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겄냐?

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

어미가 이런저런 참견만 느는구나.

늙을수록 고양이 똥구멍처럼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한숨을 말끔하게 내몰질 못해서 그려.

뒤주에서 인심 나는 법인데

가슴팍에다 근심곳간 들인 지 오래다 보니

사람한테나 허공한테나 걱정거리만 내뱉게 되여.

바닥까지 두레박을 내리지 못하니께

가슴 밑바닥에 어둠만 출렁거리는 거지.

샘을 덮은 우덜거지를 열고 들여다봐라.

하늘 넓은 거, 그게 다 먹구름 쌓였던 자리다.

어미 가슴 우물이야, 말해 뭣 하겄어.

대숲처럼 바람 소리만 스산해야.

 

 

 

 

-'가슴우물' 전문-

 

 

 

 

 

티브이 잘 나오라고

지붕에 삐딱하니 세워논 접시 있지 않냐?

그것 좀 눕혀놓으면 안 되냐?

빗물이라도 담고 있으면

새들 목도 축이고 좀 좋으냐?

그리고 누나가 놔준 에어컨 말이다.

여름 내내 잘금잘금 새던데

어디에다 물을 보태줘야 하는지 모르겄다.

뭐가 그리 슬퍼서 울어쌓는다니?

남의 집 것도 그런다니?

 

 

 

 

-'물' 전문-

 

 

 

 

 

이 정록 시인의 글에 보면 어머니 얘기가 참 자주 나온다.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 적기라도 하면,

너 그거 또 적어두었다가 시로 쓰려고 그러는거지? 하셨다는 시인의 어머니.

어머니 이름으로 이런 책이 당당히 나왔다.

(여기에 실린 시들은 되도록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

 

 

한평생, 주저 앉지 않고 열심히 잘 살아내어

나중에

시인의 어머님처럼

일부러 작정하지 않은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산 넘고 물 건너는 일이

덜 고달플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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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2-11-0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우물이라
제목이 참 와닿네요
어머니 이름으로 책을 내 주는 시인
시인은 아무나 되는게 정말 아닌가 봐요

hnine 2012-11-02 20:27   좋아요 0 | URL
가슴에 우물이 파이기까지 어머니가 겪어내셨을 모진 세월을, 제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예, 맞아요. 시는 그냥 써지는게 아니라 그런 우물에서 퍼올려지는 한 두레박의 물 같은 것일지 몰라요.

프레이야 2012-1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러 작정하지 않고 시인이 된 어머니"
그렇게 살아내야겠어요. 쉽지 않겠죠.^^ 마음으로 가슴으로!
나인님, 기온이 뚝 떨어졌어요. 감기조심하자구요. 전 어제 목이 좀 따끔거려
스카프 계속 두르고 따뜻한 차 마시고 지금은 영 나아졌어요.

hnine 2012-11-02 20:30   좋아요 0 | URL
하늘의 새에게 목축이게 해주고 싶은 마음, 모자라는 곳은 채워주고 싶은 마음. 읽고 있으면, 버석거리는 제 마음 한구석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어요.

감기 응급 처치를 아주 잘 하셨는걸요? 목을 따뜻하게, 그리고 충분한 수분 섭취~ ^^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2012-11-03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04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데이지 2012-11-0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도록 소리내서 읽어야하는시라면 두말하지않고 읽어보고싶어요^^
hnine님 글을 읽다보니 결혼전 엄마 말씀이라면 다.잔소리라고 생각했던때가 떠올라 가슴이 뭉클뭉클해요~
깊어가는 가을...편안한 주말.되셔요♥

hnine 2012-11-04 05:55   좋아요 0 | URL
제 할머니 고향이 시인의 어머니 사시는 곳과 비슷한 곳이라서 소리내어 읽다보면 할머니 생각도 나고 꼭 우리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전 그렇더라고요.
어려운 시도 있지만 이렇게 쉬운 말로 쓰여진, 삶이 녹아있는 시들도 있지요.
정말 가을이 나날이 깊어갑니다. 어제는 달 모양이 예전에 먹던 오방떡 모양이던데 (^^)...달 보고도 먹는 거 떠올리며, 누가 말띠 아니랄까봐 포동포동 잘 지내고 있습니다.
블루데이지님도 주말, 잘 지내실거죠? ^^

순오기 2012-11-04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사렵니다.
오늘, 아니 어제 무등산 환경대학 동기에게 이정록 시인과 그의 어머니 얘기를 했는데...^^

hnine 2012-11-04 05:5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자신있게 권해드려요.
어제밤에도 아이때문에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책의 한구절때문에 반성을 했네요. '자식만 한 거울이 어디 있겄냐? 도 닦는 데는 식구가 최고 웃질인 거여.' 라는...

잘잘라 2012-11-0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뭉클합니다. "엄마아~"

hnine 2012-11-05 10:33   좋아요 0 | URL
뭉클...제가 좋아하는 우리말 중 하나랍니다.
아직 어머니가 옆에 계셔주시는 메리포핀스님이나 저 같은 사람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예요. 마음 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