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 편 받아 적고

담배 한 가치 피워 물었다

천장을 보고 누웠는데

십 년 혼자 산 방구석 책 더미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책을 밀고 들여다보니

원고지 위로 돌아다니던

병이 헤벌쭉 웃고 있었다

실없이 왜 웃냐 물었더니

내 등골 뭐 더 파먹을 거 없나 궁리하는

질통의 수작이 야비해 웃었다나

맞는 말이다, 더러운 정까지 들고 만

질통의 야비함에 나도 자주 웃는다

웃음을 술에 섞어 마시면 안주가 따로 필요 없다

술 고파하는 병을 앉혀 놓고

서창을 기웃거리는 봄빛도 불러들여

질펀한 낮술이나 나눠야겠다

두주불사되어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인간적인

병에게 오랜만에 술주정을 해야겠다

사나운 주사를 번번이 받아냈지만

남은 정 다 떨어지면

내 방구석에서 서둘러 이사 갈 것이다

 

< 유영금 '퇴치법' 전문>

 

 

 

 

 

 

 

 

 

 

 

 

 

 

 

 

 

 

 

 

봄이 시작되기 전에 사놓은 시집

 

죽음의 문턱을 몇번이나 넘었다는 시인의 표정과 목소리는

아직도 투쟁중이었다.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외롭고 질긴 사투가 느껴져

읽는 내내 뜨끔거렸다.

섬뜩한 시어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시인의 질긴 의지를 발견한 후엔

더 읽을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오늘

무슨 마음이 들어 다시 이 시집을 꺼내들었다

봄이 가기 전에 마저 훑어봐야 했나

봄이 곧 가버릴 것 같아서였나

 

 

 

 

 

짐승 같은 통증아,

 

땅거미 지는 쑥밭에 앉아 아편 한 대 피워 봐

 

까마귀 누이가 따르는 독주 한 잔 받아 봐

 

취하거든 저녁달의 살을 깎아

토악질 나는 시를 써 봐

 

< '처방전' 전문 >

 

 

숲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고혹스럽게 부드럽게

휘감아오는 누가 있어 돌아보니

하늘가 수런거리는 햇살이더군

귓부리를 물고 속삭였지

 

하늘 귀퉁이 한 뼘 내줘, 죽도록 필게

 

<'나도 꽃으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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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4-24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하거든 저녁달의 살을 깎아
토악질 나는 시를 써 봐.

딱 이러고 싶은 저녁이에요, 나인님^^

hnine 2012-04-24 22:14   좋아요 0 | URL
음...내일 프레이야님 서재에 또 한편의 시가 올라오는건가요? ^^

2012-04-25 0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5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2-04-25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나아질 수 있도록
좋은 햇살 바람 소리 누리는 곳으로
삶터를 옮겨
좋은 삶 이어가는 시인이 되시기를 빌어요 (시집 글쓴이한테)

hnine 2012-04-25 06:57   좋아요 0 | URL
서울에 사시는 것 같지는 않아요.
교통사고를 시작으로 해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까지, 몸도 마음도 많이 고통을 당하셨더라고요.
지금은 아이들 글쓰기 지도를 하고 계신다는데 저 시집이 2007년에 나왔고 이후 작품은 내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달사르 2012-04-2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해지네요. 아파하는 느낌이 있는데도 (독자에게) 담담하게 전달되는 걸로 봐서 시인의 고운 심성이 짐작됩니다.

..

친구에게 선물해주고픈 시집이네요.

hnine 2012-04-25 15:41   좋아요 0 | URL
전 이 시인을 TV에서 봤는데요, 인상은 문정희 시인과 비슷했어요.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랄까. 오히려 단단해지고 강인해보였답니다. 그렇겠지요.

이 시집을 주고 싶은 친구가 있으신가봐요 ^^
봄이라면 봄이라서, 가을이라면 가을이라서...시는 늘 마음에 위안을 줘요.

글샘 2012-04-2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인갑다... 사람들이 시집을 읽고픈 걸 보면요...

하늘 귀퉁이 한 뼘 내줘, 죽도록 필게

이 구절 읽으면서 괜히 미안해 지네요. 열심히 안 사는 게...

hnine 2012-04-25 20:29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네요, 요즘 서재에 시집 리뷰나 페이퍼가 많이 올라와요.
읽는 사람마다 마음에 꽂히는(!)구절이 다를 수 있겠지만 또 어떤 부분은 똑같이 와닿기도 하는 것 같아요. 한 귀퉁이만 내어줘도 죽도록 필텐데 하는 시인의 소망과 안타까움, 절실함이 그대로 느껴지지요.

카스피 2012-04-2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우울하고 괴로운일로 술을 마시면 금방 대취하지만,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면 절로 술이 술술 넘어가지요^^

hnine 2012-04-26 07:1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술은 괴로울때보다 즐거울때 마셔야겠네요 ^^
마음이 우울하고 괴로울때는 무엇에 대해서도 취약한가봐요 ㅠㅠ

2012-04-26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07: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6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