아니, 못했어요. 못하겠더라고요 부담주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여기 알라딘에서는 이렇게 글로나마 소식을 올릴 생각을 한걸 보면 제가 여기를, 이 공간을 참 의지하고 기대는 것 같아요. 여러분의 위로를 받고 함께 슬픔을 나눠주신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요. 저의 빈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채워져가는 느낌이어요. 고맙습니다. 하양물감님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어머니에게 알게 모르게 전달되고 있을거예요.

이홍열 2015-08-0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도 맞따님의 절절한 마음 다 느끼시면서 편히 눈감으셨을 겁니다. 너무 가슴에 닿아 동창사이트 두곳에 옮겨놓았읍니다~

hnine 2015-08-09 17:34   좋아요 0 | URL
읽어주시고 함께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창사이트란 어느 곳을 말씀하시는지 여쭤봐도 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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