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김없이, 남김없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숨김없이 남김없이
김태용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책 뒤에 실린 작가와의 인터뷰를 일부러 읽지 않고 리뷰를 써보기로 한다. 오로지 내 느낌에 충실하여 소감을 써보고 싶어서이다.
리뷰 제목을 뭐라고 할까 고민 중이다. '성.인.물' 이라고 할까? 아니면 '소설의 형식을 하고 있는 독백'이라고 할까. 흔한 표현이지만 '언어의 유희'라고 할까.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점 중의 하나는, 과연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스스로 즐거웠을까, 아니면 그야말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썼을까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작품은 내가 지금까지 접해보던 소설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소설의 줄거리는 있는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줄거리라는 것을 만들며 글이 펼쳐지고 있나보다 하며 읽다보면 어느 새인가 작가의 독백이 이어지고, 이렇게 끝나려나 하다보면 앞의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고. 잠깐 정신을 놓고 건성으로 읽다보면 글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신기하게 읽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단어를 가지고 무슨 일을 했던 간에 그 나름대로 거기에는 일관성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 속에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가 한 목소리로 들렸다는 점, 그리고 한 문장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서 적어도 하나의 문장을 읽어나가다가 호흡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즐겨 쓰는 문장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모순' 구조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다른 곳에 가도 이곳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고 이곳보다 좋지 않을거야...그녀는 그가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말을 하는 순간 행동으로 실현될 것이라 믿었다. 그녀가 붙잡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언제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있어 붙잡고 있는 것을 놓치면 영영 다시 붙잡지 못할 것 같았다. (64쪽)  
   

계단을 밟을수록 계단이 하나씩 늘어났다는 표현은 또 어떤가. (101쪽) 예전에 공부할 때 무엇에 대해 한가지 새로 배우고 나면 그것에 대해 이해 안되는 것이 다섯 개 씩 새로 생겨나기 때문에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고 투덜거리곤 했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이어서 금방 공감이 갔다.
이 책의 제목이 들어가 있는 부분에 어떤 식으로 그 어휘들이 늘어서 있는지를 보자.

   
  모든 비유 속에는 세계의 질서를 조롱하는, 혼돈마저 조롱하는 비아냥거림이 도사리고 있거나...(중략) 그렇다면 불활성과 불확실성에 대해 좀더 말해야 한다.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숨김없이. 남김없이. 아낌없이. 여지없이. 기약없이. 후회없이. 없이마저 없이. 기꺼이. 입이 아프도록, 입술이 부르트도록, 혀가 갈라지도록, 침이 마르도록, 목구멍이 닫히도록, 하악골에 금이 가도록, 입이 주둥이가 되도록, 주둥이가 영영 입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까지 떠들어야 한다. (162, 163쪽)  
   

 이런 식이다. 재미있다. 그리고 모든 비유 속에는 조롱하는 비아냥거림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도 조금 맘에 든다.
내용 중에 돌쌓기에 대한 행위, 의미, 과정 등이 한참 동안 나오는데 아마도 글쓰기를 비롯한 창작 행위를 비유하지 않았나 싶다. 그의 말대로 조롱하는 비아냥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돌쌓기 작업에 대한 표현 중에 '시간의 사체 (死體) 가 자란다' (217쪽)라는 문장에서는 창작 행위에 대해 그가 얼마나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지로 해석되기도 했다. 사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과정이라니.
345쪽의 다음 구절에 이르자 작가가 이러한 언어 행위를 하게 된 배경이랄까, 변명이랄까,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화된 언어가 아닌, 소통의 언어가 아닌, 목적의 언어가 아닌, 기록의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형태와 소리의 울림과 발광의 언어를 부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언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언어 이전의 목소리와 시선 그리고 떨림이 전부인, 짐승도 흉내 낼 수 없는, 차라리 언어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중략) 이것 봐라. 저들의 언어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언어는, 아무리 어법에 맞게 사용된다고 해봐야 이렇게 불완전하고 불확실 할 수 밖에 없으니 그 정해진 형식에서 벗어나보고자 함이라는 뜻일 것이다.
본문 중에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이 넘쳐나고, 적나라한 행위, 명칭, 표현이 넘쳐 흘러 (이런 책 정말 처음이다) 책의 중간을 넘어서는 거부감이 들뻔 하기도 했다. 뭐 이럴 것 까지야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가 모르던 언어, 말, 글 등의 저 깊은 속을 뒤집어 보여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작가는 언어의 정체를 철저하게 파헤쳐보고 싶었나보다. 그 실험 정신과 도전 정신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래서 다 읽은 지금, 뿌듯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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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20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인님 리뷰를 읽으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인님께서 적으신 그런 책을 썼을까..저자를 찾아보기까지 했어요. 1974년생의 한 남성의 얼굴이 보이네요.

언어에 대한 글에 대한 뒤집음 ..재밌어요.. 근데.. 정말 .. 인용하신 글을 읽으면서 혼자 웃었어요...나인님.

hnine 2010-04-20 22:14   좋아요 0 | URL
서평단 덕분에 제가 참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궁금해지더라고요. 아마도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 아닐까, 옆에 있는 사람을 절대 지루하게는 하지 않겠다, 그런 상상을 했더했습니다.
그리고요, 이 책의 첫장이 1장이 아니라 -1장, 그다음이 0장, 1장, 이런 식이랍니다, 큭큭...재미있죠?

2010-04-20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1 0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0-04-2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 그 아주 독특한 소설인가 봅니다.
그런데 님의 글 맨 마지막 문단에서 좀 주춤거리게 만드는군요. 흠...

hnine 2010-04-22 04:43   좋아요 0 | URL
하하...그래도 전 별 다섯 개 주었습니다 ^^

2010-04-21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2 0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