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삶과 문학에 대해 독설에 가까울 정도로 분명한 생각과 목소리, 글소리때문에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작가 마루야마 겐지.

그의 새로운 에세이가 출간된 것을 보고 바로 구입하여, 읽던 책 미뤄놓고 이것부터 읽었다. <달에 울다>, <여름의 흐름>,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나는 길들지 않는다> 에 이어 다섯 번째 읽는 마루야마 겐지의 책.

해발 750미터 아즈미노현. 주위에 무논과 비닐하우스와 농가뿐인, 자극이라고는 극단적일 정도로 없는 분위기에 둘러 싸인 그런 곳으로 귀향하여 정원 가꾸기와 글 쓰기로 축약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의 열두달 정원 일기이다. 그래서 목차도 1월, 2월, ..., 12월의 식으로 되어 있다.

 

이 목차에 붙은 한 줄짜리 제목들에서 촌철살인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1월 버릴 수 없다면 정원사가 되지 마라

2월 사철 내내 꽃을 피울 수는 없다

3월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4월 성장하고 싶다면 가지를 쳐내라

5월 봄의 들놀이가 수만 권을 읽는 것보다 낫다

6월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명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다

7월 꽃을 돌아보지 마라

8월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9월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은 생명체 간의 투쟁 그 자체다

10월 단풍에 취한 찰나로도 충분하다

11월 현실과의 투쟁을 피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12월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바람에 단련된 것이다

 

사람이 아닌, 꽃과 나무들에 보살핌과 애정과 땀을 쏟으며 그는 책과 생각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너머를 체험하고 있는 듯 했다. 정원이 그에게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데, 책 속의 지식이나 생각의 깊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서슬 퍼렇던 그의 주관과 삶의 태도를 다소 말랑하게 만드는 비밀은 정원의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마도 정원 자체가 아니라 정원 '가꾸기'에 그 비밀이 있지 않을까?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손수 가꾼 정원이란, 특별히 사계절 내내 꽃이 가득 찬 공간이 아니다. 하늘에 들어찬 별처럼 찬란한 만개의 순간을 일 년에 며칠 정도만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소우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즉, 불특정 다수의 눈을 의식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어디까지 감동시킬 수 있을까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극히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창조 공간이다. (9쪽)

 

사적인 우주, 개인적 사랑의 창조 공간이라는 정원. 책의 이 첫 단락부터 매혹되어 단숨에 읽어갔다.

 

겨울이란 계절을 '지성의 시간'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한 사람이 또 있던가? 식물들이 새로운 생명을 위해 안보이게 준비하는 겨울에 그는 집중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만약 정원 꾸미기에 정신을 쏟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진정 기뻐하며 위대한 범인으로서 생애를 장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철학자들의 이런저런 고민은 육체를 너무 등한시한,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데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을 일구고 돌을 나르고 좋아하는 초목을 심어 기르는 등의 생활을 체험했다면 살아가는 의미 등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그토록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현세의 생명체에 대해 어떠한 의혹도 끼어들 여지가 없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척추동물로서 당연히 흘려야 하는 땀과, 꾀죄죄한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은 겨우 그런 것들을 하지 않아 고민에 휩싸였던 것은 아닐까. (126쪽)

그래서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수백 권의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위대한 철학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미 해놓은 말, 깨달음들을 이해하고 그대로 습득하는 것과 다른, 사적인 소우주이고 창조 공간이라고 했구나.

 

이 책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맺고 있다.

많은 정원이 겉모습의 화려함에 지배당해 내용은 죽은 정원이 되어 가고 있다. 정신의 죽음을 폭로하는 것이 목적인 듯한 정원과 문학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내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그 정반대에 위치하는 것이리라. 내게는 큰 야심이 있다. 정원과 소설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려면 음과 양을 상징하는 바람과 장미의 나날을 지날 수밖에 없다. 바람은 장미를 단련시켜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고, 장미는 바람에 향기를 실어 보낸다. 그리고 언어는 안정되지 못한 인간계를 바람처럼, 장미 향기처럼 관통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으로 감성과 지성을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132쪽)

바람과 장미로 비유된 그의 삶의 축이면서 동시에 삶의 도구를 어떻게 조화시켜나가는가 하는 것은 그의 몫일 것이고 독자는 기대하며 지켜볼 것이다.

 

굳이 책의 평점으로 별 네개만 준 것은 책이 너무 얇은 것이 아쉬워 심통이 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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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1 14:20   좋아요 0 | URL
일년이 열두달 뿐이다보니 책 두께가 이 정도 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지요.
아쉬우면 한번 더 읽으면 될 일인데 제가 심통을 부렸어요.
님도 읽으셨군요? 소설은 소설대로, 에세이는 에세이대로, 괜찮은 작가임에는 의심이 없는 것 같아요.

2015-05-1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1 14:23   좋아요 0 | URL
외국에 계시니 책 좋아하시는 분에겐 우리 음식보다 우리글 책이 더 아쉬울 때가 많으시지요. 이 책의 내용을 제가 잘 전달하도록 리뷰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루야마 겐지가 정원에서 소우주를 보았듯이 저는 제 주위에서 무엇을 그리 볼 수 있을까, 그것이 꼭 정원일 필요는 없지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015-05-11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5-11 23:58   좋아요 0 | URL
저도 공감이요. 몸은 마음이 가르치고, 마음은 몸이 가르치며 균형을 이루어간다고 생각하는데 모든게 기계화되어가다보니 몸은 안쓰려고 하고 마음만으로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다음 책 제목으로 추천하신 것 멋진데요! 아마 마루야마 겐지 식으로 좀 더 세게(!) 표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

프레이야 2015-05-1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이 동시에 생각납니다. 12장 소제목, 바람과 장미의 나날‥^^

hnine 2015-05-11 14:31   좋아요 0 | URL
읽지 않고 제목만 들었음에도 저도 헤세의 그 책 제목을 떠올렸답니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말씀하신 제목은 위의 다른 분께서도 추천하신 제목이랍니다. 와우...마음이 통했어요.

세실 2015-05-11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굿모닝~~~~~
`한 마리 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는다.`
강한 한마디네요.
하물며 사람일진대........

`당신을 타락시키는 유혹은 언제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심해야겠습니다.


hnine 2015-05-11 14:36   좋아요 0 | URL
세실님, 우리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평범해보이는 한 줄 글로도 일깨워지며 살고 있지요. 한 마리 새도 별별 일을 다 겪는데 힘든 순간과 힘든 일 앞에서 너무 호들갑 떨며 절망하지 않나 저도 다시 볼아보게 되어요.
나 외에 다른 생명체를 키우고 보살피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고개 수그리게 해주는 것 같아요.

stella.K 2015-05-1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루야마 겐지 참 괜찮은 작가로 기억하고 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허걱했습니다. 어쩌자고...ㅠ
다음엔 글 좀 길게 쓰라고 마루야마에게 말해 놓겠습니다.ㅋㅋ

hnine 2015-05-11 14:37   좋아요 0 | URL
ㅋㅋ 사실 두께가 얇아도 용서가 되는 책이랍니다. 내용이 괜찮아서요.
정원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니까 소설이든 에세이든 계속 그의 작품이 나오겠지요. 기다리는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