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안 리즈 그로베티 지음, 신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베냐민과 오스카라는 두 사내 아이가 등장하여 함께 학교 다니고 놀고 장난 치는 얘기가 나오길래 처음엔 '꼬마 니콜라' 같은 분위기의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꼬마 니콜라는 굳이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할 필요가 없었지.
오스카의 아버지는 은행에서 일하는 회계사, 벤야민의 아버지는 작은 식료품 가게 주인. 둘 다 시를 좋아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학교를 마치면 벤야민은 아빠의 식료품 가게에 들러 오스카와 함께 사탕을 얻어 먹기도 하고, 그 또래 사내 아이들처럼 장난도 치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그러던 그들에게 언제부터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시간'이 오게 된다. 나찌의 세력의 범위 내에 이들의 마을이 들어가게 된 것. 유태인인 오스카의 가족은 당장 위협을 받게 되고, 이들 가족을 도우려는 오스카 아버지까지 혹시 피해가 갈까봐 염려 속에 오스카 아버지가 택한 결단은 그 마을을 떠나기로 한 것. 이 두 아버지는 물론 오스카와 벤야민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함께 제비꽃 사탕을 먹으며 뭐든 따뜻하고 달콤한 것에는 제비꽃 사탕 같다고 비유하던 벤야민과 오스카의 행복한 어린 시절, 서로가 더 좋은 시인의 기질을 가졌다고 농담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와 아름다운 언어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던 이 둘의 아버지의 삶의 낙이, 이 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시대적 상황, 여기서는 인간의 광기로 벌여진 엄청난 불꽃의 열기라고 묘사되어 있는 히틀러의 광기와 이념때문에, 어떻게 묵살되고 폐허처럼 남게 되는지, 열변과 폭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천진한 어린이의 입장에서 보고 느낀 대로 묘사되어 있다.

   
  사람들의 말과 인사를 나누는 방법, 목소리의 크기가 바뀌었다. 그 다음에는 깃발과 행렬이 조금씩 늘어 갔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축제라고 믿고 싶었다. 어쨌거나 어깨에 힘을 주고 음악에 맞춰 깃발을 따라 행진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으니까. (27쪽)  
   

 동네가 나찌 세력권에 들어감에 따라 달라저 가는 모습이 어린 벤야민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묘사한 대목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임무가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33쪽)  
   

 세상이 그렇게 다시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던가? 어느 강한 소수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서?
오스카의 가족과 헤어진 후 벤야민은 시인이 되기를 바랐던 아빠의 기대와 달리 물리학자가 되었지만, 작은 입자들 속에도 하이네의 시에 있는 것만큼이나 많은 시구(詩句)가 들어 있다고 아빠를 설득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작은 입자들 속에도 많은 시구가 들어있다는 그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던지. 이런 마음이 시대를 버티게 하는구나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작가는 삶이 경멸당할수록 삶의 소소한 면면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다고 한다 (78쪽). 이야기 속의 이들에게 그것은 였고 아름답고 진실된 이었다.

   
  아빠의 뜻을 따르기 위해 지금까지 늘 노력해 온 것이 있다. 악의를 품은 말도, 숱한 어리석은 말도 입에 담지 않도록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 (74쪽)  
   

이 책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대상황을 극복해가는 방법으로서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 금방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한 사람의 말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도록 하는데 더 마음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열아홉살에 문단에 화려하게 등단한 작가가 이제 육십이 다 되어 펴낸 소설이라는데, 어린 아이의 눈으로 묘사되어 그런지 짧고 간단한 문장, 그리고 7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 분량때문에 소설보다 꼭 시를 읽는 것 같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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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4-13 01:06   좋아요 0 | URL
아이쿠, 후다닥 올린 리뷰였는데 칭찬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자연과학과 문학이 별개의 다른 분야가 아니라 이렇게 서로 교통되어질 수 있을 때 참 멋있는 것 같아요.
'우아하다'라는 말에는 그렇게 높은 격이 있었네요.

하늘바람 2010-04-1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읽는 것같은 책.
저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시처럼 간결하고 깊음을 담은.
제목도 참 시 같네요

hnine 2010-04-13 01:09   좋아요 0 | URL
예, 깊이 있는 글이 꼭 길고 장황한 글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깊이있는 글을 쓰겠다고 작정하며 쓰면 대개 글이 길고 장황해지는 것 같은데 이 책은 그런 의도가 보이지 않고 간결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오히려 감동을 주는 것 같았어요.

프레이야 2010-04-1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의를 품는 말도, 어리석은 말을 입에 담는 일도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나인님의 글은 늘 정곡을 찌르는 감동이 있는 것, 아시죠?^^

hnine 2010-04-14 06:04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에서 그 부분을 읽으면서 찔끔했거든요.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살지 않는 한 누구든지 그러지않을까 싶어요.

같은하늘 2010-04-16 15:1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 많지요.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살 수도 없고...