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왜 의사란 직업을 그만 두고 여기 (대학 연구실) 와서 일하기로 한거야?

그녀 (베네주엘라 출신) : 의사로 일하기엔 내게 좀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어. 

나: 문제? 어떤 문제? 

그녀: 우리 병원에서 의사 한 사람이 하루에 봐야하는 환자수가 백명이 넘거든. 환자 한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은 겨우 몇 분 정도야. 그런데 나는 환자 한 사람 앞에 놓고 20분도 좋고 30분도 좋고, 너무 시간을 끄는거야. 

나: 왜? 

그녀: 너희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 베네주엘라에선 말야, 의사에게 오는 환자들, 특히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은 와서 아픈 증상만 얘기하지 않거든. 어디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것과 상관없는 얘기까지 자꾸 이어서 하는거야. 

나: 하하,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아닐까? 

그녀: 기다리는 환자를 위해서 그걸 적당한 때 끊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못하겠는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면서 들어주고 있다 보면 시간이 후딱 지나고. 그게 문제가 되었어. 그래서 나는 그 직업이 내게는 아무래도 맞지 않나보다 생각하게 되었지.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일을 새로 시작하느라 좀 힘들어보였던 그녀. 다른 직업도 아니고 '의사'란 직업을 그만 두고 다른 나라까지 와서 왜 고생하나 싶어 물은 나에게 그녀가 한 대답이다.
내가 먼저 그곳을 떠났고 이후 연락을 해본 적은 없는데 지금 그 곳 홈페이지에 가보니 그동안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 명단에도 없다.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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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0-0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자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의학적 치료만큼이나 효과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전 어느 섬에 보건소 의사야 말로
진짜 의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해요.^^

hnine 2010-10-01 18:48   좋아요 0 | URL
그럼요, 누가 나의 얘기를 진심으로 잘 들어주는 것만큼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래야 몸에도 차도가 생길 것 같고요.
그런데 현대의 병원이라는 곳이 그렇게 돌아갈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저도 인정은 해요.

상미 2010-10-0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약국 와서도 내가 뭘 해결해주길 바래서가 아니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쭉 이어가시는 분들 많단다...
얘기 끊기 은근 어려워.

hnine 2010-10-01 18:59   좋아요 0 | URL
준이 약국 가서 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구. 박카스 한병 사면서도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아주머니들, 그런데 그런 얘기 들어주는 것을 참 잘 하데~~ ^^

2010-10-01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1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10-10-0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도 넘은 할아버지께서 공인중개사 접수를 하러 오셨더랬죠. 공인중개사 시험이 어려워요. 저 같은 경우는 시험 시간안에 문제나 다 읽을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문제를 풀어야 하지요. 것도 시험시간만 250분인 까다로운 시험인데 이렇게 고령의 할아버지께서 어쩌시려고 접수를 하시나 물었어요. 그랬더니 사람구경 하려고 접수하셨다네요 -_-;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거,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병원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은 하소연을 들어주는 상대가 필요해서 찾는 사람이 많을거라구요.

hnine 2010-10-01 19:00   좋아요 0 | URL
'사람 구경 하려고' 그 말씀이 웬지 찡 하네요. 나이 들수록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상대해주는 사람이 줄어가니 사람이 그리워지는 거죠.

남의 이야기 들어주는거라면 저 정말 잘 할 수 있는데...다른 사람 얘기 듣다가 위로 차원이라면서 저의 창피한 얘기도 다 불어버려서 탈이지만요 ^^

2010-10-01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1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0-10-0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시엄니도 말씀하시는거 참 좋아하세요. 식당에 모시고 가면 주인 붙잡고도 어찌나 대화를 하시는지.....좀 줄이시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 들다가도 사람이 그리우신거 같아서 가슴이 찡하기도 합니다.
요즘 거의 집에 계시거든요. 아버님은 저녁이나 되어야 들어오니 외롭기도 하시겠죠.
전? 요즘은 2주일에 한번정도 잠깐 들른답니다. 에구....

hnine 2010-10-01 21:53   좋아요 0 | URL
나도 나이 들어 얘기할 상대가 그리우면 어떡하나 전 지금도 가끔 생각하거든요. 책 읽으면 되지 뭐, 하고 생각했다가도 어디 책이 사람과 비길까 생각하면 참 쓸쓸해요. 저희 친정부모님께서도 며칠 전화가 없으면 먼저 저희 집에 전화를 주시는데 전화하신 용건이라는 것이 들어보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그러니까 일종의 구실인 셈이지요.

순오기 2010-10-02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분은 정신과 의사를 했으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분이 진정한 의사의 모습이겠죠. 환자는 육신만 병든 게 아니라 마음이 먼저 병들었기에 마음치료가 더 우선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분, 참 좋은 의사였을거라고 생각돼요.

hnine 2010-10-02 08:1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자기 나라로 돌아가 다시 의사로 돌아갔는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나름 대접 받는 직업이었을텐데 새로운 일을 배우느라 고전을 하면서도 늘 생글생글 웃고 다니던 친구였는데.....
환자는 육신뿐 아니라 마음이 먼저 병 들었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