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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여행 - 네가 원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박선아 지음 / TERRA(테라출판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면 다른 무엇보다 나의 시간과 노력과 돈을 투자하고 싶은 것은 여행.
자식을 키우고 있는 지금, 내 시간과 노력과 돈을 아껴 자식에게 해주고 싶은게 있다면 그것도 여행.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현재 있는 자리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만 할 때보다는 오히려 그곳을 벗어나 다른 여러 사람들의 삶을 보고 느낄 때가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삶이 팍팍하고 가망 없어 보일 때에도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살아 있는 지 보고 겪어본 사람은 좀 넓게 보고, 가볍게 털어낼 줄도 알게 될 힘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내게 여행은 단순한 휴가, 놀이, 여흥의 개념이 아니라 차라리 사서 하는 '고생'에 가깝다.
이집트에 대한 흥미가 마구 커지고 있던 때에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다른 곳에 비해 이집트 여행 관련 책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20년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딸을 데리고 80일 동안 여행을 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오소희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라는 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연 다른 여행책들과 무엇이 다를까 호기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시작해서 터어키, 이집트, 그리스, 독일이라는 흔하지 않은 여정이 그 중 하나일까?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것을 미리 가르치기 보다 세상과 사람 속으로의 여행을 시켜주고 싶었다는데, 알고 보니 그 전에도 아이는 이미 여행을 너무나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여러 곳을 다녀본 경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일까. 책 속에 나타난, 여행을 하는 아이의 태도나 표현, 낯선 곳에 적응, 어울림 등이 어른을 능가한다. 아이다운 언어로 표현하는 느낌이 남다르다.
영국에서는 런던이라는 대도시와 코츠월드라는 시골 마을에 머문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곳에 머무르면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정리했을까. 다른 두 지역의 모습은 곧,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영국 사람들의 성격이기도 하다고 그들도 느꼈을까?
가난하지만 따뜻한 나라, 터키 여행 부분을 읽으면서는 수도인 앙카라보다는 '사프란볼루'라는 곳을 더 기억해두고 싶었다. 아름다운 건물, 자연, 유적지보다 더 한 것이며, 모든 여행의 중심이기도 한 것은 바로 '사람'풍경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터키에서 다음 행선지인 이집트. 내가 제일 관심있게 보고자 했던 나라. 하지만 여기에 도착하자 마자 이들은 절망한다. 사막여우를 보고 싶다는 아이의 바램이 발단이 되어 정한 행선지였는데 이들이 발견한 것은 오직 무질서, 가난, 더위, 속임수에 지친 나라. 터키가 천가지 얼굴이었다면 이집트는 만 가지 얼굴이라니. 마지막 일정으로 들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겨우 이집트의 희망을 보았다고 했는데 이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답지 않은 도시라니, 이집트에 갈 때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겠구나 다짐해본다. 사막에서 담요 한장 깔고 별을 보며 자는 경험은 여전히 멋지지 않나?
그리스에서도 역시 인상깊었던 곳은 수도인 아테네가 아닌 산토리니라고 했다. 걷기만 해도 마음속의 우울함이나 불평불만을 순식간에 가져가 버린다는 산토리니는 사진으로 봐도 시선을 붙잡는데 실제 그곳에 가서 보면 어떨지 짐작이 간다. 일곱살 아이는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다고 했단다. 길이 없으면 내가 길을 만들면 됀다고 엄마에게 당당히 말하는 아이. 너의 미래가 궁금하구나. 광화문의 카페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아티카'는 그리스의 반도 이름이었다. 모든 관광객들이 파르테논 신전을 향해 갈때 거들떠보지않고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는 아이는 남들의 백가지 의견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갈 수 있겠지.
마지막 행선지 독일에서 이들은 천국을 만난 기분이 된다. 질서가 있고 친절이 있고 말이 통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겸손함과 관대함, 당당함이 함께 어우러진 것 같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독일 사람들이 그러하단다. 독일 언니들은 영국 언니들처럼 화장을 진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더 예쁜 이유가 뭘까 묻는 아이에게, 방금전에 지하철에서 보았듯이 책을 많이 봐서 저렇게 예쁜 것 같다고 말하는 엄마. 독일의 하이델베르그를 다니면서 철학이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철학은 모든 것에 대하여 조금 더 깊게 생각하는 것,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얘기해주는 엄마. 나는 어느 새 여행지에 대한 정보보다는 이들 모녀의 대화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이 책은 기대했던 만큼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듬뿍 담겨있는 책도 아니었고 (그러기엔 내용이 너무 듬성듬성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의 독특한 사유가 담긴 책이라고 할 정도의 글쓰기 능력과 단단한 내공이 보이는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의 일기 수준이랄까? 이 책에서 제일 돋보이는 것은 역시 일곱살 여자 아이의 발걸음, 그 아이의 재잘거림이었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 모두 비슷하게, 그러면서 모두 다르게.
나는 그 중의 한 일원일뿐.
여행은 이렇게 꿈꾸는 것만으로도 호흡의 깊이를 달리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