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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걸스 ㅣ 개암 청소년 문학 8
로리 홀스 앤더슨 지음, 공경희 옮김 / 개암나무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나는 계획 없이 먹는게 뭔지 기억 못 한다. 칼로리와 지방 함유량을 계산하고, 내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늠해서 그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가늠한다. 보통은 안 된다고, 먹을 자격이 없다고 결정한다. 그러면 거짓말과 변명을 늘어 놓으며 피가 나도록 혀를 깨물고 입을 꾹 다문다. 그 사이 눈먼 촌충 한마리가 내 기관을 감싸고, 킁킁대며 내 뇌의 열린 틈을 찌른다. (261쪽)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섭식장애를 가지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친구이자 소아과 의사로 부터 이 주제를 한번 소설로 다뤄보라는 권유를 받아 쓰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대학 진학을 앞둔 한 소녀 '리아'와, 그녀의 절친이었다가 한동안 관계가 소원해진 동안 결국 혼자 모텔에서 쓸쓸히 세상을 등진 '캐시', 그리고 그 둘의 가족들이 등장 인물로 나온다. 캐시는 죽기 전에 계속 리아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리아는 그 전화를 무시했고 그 죄책감때문에 캐시가 죽은 후에도 사방에서 그녀의 환영을 보며 괴로와 한다. 죽기 전 캐시는 뚱뚱한 자기 모습 때문에 고민하고 잃어하는 자신감을 찾기 위해 먹고 토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리아는 캐시의 그런 모습을 혐오하기 보다는 동정하고 도움을 주어왔다. 그런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되자 마음이 의지할 곳을 잃은 캐시는 더 방황을 하게 되었고 리아는 신경을 끄고 있던 중이었다.
삐쩍 마른 신체를 가지고 있는 리아는 먹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여 음식이 나오면 일단 칼로리부터 계산을 하는 타입. 비정상적으로 말라가는 그녀를 가족들은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가기도 하고 요양원에 입원시키기도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리아에게는 더 거부감만 일으킬 뿐이다. 심장 전문의인 엄마와 역사학과 교수인 아빠를 둔 리아. 엄마는 늘 바빴고 자로 잰듯 철저한 사람이었으며 부모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결국 부모는 이혼을 하고 리아는 새엄마와 새엄마가 데리고 온 이복 동생과 새로운 가족 구성 속에서 살게 되는데 리아의 문제점을 안 새엄마는 매일 리아의 체중을 재면서 그녀를 지켜보는 책임을 맡았고 이런 새엄마의 눈을 속이기 위해 리아는 체중계에 올라가기 전 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숨겨 넣고 몸무게를 속이고, 다른 식구가 먹은 접시를 자기가 먹은 접시인양 꾸미는 등, 먹을 것을 거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자기 몸을 면도칼로 긋는 자해 행위를 하며 내 몸 속의 온갖 독소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는 것 하며, 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카페테리아에 모여 있는 학생들을 보며 꾸역꾸역 모여드는 수족관을 연상하는 리아는 현실을 현실로 보기 보다는 혐오스럽고 피하고 싶은 도가니로 볼 뿐이다.
'윈터 걸'. 완전히 산 것도 아니고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닌 사람을 말한다. 죽은 친구 캐시의 환영은 리아에게 너도 이쪽 세계로 오라고 권한다. 리아 자신도 먹을 것을 극도로 거부함으로써 온전한 삶을 꾸려나가질 못한다. 즉 윈터 걸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비록 그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믿고 따라주는 이복 동생 엠마를 위하는 마음, 자신의 극단적인 행동이 어린 엠마에게 또다른 상처와 회복되기 힘든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는 리아를 보며 그녀의 순수하고 여린 본성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제발 그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길 바라며 조마조마 했다.
이 책은 번역본이긴 하지만 눈에 띄는 개성있는 표현들 때문에 더 좋았다.
다음은 망가져가고 있는 자기 몸을 리아가 상상하는 부분이다.
고름 색깔의 지방 덩어리가 내 허벅지와 배를 짓눌렀지만, 의료진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내 뇌가 줄고 있다고 말했다. 두개골 안쪽에 전기 폭풍우가 밀어닥쳤다. 내 지친 간은 가방을 싸고 있었다. 내 콩팥은 모래 바람 속에서 길을 잃었다. (238쪽)
다음은 리아를 또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한다는 말을 하는 아빠를 보며 리아가 하는 생각을 표현한 부분이다.
땅콩 버터가 아빠의 입술을 딱 붙여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로 끈끈하지 않다. (263쪽)
작가는 어떻게 보면 일반인으로서는 공감하기 힘들지도 모를 리아의 심리 묘사를 참 특이한 방법으로 잘 해놓고 있었다. 훌륭했다.
내 이야기로 실을 잣고 내 세상이란 천을 짜고 있다. 어린 요정 무용수는 나무 인형이 되었다. 무신경한 사람들이 그 인형에 달린 줄을 홱홱 당겼다. 나는 통제력을 잃고 빙빙 돌았다. 먹는 게 힘들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사는 것은 가장 힘들었다. (345쪽)
마지막 페이지의 그녀의 힘겨운 한마디는 어떤 결의보다도 감동적이다.
나는 내 언어와 환상을 물레질하고 짜고 뜨개질한다. 삶이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할 때까지. 마법의 치료 따위는 없다. 뭐든 영원히 떨쳐 버릴 수도 없다. 다만 작은 발걸음으로 나아갈 뿐이다. 좀 수월한 하루, 예상치 못한 웃음,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거울. (345쪽)
참으로 삶은 극복해야할 일 투성이이다. 그건 꼭 나이와 상관 없다. 그 한가지를 극복해낸 주인공 리아는 마지막 부분에서 내게는 십대 소녀가 아니라 거인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