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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rrendered (Paperback)
Chang-Rae Lee 지음 / Riverhead Books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이 창래’ 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십여 년 전 영국의 한 대학 서점에서였다. 신간 진열대에 다른 책들과 함께 놓여 있던 책은 <A Gesture Life> 였는데, 영어로 쓰여 있는 표지의 저자 이름이 언뜻 보기에도 시각적으로 달라보였기 때문이었을까? 혹시 한국인이 아닐까 싶어 책장을 들춰 보았더니 한국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이민을 간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지내고 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신간이니 물론 하드 커버였고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도 망설임 없이 그 책을 구입하여 읽었었다.
최근에 발간된 그의 책 <The Surrendered> 표지를 읽는 동안 자주 들여다 보았다. 어두운 바탕에 하얀 손. 그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 무슨 의미일까?
전체 19장으로 되어 있는 중 첫 장의 배경은 1950년 한국이다. 이제 열한 살 된 여자 아이 June이 쌍둥이 여동생 희순, 남동생 지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에 타고 있는 장면이다. 폭격으로 엄마와 언니를 잃고, 아빠와 오빠는 그 전에 이미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발 디딜 틈 없는 피난 열차에서 결국 떨어지고 정신이 들어보니 여동생은 이미 죽어 있고, 남동생은 다리 한쪽을 잃고 출혈이 심해 죽어가고 있는 중. June은 이미 가망이 없음을 알고 뒤돌아 혼자 막 떠나려 하는 피난 열차에 다시 오른다. 죽은, 그리고 죽어가는 동생들을 뒤로 하고 다시 열차에 오르는 June은 이후로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위암 말기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이런 배경을 두고 다음 장의 배경은 1986년 뉴욕, 전쟁 후 36년이 지난 시점이다. 남편이 죽기 전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가구점과 집을 팔고 이사 준비를 하는 June. 그의 아들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후 행방이 묘연한 채 더 이상 연락이 안 되고 있고, June은 사람을 고용하여 아들의 행방과 함께 Hector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도록 시킨다. Hector란 남자는 전쟁 당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그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던 그녀를 발견하여 고아원까지 데려다 준 사람이다.
이 Hector 는 어떤 사람인가? 불구였던 아버지를 취한 상태로 술집에 혼자 두고 나와 옳지 못한 짓을 하고 있는 동안 아들을 기다리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술 취한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나자 자책감을 이기지 못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로 한다. 전쟁 중, 한국인 출신으로 보이는 중공군 소년병 포로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포감에 질린 소년병이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죽음을 택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보살피는 고아원에서 잡역일을 하며 머무르게 되는데 그 고아원을 찾아가는 길에 굶주림에 죽어가는 June을 발견하여 함께 고아원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고아원을 책임지고 있는 미국인 목사의 부인 Sylvie는 잡역부로 일하는 Hector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이고, June은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공격적이고 과격한 행동만을 일삼는다. 이런 June과 목사 부인 Sylvie, 그리고 Hector사이에 미묘하고 뒤틀린 관계가 형성되어 가며 이야기가 전개되어 간다.
June의 고아원에서의 어린 시절과 현재, Hector의 과거와 현재, Sylvie의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등장함으로써 그들의 현재가 있기까지의 얽히고설킨 슬픈 과거가 매우 조직적이고 흥미 있게 구성되어 있다.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과거의 경험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가. 부모 형제를 졸지에 잃고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어 극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June의 그 후의 생, 자기의 과거 잘못으로 인하여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의 목숨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경험을 하고 나온 Hector의 이후의 삶, 선교사로 일하는 부모를 따라 일찍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살던 어린 Sylvie가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모습으로 부모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난 후의 정신적 트라우마로, 목숨은 붙어 있지만 그 시점으로부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사는 삶. 과거의 치명적인 경험은 개인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거의 잠식해버리지 않는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서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June은 Hector를 수소문하여 찾아내 함께 그들의 아들이 떠난 이탈리아로 가서, 아들을 찾아내어 다 함께 Solferino로 가는 것이 소원이다.
끝내 아들은 함께하지 못한 채 Hector와 함께 그곳으로의 긴 여정을 끝마쳤을 때 June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혼자 일어설 수도 없는 상태에서 처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이 마지막 부분이 어찌나 조용하면서도 참담하던지 447쪽 부터는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장 까지 계속 울면서 읽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이처럼 슬프고 처참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 앞에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많은 경우들을 겪으며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달라지고 망가져갈 수 있는지, 작가는 낮은 소리로, 하지만 무겁고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먼 나라까지 힘들게 찾아와 원하던 장소에 와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아들이 옆에 없는 것을 끝내 아쉬워하며 June이 눈을 감는 것에 이어 마지막 장면은 다시 이 책의 시작 부분에 소개되었던 장면, 즉 피난 열차에서 떨어져 죽어가는 동생을 두고 혼자 다시 열차에 올라타는 열한 살 소녀 June으로 맺고 있다.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무슨 영화를 보고 난 후처럼, 책 속의 몇 몇 장면들이 영상처럼 자꾸 머리에 떠올랐다. 대체로 비극적이고 가슴 아리는 장면들이.
정말 그런가보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 원하는 대로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소설이 탄생한다는, 작가의 인터뷰 중 그가 한 그 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